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진 Sep 01. 2020

prologue

초보 도비 의대생의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읽는 이야기

3월의 어느 날이었다.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현진아, 엄마가 전주에 언니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할 거 같아."

 "뭐? 그럼 나는?"

"아빠가 올라오실 거야."

 "아빠랑 둘이 살라고? 차라리 자취를 시켜줘"

 "아빠가 서울에서 일하게 됐대. 가족이 둘 다 서울에 사는데 굳이 따로 살아야 하니? 전세금은 땅 파면 나와?"

나는 서울 어디쯤에 있는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의과대학의 생활은 바쁘기로 매우 유명하다. 그리고 알려진 것보다 훨씬 바쁘다. 본과 1, 2학년 때에는 매일 압사당할 것 같은 양의 강의 슬라이드를 소화해야 한다. 그 와중에 시험과 과제는 또 얼마나 많은지 밤새는 일도 부지기수이다. 실습 중에는 조금 사정이 낫긴 하지만 7시까지 병원으로 출근해야 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5시에 퇴근하고 나면 그 과의 공부를 하고,  케이스 발표를 준비하고, 시간이 조금 남으면 국가고시 시험을 준비한다.


이렇게 꽉 채워진 생활 계획표에는 더이상 나눌 파이가 없다. 많이 양보해서 혼자서 사는 거라면 모를까. 2인 가구의 집안일은 절대로 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나는 집안에서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자란 철없는 막내딸 포지션이다. 쌀도 안칠 줄 모른다. 화장실 청소는 어떻게 하는 거지. 아 맞다. 나 세탁기도 돌릴 줄 몰라... 절대 안 돼. 난 엄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갑자기 위기감이 턱 끝까지 몰려온다. 엄마를 절대로 보낼 수 없다. 투쟁해봤지만 어른이 아닌, '우리 집의 아기' 막내딸은 발언권이 없다. 몇번의 눈물과 언쟁이 지나고 걱정만 쌓이는 채로 엄마가 떠날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벌레의 습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