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조식 뷔페-슈퍼에서 아이스크림-수영-넷플릭스 앤 칠-시내 구경
아!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석사 졸업 논문을 제출했다. 역시나 나는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았고, 끝까지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며 채찍질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모든 걸 해냈다.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부스터 백신을 맞았으니, 벌써 3번째 백신 접종인데도 불구하고 며칠을 아팠다. 아프다는 핑계인지 오랜만에 쌀밥이 계속 먹고 싶어서 스테인리스 냄비에 솥밥을 해 먹었더니 너무 맛있었고, 며칠 동안 스테이크 솥밥, 가지 솥밥을 해 먹으며 숙면을 취하니 며칠 후에는 백신 맞은 팔으로 필라테스 볼까지 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잘 먹고 쉰 덕분에 휴가 전 다이어트와 복근 만들기는 대실패, 비키니도 안 샀고, 태닝 오일도 안 샀지만, 일단 마요르카 섬으로 떠나자. 딱 5일 동안 나를 위해 푹 쉬고, 자고, 먹고, 노는 홀리데이가 시작되었다.
꽤 오랜만인 3개월 반 만에 영국을 떠나니 너무 설레어서 공항에서부터 기분이 좋았다. 평소 구매하고 싶었던 화장품도 공항 면세점에 재고가 있어서 구매할 수 있었고, 스타벅스에서 아이스커피 한 잔을 마시니 시간이 딱 맞았다. 평소에는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겠지만, 왜인지 더 고칼로리의 음료가 먹고 싶어서 처음 보는 메뉴를 주문했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후회했지만). 그리고 런던에서 마요르카까지 2시간 반.
누가 그러던가, 초록색이 안구에 좋다고. 진짜 안구 정화는 푸른색으로 하는 것이었다. 7, 8월 성수기에 모든 관광객들이 다녀가고 9월을 맞이한 마요르카는 천국의 섬이었다. 아주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좋았던 호텔은 4성급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의문이었지만, 야외 수영장, 오션뷰, 그리고 호텔 조식 세 가지가 나를 바로 설득시켰다.
마요르카에서 우리의 하루 일과는 이러했다.
아침에 알람 없이 일어나서 대충 세수만 하고 9시 반쯤 조식 뷔페 먹으러 가기 (가장 좋아했던 메뉴는 갓 구운 크레이프에 프라이드 에그와 베이컨을 따로 가져와서 카라멜을 살짝 뿌려 먹는 것, 질기지만 따뜻한 시나몬 향이 나는 츄러스, 약간 건조한 모닝롤, 그리고 맛이 최악이지만 그냥 따뜻해서 먹는 롱블랙 커피).
호텔 방에 돌아와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넷플릭스로 약 1시간 동안 보다가, 소화가 조금 되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야무지게 양갈래로 땋은 후, 선크림와 돗자리 같은 물품들을 간단히 챙겨서 약 7분 거리 비치에 간다. 좋아했던 비치는 호텔에서 약 7분 정도 거리였는데, 가는 길에 아무 슈퍼나 들러서 탄산수와 바닐라나 쿠키 앤 크림 맛 아이스크림을 꼭 사 먹었다. 한 손엔 아이스크림, 다른 손엔 수영복 가방을 들고 거리를 걸으면, 새소리와 강아지 소리가 들렸고, 은은한 바다 냄새가 났으며, 올리브 나무, 바나나 나무, 그리고 각종 야자수들이 보였다.
비치에 도착하면 가까운 곳에 돗자리를 깔고, 가방과 슬리퍼를 놓아둔 후, 트레이닝팬츠를 벗어던지고 바다에 곧바로 뛰어든다. 첫날에는 예전에 구매한 불편한 비키니를 입고 있었고, 또 오랜만에 비키니를 입는 거라 어색하게 쭈뼛쭈뼛 바지를 벗었다.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제모는 잘 되었나, 다이어트를 할 걸 같은 걱정들을 가득 안고 얼른 물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둘쨌날에는 아무도 나의 몸매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별생각 없이 바지를 벗고 물으로 뛰어든다. 여전히 조금 어색하지만 수영복 상의마저 과감하게 탈의하고 수영하는 다수의 여성들을 발견하고는 더욱더 안심한다 (수영복이 다 벗겨져서 알몸으로 수영해도 아무도 관심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셋쨌날부터는 아주 자연스럽게 바지를 벗고 편하게 수영한다.
부끄러웠다. 사람들이 내 몸에 대해 평가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주 멋있는 몸을 만들어서 휴가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여름휴가를 떠나면 멋진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수영복도, 태닝 오일도 결국 여행 직전 몸살로 인해 미리 준비하지 못했지만 모두 이곳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었고, 내가 바랬던 5킬로그램 감량도, 선명한 복근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은 오직 나였다. 비키니를 입었을 때 삐져나올 수 있는 옆구리살을 걱정하며 아침 조식을 건너뛰어야겠다 다짐할 사람은 '마요르카에 오기 전의 나' 밖에 없었다.
휴식하고 좋은 경험을 하고자 온 휴가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건강한 몸과 여행 경비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나는 아침 조식을 든든하게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옆구리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물고기처럼 수영했다. 휴가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면박을 주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또 하나 배웠다.
수영을 2시간 정도 하고 나서 슬슬 힘들어지면 호텔로 돌아온다. 돌아올 때는 간단하게 설치된 샤워장에서 모래를 털고 난 후, 비키니만 입고 터벅터벅 걸어온다. 돌아와서는 샤워를 하고, 가볍게 돗자리와 비키니를 씻어서 햇볕에 말리고,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조금 보거나 낮잠을 잔다. 그러고 나면 보통 오후 3-4시 즈음. 시내에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저녁도 먹으러 갈 시간. 간단하게 외출 준비를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15분 정도 걸어가면,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10명 정도 기다리고 있다. 마요르카의 버스는 생각보다 정말 쾌적하고, 에어컨도 시원하게 잘 나와서 편하게 시내로 갈 수 있었다.
하루의 끝은 항상 시내에서의 간단한 쇼핑과 저녁식사였다. 쇼핑은 보통 필요한 것들을 사는 편이었고 (좋아하는 브랜드의 트레이닝복과 수영복), 스페인 브랜드 구경을 하다가 민소매 니트와 린넨 소재의 탄탄한 자켓을 하나 구매했다. 스페인은 런던에 비해 물가도 싸고, 다양한 브랜드도 있고, 또 신기하게 늦은 시간까지 (저녁 9시 정도까지) 매장들이 문을 열어서 저녁 시간대에 쇼핑하기 편했다.
식사는 대부분 타파스 음식들을 먹었다. 기억에 남는 식사 순으로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1. 깔라마리 튀김과 빠에아: El Último Paraíso Beach Club
가장 기억에 남는 식사는 (솔직히 수영 직후에 먹었던 신라면 컵라면이었지만) 호텔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던 해수욕장 바로 앞에 있던 비치 클럽에서의 빠에아였다. 우선 수영을 한 후 모래만 털고 바로 먹었던 빠에야라서 더 맛있었겠지만, 딱새우, 대게, 홍합, 대하, 그리고 과장해서 관자 약 20개가 들어있는 듯 한 엄청난 빠에야였다. 약 6만 원 정도로 비싼 편이었지만, 후회 없는 최고의 식사였다. 전통식 빠에야는 보통 2인분 이상만 주문이 가능하니, 빠에야는 점심에 수영 직후에 먹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2. 통 문어 튀김, 페퍼, 클램: Restaurante El Pilón
미리 구글맵에 저장했지만 예약은 따로 하지 않아 워크인으로 식사를 했다. 꽤 늦은 저녁이었는데, 스페인은 프랑스와 비슷하게 저녁식사가 꽤 늦는 편 인 것 같았다. 가격이 정말 저렴한 로컬 타파스였는데, '맛조개' 구이가 정말 맛있었다. 상큼한 바질류의 페스토와 레몬즙 이 뿌려져서 나왔는데, 상큼 쫄깃 고소한 맛이 잘 균형 잡힌 맛이었다.
3. 1.5리터 샹그리아와 Suckling Pig: Cafe Ca'n Toni
마요르카에서의 첫 저녁식사였다. 원래 가려고 했던 레스토랑은 예약이 다 차서 급하게 찾아 간 레스토랑이었는데, 평소에 궁금했던 전통 샹그리아와 서클링피그 라는 요리를 맛볼 수 있던 곳이었다. 이곳은 음식도 맛있었지만 레스토랑 이름이 적혀 있던 독특한 그릇들과 엄청난 크기의 샹그리아, 그리고 옆 테이블에 계셨던 분들과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왼쪽에는 멋쟁이 노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었고, 오른쪽 테이블에는 독일에서 온 마요르카 거주 1년 차 친구들이, 그리고 가장 오른쪽 테이블에는 미국에서 온 부부 두 쌍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사 정도만 했지만, 테이블 간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워서 서로의 대화가 다 들리는 탓에, 나중에는 다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여행 정보도 공유했다. 그런데 노부부가 식사를 끝낼 즈음에, 식사 중에 가방을 소매치기당했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폰 위치 찾기로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려 모두 노력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모두 본인의 잘못이라며 오히려 미안해하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4. 샤퀴테리, 프로볼로네 치즈, 호박꽃튀김: Toque de Queda
치즈와 샤퀴테리 위주의 타파스. 잘 기억이 안 나는 종류였지만 와인도 굉장히 맛있고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다. 특히 기억나는 음식은 샤퀴테리 (이름이 Lady였다) 와 프로볼로네 치즈. 이른 저녁 시간에 도착해서 우리만 식사를 했지만,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던 주인 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5. 오리 튀김과 망고 디저트: Thai Beach Street Food
마요르카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타이 음식이었다. 오리 튀김이 정말 촉촉하고 바삭하며 맛있었고, 소스가 꽤나 매운 편이라 쌀밥과 잘 어울렸다. 그동안 먹어본 타이 음식 중에 가장 현지식 음식이었던 것 같다. 망고 스티키라이스는 따뜻 달콤해서 미소가 절로 나오는 맛.
식사를 끝내면, 꽤 먼 거리의 호텔로 돌아갈 시간. 하루 평균 활동량이 12000보였기 때문에 꽤 힘들었지만, 그래도 버스에서 40분 정도 쉬었다가 호텔로 걸어가면, 행복감이 몰려왔다.
신기한 여행이었다. 많이 구경하고, 많이 먹기보다는, 천천히 가까운 곳들부터 경험해보고, 맛있는 음식을 하루 한 번 나가서 먹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에 대한 것보다는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에 집중하는 여행이었다.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일광욕보다 해수욕을 좋아하고, 수영장보다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구명조끼 없이도 편하게 바다에서 둥둥 떠다닐 수 있는 꽤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비키니 하의만 입고 가족들과 바다에서 수영하던 젊은 엄마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유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피자를 잔뜩 먹어 빵빵해진 배를 부여잡고 친구들과 깔깔거리던 내 또래 여성들의 모습도, 너무나도 자유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배가 빵빵한 상태로 비키니를 입고 편하게 깔깔거릴 수가 없다. 나는 분명히 배에 힘을 힘껏 주고, 상체를 뒤로 젖혀서 최대한 배가 접히지 않게 안간힘을 쓸 것이고, 그 탓에 저녁에는 신경성 배탈이 날 것이다. 나는 왜 '보여지는 것' 때문에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을 놓치고 있는지 궁금해졌고, 안쓰러웠고,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