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후암동 그 벽돌집 '후아미' 공간 이야기
에디터. 김윤선, 박종우 사진. 노경, 최진보 자료.비유에스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2000년대를 풍미했던 대표적 소셜미디어인 ‘싸이월드’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일촌’이란 단어를 조금 다르게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뜻 모를 애틋함을 느낄지도. 당시 일촌은 요즘의 ‘팔로워follower’ 개념과 유사했다. 다만 학연이나 지연을 기반으로 실제 알고 있는 친구나 지인 관계를 온라인으로 옮겨온 것에 가까웠다. 아닌 게 아니라 ‘일촌 맺기’는 두 사람 사이에 신청과 수락이라는 합의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이는 온라인 속 공유와 소통을 위한 약속임과 동시에, 오프라인으로 확장해 서로 간 유대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가 꿈꾸던 집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자리 잡은 다가구주택 ‘후아미’는 그런 싸이월드 감성을 기억하는 30대 중반 친구들이 모인 집이다. 하는 일도, 취미도, 취향도 가지각색인 여섯 명의 친구들은 오랫동안 이어온 커뮤니티를 바탕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아지트’ 같은 집에서 함께 놀고, 먹고, 나누며 특별한 공동체 생활을 실현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1980년대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이자,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했던 20세기 말 밀레니엄 버그 괴담 따위를 믿으며 자란 최초의 디지털 세대인 ‘N세대’다. ‘밀레니얼millennials’이라는 거대 담론 속에 때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 퉁쳐지곤 하지만, 사실 이들에겐 유년 시절 삼삼오오 집에 모여 만화책을 돌려 보던 아날로그 문화 유전자가 뼛속 깊이 내재해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방영된 ‘남자 셋 여자 셋’과 ‘논스톱’ 같은 TV 시트콤 또한 이들의 청소년기에 문화적, 정신적 토대를 만든 혁혁한 유물 중 하나다. 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곤 했던 청춘 남녀가 그야말로 왁자지껄, 좌충우돌하며 우정과 사랑을 나누던 장면의 배경에는 언제나 ‘집’이 있었다. 결국 후아미는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이, 아니 그 시절 우리 모두가 꿈꾸던 집의 현실판인 셈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함께 사는 법’
후아미 친구들은 오 년 후, 십 년 후 미래를 애써 예측하려 하지 않는다. 앞으로 삶이 어떤 형태로 변하든, 지금, 여기에서 함께할 수 있음이 소중한 시간이라는 걸 잊지 않고, 함께 더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는 그들. 그렇기에 이 집은 단순히 먹고 자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새로운 ‘커뮤니티’로서 집의 진화 가능성과 이 시대 밀레니얼 세대가 ‘함께 사는 법’을 보여준다. 저성장 시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성장하며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세대’라는 다소 씁쓸한 수식어가 썩 어울리지만은 않는 이들에게, ‘내 집 마련’은 해묵은 장래 희망에 불과하다. 다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고단한 일상을 마음 맞는 누군가와 소통하고 교류하며 살아가는 것은 ‘크고도 확실한 행복’이 있는 삶을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오래된 적산가옥과 좁은 골목길이 옛 동네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를 풍기는 남산 아래 작은 마을 후암동. 땅의 흔적이 어제의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곳에 그 흔적을 되살려 이어받은 새로운 벽돌집이 지어졌다. 여섯 친구가 함께 그려갈 소중한 오늘과 내일이 담길 이 집, ‘후아미’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과거의 흔적을 담은 이형의 땅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였던 후암동은 아직도 동네 곳곳에서 적산가옥을 찾아볼 수 있고 과거 주택과 필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동네다. 후아미가 자리 잡은 대지 역시 삐뚤빼뚤한 자투리땅이 모인 곳이었다. 이는 지형에 따라 나누어진 필지에 도로가 생기는 등 도시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한다. 대지에는 원래 낡은 집 세 채가 남아 있었다. 애초 건축주는 이 집을 리모델링하기 원했으나, 여러 법적 제한으로 규모를 줄여야만 하는 등 비용과 효율 면에서 적합하지 않아 신축을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옆 필지까지 사들여 총 5개의 필지를 확보했고, 필지를 모두 합해 하나의 대지로 만들었다. 중간이 뾰족하게 파고 들어가 마치 반바지를 연상시키는 이형의 땅 모양은 그로 인함이다.
땅의 기억을 따른 출입구
후암동의 오랜 기억이 담긴 집을 허물어야 하는 만큼, 건축주는 새로 생길 집이 동네의 과거와 흔적을 존중하는 집이 되기를 바랐다. 이러한 요청에 건축가가 내놓은 묘안은 출입구에 곡선의 진입로를 만드는 것. 이는 기존 집의 진입로가 되어 주었던 골목길을 되살린 것으로 땅의 기억을 되살려 남겨 두고자 한 시도다. 벽돌을 어슷하게 쌓은 곡선의 진입로는 복잡한 바깥세상으로부터 돌아온 거주자를 환영하고 편히 쉴 수 있는 내밀한 집으로 인도하며 서정적 분위기를 내뿜는다.
최대 법적 효율 ≠ 최고의 거주환경
건축가가 설계 당시 반드시 지키려 했던 신념 중 하나는 건폐율과 용적률, 일조권 사선 제한 등 법적 제한에 맞춰 최대 면적을 확보할 때 필연적으로 나오는 사선 형태의 건축물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일조권 사선 제한은 주변 건물의 일조권을 보장하기 위해 주거지역 내 건축물의 높이를 제한하는 법으로, 이 법의 한도 내에서 내부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다 보면, 건물 윗부분이 잘려나간 형태의 사선형 건물이 나오기 쉽다. 하지만 최대한의 법적 효율이 최고의 거주 환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건축주 역시 건축가의 생각에 공감해주었고, 후아미는 사선형에서 탈피해 건축가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세 개의 매스가 리듬과 비례를 이루어 그 자체만으로 완결성이 느껴지는 형태를 가지게 됐다. 또한 곳곳에 색다른 감각을 가진 공간과 테라스와 발코니 등 다양한 외부 공간을 마련해 거주자 또한 보다 쾌적한 거주 환경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포기할 수 없는 창과 테라스
건축주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집에서 쾌적한 삶을 누리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집 안에서도 외부 공간과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2층부터 5층까지 층마다 도심 다가구주택에서 쉽사리 누리기 어려운 작지만 소중한 테라스와 발코니가 마련됐다. 바닥까지 연결된 길고 큰 창은 입면의 리듬감을 살리면서 집 안으로 햇빛이 최대한 많이 들어오도록 구성했다.
벽돌의 감각을 되살리다
역사 이래 다양한 건축물에 쓰여온 소재인 벽돌을 가볍게 쓰고 싶지 않았던 건축가는 ‘쌓는다’는 것에서 오는 벽돌 특유의 감각과 향수를 일깨우고 싶었다. 작은 세그먼트segment가 모여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벽돌은 건물 외관의 비례와 리듬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화장실과 주방 공간 등의 외벽에는 벽돌을 비워 쌓아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동시에 개방성을 확보하고, 외관의 자연스러운 변주 요소로 활용했다. 벽돌은 외벽뿐만 아니라 창의 깊이감 있는 인상을 만드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인 벽돌보다 가로 길이가 긴 벽돌에 가로 줄눈을 적용해 수평선을 살리고 창을 안쪽으로 내어 외부에서 풍부한 깊이감을 만들어냈다. 긴 벽돌과 깊은 창은 빛의 각도에 따라 건물에 다양한 표정을 드리운다.
임대를 하는 다가구주택이지만 거주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집의 내부 공간 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건축주는 물론 거주자 또한 목소리를 낸 결과, 공간마다 거주자의 개성과 취향, 삶의 방식이 반영돼 생활에 편리함과 쾌적함을 더한 공간이 탄생했다.
301호, 친구들과 함께 노는 집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해 ‘취미 누나’라 불리는 1인 가구 301호 거주자의 집은 친구들의 방문으로 북적이는 날이 많다. 커뮤니티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그의 집이 후아미의 ‘앵커 시설’인 셈. 이에 걸맞게 주방에서 요리나 설거지를 할 때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싱크대를 벽에 붙이지 않고 중앙에 두는 아일랜드 키친island kitchen 형태로 구성했다. 집 한가운데에 작은 포켓 테라스를 마련해 거실 겸 주방과 침실 공간을 효과적으로 분리하는 동시에 외부 공간을 즐길 수 있게 했다.
302호, 넓지 않아도 내 맘에 드는 집
노매드적 삶을 추구하며 평소 캠핑과 암벽 등반 등 야외 활동을 즐기는 1인 가구 302호 거주자는 혼자 지내기 불편하지 않은 정도의 소박한 집을 원했다. 그는 집 안에서도 무거운 고정형 가구보다는 언제든 들고나갈 수 있는 가벼운 캠핑용 이동식 가구를 사용해왔다. 그러한 생활 방식을 따라 침대 하나 둘 정도의 아담한 침실과 간소한 거실 겸 주방을 마련했고, 붙박이 가구도 최소한으로 설치했다.
401호, 외부와 소통하는 열린 집
401호는 가드닝을 즐기고 집안에 빛이 풍부하게 들었으면 좋겠다는 부부의 요청에 맞춰 넓은 테라스와 큰 창을 마련했다. 테라스 바닥 일부를 오픈해 3층에도 작은 테라스를 두고 위 아래층이 외부에서 소통하도록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세대에 작더라도 테라스를 두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을 반영한 것이다.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거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잦은 부부의 생활에 맞춰 음식을 이동하기 편리하도록 테라스와 주방을 가까이 두었다.
501호, 집 같지 않은 집
높은 층고로 탁 트인 개방감이 돋보이는 501호는 내부에 벽 대신 단차를 두어 거실 겸 주방, 작업 공간, 침실을 구분한 복층형 원룸으로 구성했다. 거실 겸 주방에는 싱크대와 테이블을 한가운데 일자로 배치해 카페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거주자의 음악 작업 공간은 단차로 인해 DJ 부스를 연상시킨다. 501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콘크리트 표면을 가공한 ‘렉스크리트rexcrete’라는 생소한 바닥재인데, 비주얼 디렉터로 활동하는 만큼 소재나 색상에 관심이 많았던 거주자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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