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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경 딸 Feb 23. 2021

죽기 전에 아침밥이 생각난다니

먹지 못한 밥이 아닌, 먹이지 못한 밥.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니,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배는 고픈데 차리기는 귀찮고, 대충 냉동 만두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비스듬히 누워 볼륨을 높였다.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라. 확실히 냉동만두는 아니겠군, 하면서 귀를 기울여본다. 누군가는 갈비찜을, 또 다른 누군가는 간장게장을, 다른 이는 양념 통닭을.. 출연진 각자의 이유와 사연들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찰나, 전화기가 울렸다.


 엄마와의 통화내용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똑같은 레퍼토리로 시작한다. 퇴근은 했는지, 집에 잘 들어갔는지, 또 저녁밥은 먹었는지. 만약 밥을 먹지 않았다는 대답이 나오면, ‘아직 밥도 안 먹고 뭐 했어? 얼른 밥부터 먹고 전화해.’하며 전화가 끊어진다. 물론 비나 눈이 내리는 날에는 여기에 운전 조심해라, 천천히 다녀라 하는 말도 하나씩 추가되곤 한다. 늘 하던 대화를 이어가던 중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뭐가 먹고 싶을 것 같아?     
글쎄.. 먹고 싶은 건 모르겠고
우리 딸내미 못 차려준 밥이 더 생각날 것 같은데, 엄마는.     



  나는 성인이 된 후 줄곧 엄마와 떨어져 생활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삼 년 내내 기숙사에 있었고, 대학에 가서는 자취를 했고, 이후에는 엄마가 외가식구들이 모여 사는 전라도 광주로 내려가 아예 자리를 잡았다. 내가 사는 서울에서 엄마네 집까지는 고속버스로 꼬박 네 시간이 넘게 걸린다.

 엄마도 나도, 바삐 살아가다 보니 기껏해야 방학이나 연휴에 며칠씩 만나는 것이 전부가 된 지 오래다. 얼굴 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벤트이니 평소에 쉽게 먹기 힘든 장어나 갈비로 외식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 엄마와 마주앉아 따 순 집밥을 먹던 모습은, 쓸쓸하게 기억 한 구석에 남아 먼지가 쌓여갈 따름이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내 아침밥을 챙겨주지 못하는 게 한이라고 했다.

왜 저녁밥이 아닌 아침밥인지는 모르겠다. 따뜻한 토란국에 콩나물이라도 새로 무쳐서 먹인 다음 내보내야 하는데,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엄마는 그럴 때 한(恨)이라는 말을 썼다.

 나는 집안 사정이 여의치 못해 목표했던 공부를 마치지 못한 게 한이고, 친한 친구들은 하나둘씩 유학을 떠날 때 마트에서 물건을 팔던 게 한이고, 일에 쫓겨 많이 놀아보지 못한 게 한이다.

그런데 이번에 환갑을 맞은 엄마는 서른이 넘은 딸내미 아침밥을 못 차려주는 게 한이란다.

나는 내 억울함과 서러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엄마는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엄마가 품은 한까지도 자식을 향해 있다. 사실 나는 으레 이삼십대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아침은 시리얼이나 과일로 간단히 챙겨 먹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데 말이다. 먹어도 그만, 굶어도 그만인 내 아침밥이 엄마에게는 왜 그리 큰 의미를 갖는 걸까.  

 

 그리고 그 대화 이후 두 세달이 지난 지금, 꺾일 줄 모르는 코로나의 영향으로 나는 재택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엄마 집으로 내려온 첫날, 식탁에 앉은 나를 두고 엄마는 감격스럽다는 말투로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게 얼마 만이냐고, 엄마 밥 많이 먹고 올라가라고. 부산스럽게 반찬 뚜껑을 여는 엄마의 손길에서 설렘이 물씬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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