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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콜린스 May 08. 2024

영화 <프랭크>를 보았다

어나더 클래스와 그들만의 리그

<프랭크>_2014__★: 5/5


영화 <프랭크>와 관련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줄거리 요약



(도널 글리슨 님)은 우연히 밴드 ‘소론프르프브스’에 영입되고, 앨범 녹음을 위해 숲 속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음악 천재인 멤버들처럼 자신도 밴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었던 존, 하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던 그는 밴드 멤버들에게 무시받기 일쑤다. 밴드의 정신적 지주 프랭크(XXX XXXX 님)는 그나마 존에게 관심을 주는 인물로, 늘 기괴한 탈을 쓰고 생활한다. 프랭크의 지휘 아래 밴드는 앨범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다음날, 갑작스레 밴드 매니저 (스쿳 맥네이리 님)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밴드는 장례를 마친 뒤 존의 강력한 제안을 따라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하기로한다. 소란스러운 도시가 프랭크의 정신을 갉아먹자 멤버들은 프랭크에게 공연이고 뭐고 당장 떠나자고 말한다. 하지만 프랭크는 존의 편을 들며 공연하길 고집한다. 클라라(메기 질렌할 님)를 비롯한 멤버들은 도시를 떠나고 존과 프랭크는 단 둘이 공연에 올랐지만, 프랭크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공연은 실패로 끝난다. 일이 꼬일 대로 꼬이자 존은 홧김에 프랭크의 탈을 벗기려 하고 프랭크는 존에게서 도망쳐 자취를 감춘다.


혼자가 된 존은 떠났던 멤버들이 작은 술집에서 공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도망친 프랭크를 수소문해 술집에 데려온다. 다시 완전체가 된 밴드는 노래를 시작한다. 존은 그들의 공연을 바라보다 술집을 떠난다.


세 명의 작곡가


작곡은 <프랭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영화는 시작과 끝 모두 악상을 찾아 작곡하는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은 ‘퇴근하고 집으로 향하는 존’이고, 마지막은 ‘동료들과 재회한 프랭크’이다.


춤, 노래, 미술을 다루는 영화는 천재와 일반인 간의 재능차를 표현하기 쉽다.

일반 관객들도 더 현란하고 우아한 춤선을 가릴 수 있고, 맑고 청량한 고음과 탄탄한 저음에서 우러나오는 호소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랭크>는 작곡가로서 천재적인 재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데, 이는 앞서 말한 것들과 다르게 관객은 재능의 격차가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영화엔 총 3명의 작곡가가 등장한다.

첫 번째 작곡가 존은 실력 없는 작곡가로, 사실 그를 작곡가라고 칭하기도 애매하다. 영화 속 그가 작곡한 노래는 단 몇 구절, 몇 마디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구리고 몇몇은 표절이다. 영화 내내 존은 제대로 된 노래 한 곡도 만들지 못한다.


두 번째 작곡가는 천재형 작곡가 프랭크다. 꿈속에서 들은 멜로디로 <Yesterday>를 작곡한 폴 매카트니처럼, 욕조에서 10분 만에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작곡한 프레디 머큐리처럼, 프랭크는 순식간에 비범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천재다.


존과 프랭크의 창작 방식은 현저히 다르다. 존은 지나치는 모든 것을 말 그대로 그저 스치듯 볼 뿐이다. 대상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고 대상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니, 본인이 대상을 어떻게 느끼는지 표현할 수 없으며 좋은 노래가 나올 리 만무하다. 반대로 프랭크는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관찰하는 동시에 본인이 대상을 어떻게 느끼는가를 성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프랭크는 볼품없이 튀어나온 보풀에서도, 화장실 냄새나는 허름한 술집에서도 그만의 개성이 녹은 노래를 창작해 낸다.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 <시>에선 예술가가 대상을 관찰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한다.  "대상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정한 '보는'것". 이 말은 프랭크와 존의 차이를 알려준다. 관찰은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타고나는 재능 중 하나인 것이다.


마지막 작곡가 돈은 작곡을 포기한 사람이다. 한 때는 그도 음악에 열정 가진 키보드리스트였지만, 프랭크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프랭크를 도우는 일을 한다. 돈은 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왜 프랭크가 될 수 없지?”라는 생각이 들 거야, 아니면 “나도 프랭크가 될 거야”라든지. 하지만 프랭크는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어.’


돈이 앨범 작업을 끝내자마자 세상을 떠난 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다루지 않지만, 그는 자신이 존에게 한 말을 과거에 직접 경험하며 깊은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돈은 마지막 순간에 프랭크의 탈을 쓰고 세상을 떠난다. 프랭크처럼 되고 싶다는 질투 때문이기도, 그리고 돈의 맘 속에 늘 존재했을 ‘나는 왜 프랭크가 될 수 없지?’라는 아픔 때문이다.


돈은 마네킹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프랭크를 만난다. 마네킹은 인간을 본떠 만든 것이고 인간처럼 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마네킹은 인간이 될 수 없다.


돈은 작곡을 포기한 자신의 모습에서 마네킹을 보았을 것이다. 퇴원 후에도 엄청난 재능의 프랭크를 보며 그가 느꼈을 고통은 컸을 것이다.


            탈과 캔자스 블러프          

프랭크는 늘 탈을 쓴다. 탈을 쓰면 상대는 나의 표정을 알 수 없다. 탈은 상대방과의 내적 교감을 가로막는다.


영화에서 탈은 베일에 감춰진 프랭크를 상징하고 세상을 향한 프랭크의 거부감을 상징한다. 프랭크 같은 음악 재능을 간절히 바라는 존은 프랭크와 가장 가까운 멤버인 클라라와 매니저 돈에게 그의 생김새를 묻는다. 또 감정이 극에 달하는 순간, 존은 강제로 프랭크의 탈을 벗기려고도 한다. 존은 프랭크의 생김새가 궁금했지만 사실 진의는 대체 어떤 사건이 그를 천재로 만든 것인가를 알아내려 하는 것이다.


돈은 프랭크의 고향이 캔자스 주 블러프 시라는 것이 그에 대해 아는 유일한 정보라 말했다. 그러자 존은 프랭크의 과거를 멋대로 상상하기 시작하고, 어린 시절 학대를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기정 사실화하며, 그 정도 사연은 있어야 지금의 창의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은둔하던 프랭크를 찾아 블러프 시에 도착한 존은 프랭크의 부모님에게 프랭크는 어릴 적 아무 문제없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면서 부모님은 너무나도 큰 음악적 재능이 도리어 자신의 아들을 망가뜨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도, 학대를 받았을 거라는 존의 추측처럼 그저 하나의 추측일 뿐이다. 프랭크가 왜 지금처럼 됐는지 영화는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프랭크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세상이 싫은, 세상을 어려워하는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군가가 이유 없이 세상에 등을 돌리거나, 그냥 세상이 어렵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프랭크의 경우, 사람들은 탈 속 감춰진 그의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사연 때문에 프랭크가 세상을 등지게 된 것이라 믿는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본능이 작용하는 것이다.


음악적 천재성과는 별개로 프랭크는 현대 사회와 안 맞는 인물이다. 이 점을 인정하고 보는 <프랭크>와 인정하지 않고 보는 <프랭크>의 차이는 크다. 인정한다면 소론프르프브스의 멤버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돈과 존처럼 결국 프랭크와 함께할 수 없다.


    소론프르프브스. 지음(知音)

지음: 춘추전국시대 거문고 명수 백아와 그의 친구 종자기의 사이에서 유래한 말로,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관계를 뜻한다.


프랭크의 탈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존을 제외한 소론프르프브스 멤버들 뿐이다. 이들은 프랭크가 어떻게 생겼는지 관심 없다. 대신 그들은 탈을 넘어 프랭크와 내면을 공유한다.


밴드 안에서도 유난히 각별한 클라라와 프랭크의 관계는 지음이라는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두 사람은 말과 표정 없이 서로를 이해한다. 프랭크는 작곡하고 클라라는 편곡한다.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공연을 망친 뒤 존은 프랭크에게 자존심을 굽히며 자기와 함께 좋은 음악을 만들자 부탁하지만, 프랭크는 냉담하게 ‘넌 클라라가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홀로 고향에 은둔한 프랭크는 종자기가 죽은 백아처럼 더 이상 음악을 만들지 못한다. 자신의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클라라와 멤버들이 곁에 없기 때문이다.


그랬던 프랭크가 다시 악상을 찾아 노래를 시작하는 순간은 클라라와 소론프르프브스 멤버를 다시 만나게 된 순간이다. 멤버들은 아무 말 없이 프랭크에게 마이크를 건네고 즉석에서 프랭크의 노래에 맞춰 연주한다.


존과 돈은 프랭크의 지음이 아니다. 프랭크는 지음이 아닌 자에게는 자신의 표정을 말로 설명해 준다. 숲 속 오두막에 밴드가 처음 도착했을 때, 프랭크는 돈에게 탈 속 감춰진 표정을 말로 설명한다.

이후 그는 탈에 거부감을 느끼는 존에게도 표정을 말로 설명하기 시작하고, 이를 계기로 존과 프랭크는 가까워진다. 하지만 표정을 말로 설명하며 대화하는 방식은 정상적인 교류가 아니다. 표정 없이 말이 통하는 프랭크의 세계와 표정이 있어야 말이 통하는 존의 세계가 비정상적인 외교를 시작하자 클라라는 존을 경계하고, 프랭크를 못마땅해한다.    


    어나더 클래스와 그들만의 리그.

영화 속 프랭크를 처음 만난 존의 반응과, 프랭크에 대한 돈의 찬양과도 가까운 설명. 그리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고 다른 사람들을 각성시키기까지 하는 프랭크를 보며 그가 천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영화 후반 중국 음식점에서 유튜브나 트위터를 통해 존을 알아본 사람들은 프랭크를 비롯한 밴드 멤버들을 조롱한다. 그들은 소론프르프브스의 천재성에 놀란 것이 아니라, 세상에 그런 괴짜도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프랭크와 소론프르프브스 멤버들은 천재인가? 물론 그렇다, 그들은 천재임이 틀림없다.

그럼 그들은 괴짜인가? 그것도 맞다. 평범한 사람들 범주에 비추어 보자면 그들은 괴짜이고 웃음거리이다.


천재인 줄만 알았던 프랭크와 소론프르프브스 멤버들을 괴짜로 묘사하는 점은 <프랭크>의 주제의식이 단순히 범접할 수 없는 재능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우리는 존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며 그가 상대적으로 느끼는 재능부족에 공감하고 그와 반대로 천재적인 프랭크의 재능을 덩달아 부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존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앞서 말한 ‘세상이 그냥 싫은 프랭크’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된다.


프랭크를 비롯한 소론프르프브스 멤버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면 어떨까?

이 영화는 ‘그렇다면 벽 너머 천재 예술가들은 어떠한가’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곳의 예술가들은 은둔하며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좋게 말하자면 너무나도 비범해 일반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특정한 능력만 뛰어나고 평범한 사람들과 평범한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사회성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이다. 소론프르프브스 멤버들이 존을 대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들은 존을 대놓고 싫어하고, 때론 욕하고, 투명인간 취급하고, 알 수 없는 언어로 말 걸고, 편견 어린 시각으로 바라본다. 심지어 클라라는 존을 찌르기까지 했다. 이들의 모습은 사회성 결여의 극치이다.


소론프르프브스 멤버들과 존의 관계와 같이, 예술가는 때로 괴랄한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황당함이나 거부감, 심지어는 분노까지 느끼게 할 수 있다.그리고 관객이 느낀 감정들은 작품과 예술가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보면, 밴드음악과 락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이 우연히 라디오헤드의 <KID A>라는 노래를 듣는다면 어떨까? <KID A>는 그들의 귀에 생소하기도, 위협적 이게도 들릴 것이다. 십중팔구 노래를 끝까지 들을 수 없을 것이고 그중엔 ‘뭐 이런 노래가 다 있어?’ ‘이런 노래를 대체 누가 들어?’하고 짜증 내며 라디오헤드를 이상한 3류 음악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술가가 괴짜처럼 보이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시대를 잘 못 타고난 것일 수도, 작품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일 수도, 또 아직 그 예술가가 덜 유명하다는 이유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들은 예술가를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한다. 프랭크는 분명 예술가다. 영화 속 프랭크가 오두막의 새 세입자(아주머니)를 달래는 장면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오두막을 불법 점거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주머니는 당장 이들을 쫓아 내려한다. 밴드 입장에선 녹음이 한창이었기에 지금 쫓겨난다면 그야말로 낭패다. 프랭크는 아주머니에게 잠깐 밖에서 함께 걷자고 제안한다. 집 밖에서도 프랭크에게 흥분하며 화를 내던 아주머니는 얼마 안 가 눈물을 보이고, 웃음을 터트리고, 프랭크와 춤을 주고 마지막엔 프랭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고분고분 차를 타고 오두막을 떠난다.

감정을 움직이는 것, 우리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는 것, 우리를 웃게 하고 춤추게 하는 것, 차를 타고 떠나는 아주머니의 대사처럼 자기 영혼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술을 느낄 때 일어나는 일이다. 누군가는 <KID A>를 들으며 울고 웃고 춤추고 영혼의 진실을 깨닫는 순간을 가질 것이다.  


소론프르프브스는 누군가에겐 어나더 클래스였고, 누군가에겐 그들만의 리그였다. 그리고 수많은 예술가가 이 경계를 줄타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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