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도 식후경 아닌가?
매주 토요일은 장보는 날이다. 이민 와서도 한국 음식을 여전히 주식으로 먹는 우리 가족은 원래 20분 거리의 H마트(한국 마트)에 2주에 한 번, 15~20분 거리의 Sam’s Club, Wegmans 같은 미국 마트에 2주에 한 번씩 가서 일주일치씩 장을 봐오곤 했다. 그런데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면서 식구들 먹는 양이 확 늘었는지 그 정도로 감당이 안되고 있다. 아이들 양이 늘어서 그런가? (내 양이 늘어난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H마트에 가서 ‘한국 장’을 보고는 고기와 야채, 과일이 좀 더 싱싱한 미국 마트에서 ‘미국 장’까지 두 탕을 뛰고 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마트 쓱 배송 일주일에 한 번, 한살림 예약 배송 일주일에 한 번 시키고, 주중에 떨어진 재료는 집 앞에 있던 롯데슈퍼에 가서 조금씩 사 오면 되었다. 동네 이마트나 코스트코는 한 달에 한 번이나 갈까 말까였다. 귀한 주말을 장 보러 다니며 써 버리는 게 아까웠고, 굳이 내 눈과 손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배송되어 오는 물건들의 품질이 훌륭했었다. 무엇보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은 복잡한 곳에서 아이들을 끌고 다니는 게 극혐이었다.
남편은 아침 식사만 챙겨주면 점심과 저녁은 회사에서 먹고 오는 ‘일식이’였고, 아이들도 점심은 학교와 어린이집에서 급식을 먹고 왔었다. 아침 식사는 대부분 빵과 달걀, 과일로 간단하게 먹었고, 점심에는 모두가 바깥 음식을 먹었으니 아이들과 내가 먹을 저녁 식사만 차리면 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잘 먹는 반찬을 만들거나 그 마저도 귀찮으면 반찬을 사 오거나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집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해결하기도 했다. 먹을 게 널려 있는 먹자골목 앞에 산 건 아니었지만, 집 앞에 걸어 나가면 중국집, 분식집, 치킨집, 밥집에 아담한 카페들도 몇 개 있었던, 정말 복에 겨운 환경이었다. 미국에 와서 그게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 깨닫는데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미국에 살아보니 일단 장 보는 게 어마어마한 일이다. 여전히 한식만, 과자도 과일도 한국 것만 주야장천 찾아대는 아이들 때문에 H마트는 필수 코스고, 삼시세끼 집에서 해 먹다 보니 벌크로 파는 샘스클럽이나 코스트코에도 한 번씩 다녀와야 한다. 둘째 아이가 즐겨 먹는 요거트가 떨어지지 않게 사다 놓으려면 집 앞 Giant 슈퍼에도 가야 한다. 한국에서는 이마트 한 곳만 가도 웬만한 게 다 해결되었던 데 비해 미국 마트는 판매하는 상품이 다 다르고, 원스탑으로 모든 걸 다 파는 곳은 흔치 않고 먹거리 질이 좀 떨어진다. 귀찮고 힘들어도 마트 서너 군데를 돌아가며 다니게 되는 이유다.
집 근처에서 간단하게 사 먹을 음식이라고는 맥도날드나 서브웨이 같은 패스트푸드뿐인데, 아이들이 잘 먹지도 않거니와 자주 먹을만한 음식도 아니다. 아직은 아이들 입맛이 완전히 한국식이라 미국 식당에 가면 치킨 너겟과 감자튀김만 먹다 오게 된다. 한식이나 아시아 음식을 파는 식당은 멀고, 막상 가보면 맛도 영 별로인데 가격도 비싸다. 게다가 코로나 이후로는 식당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다가 먹을 때만 잠깐 벗는 행위 자체가 못내 찝찝하다. 아이들에게 식탁 더럽다, 만지지 말아라, 눈이나 입에 손대지 말아라 주의를 주느라 신경이 바짝 곤두서기도 한다. 식당 내에서 식사를 맘 편히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보니 외식 경험이 주는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다. 밥 하기가 몹시 귀찮은 날일지라도 밖에 나가 온갖 신경을 쓰느니 차라리 편안한 내 집에서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주 토요일 장을 보면서 150-200불 정도를 쓰고 있다. 차 트렁크와 냉장고, 냉동고가 차고 넘치도록 사다 나르는데도 일주일이 지나면 신기하게 냉장고가 텅 빈다. 한국에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재고를 관리해도 남아서 버리는 재료가 꽤 있었는데, 요새는 굳이 신경 써서 냉파(냉장고 파먹기)를 하지 않아도 아낌없이 털어 먹게 된다. 한 때는 냉장고를 효율적으로 파 먹으려고 냉장고 속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 목록을 적어서 붙여놓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억지로 애쓸 필요도 없다. 토요일에 그렇게 장을 봐 와도 주중에 달걀이나 우유, 요거트, 빵 같은 주재료가 떨어져 집 앞에 있는 슈퍼에서 필요한 걸 추가로 사 오기도 하니 말이다.
하기는 저 정도의 식재료로 네 식구가 일주일간 스물 한 번의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양도 아닌 듯하다. 가끔 한 번은 나들이 가는 길에 드라이브 쓰루(drive-through)로 패스트푸드를 사 먹기도 하니 스무 끼니가 되기도 하겠다. 한창 크는 아이들은 밥 먹고 돌아서면 또 배 고프다고 냉장고나 팬트리를 열고 간식을 꺼내 먹고 있다. '일식이'였던 남편은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같이 먹는 날도 있고, 샌드위치나 볶음밥으로 도시락을 싸 가는 날도 있으니 '이식이' 또는 '삼식이'가 되었다. 코로나 습격 이후 생활에서 집밥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아진 것도 있지만,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한국에서처럼 편하게 아무 데나 휙 나가서 사 먹는 분위기는 아니다. 우리 동네에는 배달해주는 식당도 흔치 않으니 결국은 남편이나 내가 식당까지 음식을 픽업하러 갔다 와야 한다. 그러니 특별히 꼭 먹고 싶은 메뉴가 있지 않는 한 음식 픽업도 쉽게 하지 않게 된다.
얼마 전에는 가족들과 버지니아 Great Falls National Park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미리 계획해서 간 게 아니라 음식 생각을 안 하고 맨 손으로 갔는데, 근처에 먹을 데라고는 한참 운전해서 가야 하는 맥도날드뿐이었다. 웅장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어대면서도, 식어빠진 맥도날드 햄버거를 못마땅하게 뜯으며 남편한테 그랬다.
아... 이런 곳에 그 흔한 국밥 집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아?
컵라면이나 어묵도 괜찮고...
남편은 그러니까 한국 사람인 거라며 나를 놀렸다. 이런 데 와서는 자연을 만끽하는 거지, 왜 여기까지 와서 국밥 생각을 하고 있냐고 말이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 아닌가. 폭포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 커다란 간판을 걸고 도토리묵, 파전, 산나물 비빔밥을 파는 식당들이 줄지어 있던 내 고향이 생각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걸어 다니다 아무 데나 들어가도 여기 음식점보다 세 배는 맛있고 가격은 삼분의 일인 내 고향 한국. 아무 데나 들어가서 5천 원짜리 된장찌개 한 그릇을 시켜도 대여섯 가지 반찬은 기본으로 깔아주는 정겨운 그곳. 그게 그렇게 큰 복인지 왜 그때는 몰랐을까. 뚝배기에 담긴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오늘 저녁엔 무얼 만들어 먹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