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다 입수 후기
올해는 여름휴가를 따로 가지 않아서, 조금 비수기라 생각되는 이 시점에 제주도 여행을 계획해서 다녀왔다. 제주에서 세계유산축전을 한다기에 그 기간에 맞추어 겸사겸사 계획한 것이었는데, 출발 전에 확인 결과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져서 워킹투어 등 행사의 대부분을 비대면으로 돌렸다는 회신을 받았다.
워킹투어는 못하게 된 상황에서, 내가 예약한 것이라고는 다랑쉬 오름 도슨트 투어와 하도리 해녀마을에서 해녀 체험하는 것이었고, 느슨한 일정으로 한적한 동네에서 5박 6일을 살다 오는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첫날은 저녁에 도착을 했고, 이튿날 오전 다랑쉬 오름을 올라갔다. 나는 숨도 가쁘지 않을 정도였는데, 남편과 아이는 꽤나 힘들어했다. 하지만, 오름 도슨트 해설가님께서 제주의 오름, 환경, 자연을 비롯하여 문화와 역사까지 토막토막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듣고, 보고, 바람도 느끼면서 오름 정상까지 올라갔다.
정상에서 움푹 파인 오름의 분화구도 보고, 주변 경관도 볼 수 있었는데, 가히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볼 수 없었을 그런 광경이어서 뿌듯하고 기뻤다. 정상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다시 내려왔는데, 딸은 인생 첫 등반이라서,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정상까지 무사히 올라갔다 내려왔기에, 더욱 많이 축하해주었다.
점심 먹고, 살짝 바다에 나가 보았는데, 딸이 수영하고 싶다고 했다. 서핑하는 사람들 몇, 발 담그고 있는 사람들 몇, 이렇게 있고... 그래도 가을 바다인데, 바다 수영이... 가능할까? 그리고 오름 때문에 그리 힘들어하더니... 또 수영을 하자고? (그만큼 딸은 물을 사랑한다.)
게다가, 래시가드는 가져오지 않고, 해녀체험 때 슈트 안에 입을 수영복만 가져온지라... 좀 망설여졌지만, 딸의 기대 가득 찬 눈을 보니 일단은 해보자 싶어서, 숙소로 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건 몇 개 챙겨서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나는 수영복 밑에 레깅스, 딸은 수영복 밑에 반바지...
준비 운동하고 입수...
파도가 높게 일어 파도 타는 게 정말 재밌었다. 나와 딸은 열심히 파도를 기다리며 파도를 탔다. 지켜보니, 딸은 무아지경이 돼서 파도가 높은 쪽으로 막 옮겨 다니며 즐거워했다. 그래도 감기 들겠다 싶어서, 내 레깅스를 딸에게 주고, 나는 딸의 반바지로 바꿔 입었다. (딸 반바지가 나한테도 맞았다. 매우 잘. ㅎㅎ)
몇 년 전, 여름 바다도 추워서 못 들어갔던 내가, 딸과 둘이서 가을 바다에서 파도탄 것이다.
손발이 좀 차서 감각이 없어지는 것만 같았고, 입술도 파랗게 변해 갔지만, 한 시간 넘게 놀다가 씻고 저녁 먹으러 가자-해서 나왔다.
다음 날은 비가 왔고, 그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7시 즈음 딸과 해변으로 나갔다. (우리는 5일 내내 6시 반 이전에 기상했다.) 또 입수하자고 했다.
다시 숙소로 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이 날은 처음부터 딸이 내 레깅스를, 나는 딸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남편은 느지막이 나와 우리를 발견하고는 젤 일찍 연 카페로 가서 커피 한잔 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는 또 한 시간 넘게 파도를 탔더랬다.
다음날은 또 비가 왔고, 그다음 날은 해녀체험이 있었고, 여행 마지막 날은 또 비가 왔고, 파도가 성난 듯이 높게 일었다. 정말 CG라 해도 믿을 정도로 큰 파도들이 밀려왔다.
해녀체험을 제외하고 두 번의 입수는 계획에 없었고 예상도 못했다. 하지만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더 재미있었고, 짜릿했고, 즐거웠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물가에서 발 담그고, 게잡고 고둥 잡는 데, 우리 둘만 물속으로 뛰어드는 그 상황이었기에, 그 용기에 스스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렇게 무식하고도 용감했기에, 가을 바다에 우리 둘이 들어가 따듯한 햇빛 받으며, 차디찬 물속에서, 파도탄 추억을 계속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겨울 바다에 입수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