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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로 Apr 27. 2023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다이진의 해방'으로

희생양 구조를 넘어서

#이 글은 앞선 글(https://brunch.co.kr/@ganro/128)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스포가 들어있다.


희생양을 통해 사회를 보존해온 다신교 신화적 사회의 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그런 현상이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다. 유럽에서 중세때부터 이어져 근세 시기에 절정에 달한 마녀사냥은 아이러니하게 기독교 세계관도 명분으로 작용했다. 명분이 아니라 그게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보자면 뚜렷이 특정하기 어려우나 그 시기 소빙기로 인한 대기근이나 흑사병, 개신교의 등장으로 인한 종교분쟁과 30년 전쟁 등으로 사회가 불안정해졌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정신적 피로와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였던건 분명하다. 그런 상태에서 이런 모든 혼란상의 원인을 마녀로 몰아 무고한 여자들을 사냥하는 것은 우리는 이제 안전하다는 안정감도 주었겠지. 


근현대에 들어서도 희생양 사례는 사라지지 않았다. 종교가 지배하는 중세가 끝나고 그 자리를 국민국가나 이데올로기가 차지하는 시대가 되고서 이제 대량학살은 민족이나 이념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아마 가장 유명한 사례는 유대인 홀로코스트일거다. 1차 대전 패전으로 인한 좌절감과 천문학적 배상금,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독일의 혼란상은 패전의 원인이 독일 사회에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배신 때문이었다는 배후중상설을 낳았으며 유대인은 이런 독일의 사회적 공분을 푸는 대상이 된다. 나치독일은 이걸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공식적, 체계적으로 행했다. 이와 함께 독일인들은 게르만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뭉쳐 사회 재조직과 재군비에 나선다. 그 결과는 2차대전이었다. 


분노에 가득찬 사회가 보복가능성이 없는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건 인간사회의 동물적 필연성 같은걸까. 


뜻밖에 <문단속>도 보다보면 이와 같은 실제 역사적 사례를 인지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인이면 어느나라 사람보다도 뚜렷하게 짚일게다. 스즈메가 도쿄로 넘어갔을 때 나온다. 그곳에서 재앙신 미미즈가 나와 또다시 도쿄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 반복될 수 있다고. 옛날 이곳에서도 큰 지진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건 분명히 1923년의 관동대지진이고 동시에 재일 조선인을 상대로 한 관동대학살이 일어난 때다. 일본에서 살아가던 조선인들, 자이니치는 애니메이션같은 상상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본사회의 희생양들이었다. 관동대지진 시기는 무고한 조선인을 우물에 독을 풀었다고 학살한 관동대학살과도 정확히 겹친다. 

대학살을 당한 재일조선인들은 대지진이라는 재앙에서 촉발된 일본사회 내의 혼란상을 해소하기 위해 화풀이 대상으로서 온몸으로 때려맞은 무고한 희생양이 정확히 맞지 않겠는가. 


관동대학살은 결코 직접 언급되지 않고 간접적으로만 지나간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망각된 희생양' 사례는 아닐까나.


그런데 <문단속>이 그런거엔 별 얘기도 안하고 빤히 희생양 구도의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는거 같으니 내가 다이진에 더 이입이 안되고 배기나. 2011년 토호쿠 대지진이 주요 얘기인건 맞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본에서의 재앙들의 얘기를 하려면 빼먹은 지점이 있는거 같다, 얘. 


그래서 <문단속>은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희생양 구도의 은폐를 이중으로 행하고 있는걸 아닐까나. 이야기 내에서 재앙신을 봉인하려면 불가피하게 스즈메를 떠나 다시금 고독한 요석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소리를 계속 듣는 다이진, 그리고 이야기 내에선 직접 언급조차 전혀 되지 않으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재앙의 사례와 결부된, 이야기 밖 실제 역사에서 있었던 일본사회에서의 희생양인 관동대학살의 재일조선인들. 흥미롭게도 후자는 일본사회의 실제 태도와도 같다. 


그래서 내가 <문단속>을 삐딱하게 보게 되나보다. 다이진과 재일조선인이 묘하게 겹쳐보이진 않는가? 만약에 <문단속>이 토호쿠 대지진이 아니라 관동대지진을 배경으로 한 프리퀄 같은거였다면 희생양이 되어 주인공을 재앙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 미래로 향하게 하는 매개로 그려지는 저 다이진은 분명히 재일조선인이겠지.




다시 이야기를 <문단속> 안으로 가져가보자. 


주인공 스즈메가 최후에 바라는 바는 자기가 반한 남자인 소타를 구하는 것이다. 소타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된 것이 불가피한 일이며 심지어 영예로운 일이기까지 하니 받아들이라 하지만 스즈메는 이를 거부하는데 그건 소타가 요석이 되어 재앙을 봉인하여 다수의 인간사회를 구하고 있는 이 희생양 구도를 온전히 깨뜨리려는게 아니다. 자기자신을 바쳐서라도 스즈메로서는 소타'만' 구하면 되는 것이지 이 구조에서 불가피하게 희생되는 존재는 주된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토록 소타에게는 한눈에 반하고 상냥하게 구는 스즈메는 자신이 소타에게 그러는 것처럼 똑같이 자신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냥신 다이진의 마음은 별로 안중에도 없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대하는 태도로 단호하게 말한다. 넌 요석으로 돌아가! 

스즈메가 녀석의 마음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는건 흥미롭게도 녀석이 스즈메를 위해 스스로 요석으로 돌아가기로 하기로 한 후(그러니까, 희생양의 위치로 자진해서 돌아가겠다 한 이후)에서야 나온다.


스즈메의 태도를 앞선 글에서 언급한 중국 전국시대의 서문표 얘기로 하면 이런거다. 아리따운 처녀를 하백에게 바치려하다니 이 여자는 너무 예쁘니까 내가 구하겠소. 대신해서 내가 나를 바쳐서라도. 그런데 내 앞의 당신이 나를 좋아하니 대신 희생당하겠다고? 당신은 이미 예전에도 강물에 바쳐졌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온 존재이니 그렇게는 괜찮을지도.


그래 뭐, 스즈메는 온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예수가 아니니까. <문단속>의 관심은 희생양 구조를 통해 재앙을 억제한다는 세계관 자체의 변동이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이제 그 희생양 구조에 들어설 때 다시금 그 구조에서 고통받던 이가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돌아감으로써 자기가 사랑하는 이를 구하게되는 서사이며, 궁극적인 관심은 주인공이 이를 거쳐 재난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굳세게 미래로 향하게 하는 치유에 있다. 


그런데 그 치유에는 실은 전제조건이 숨어 있었던 것.


그래서 <문단속>을 보던 내가 가장 짠했던 부분은 스즈메가 소타를 구하려 분투하는 것도 아니고 어릴적의 자신을 만나는 것도 아니라 미미즈를 봉인하려 다이진이 다시금 요석이 되어가는 장면이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스즈메 곁에 함께살기만을 바라던 그 맹랑한 다이진이 자신이 사랑하는 스즈메의 뜻에 따라 단번에 자기가 묶여있던 봉인으로 돌아가는 모습. 


나는 <문단속>의 주요인물들의 감정에는 끝까지 이입이 전혀 안되었지만 이 다이진의 감정에 대해서는 수긍했다. 여전히 성숙한 존재의 감정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감성으로서 말이다.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사람과의 교류가 전혀 없는 고독한 세계에 너무 오랜동안 홀로 있으면 사람에 대한 감정도 서툴어질테니.




풍랑이 거센 강이 있다. 이 강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는 이가 많아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는 이 강의 신이 노하여 저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 분노를 가라앉히려면 이 곳의 신에게 무언가를 바쳐야 하는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귀중한 것일수록 좋겠지. 먹을걸 바치다가 어느덧 사람을 바치기에 이른다. 웬일인가, 그러다 여러 우연이 겹쳐 그날 풍랑이 멎는다. 아 이게 먹히는구나! 이제 사람들은 매해 같은 날 기념하여 강의 신에게 사람을 바친다.


이것이 인신공양의 시작일 것이다.


그리고 이게 확장되면, 이런 것도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계가 대기근과 전염병, 지진과 같은 재난으로 가득하고 살아가기 힘든 것은 악령과 같은 존재들 외에는 설명이 힘들다. 그러니 우리 사회 안에 있지만 우리와는 이질적인 저 악마들을 처단하면 우리의 이 힘든시기는 끝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저들을 하루빨리 없애자.




<문단속>은 다신교 신화와 같은 구도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로맨스를 쟁취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하나 그 전제에 있는 희생양 다이진의 슬픔은 이름다운 작화와 이야기가 가려 놓는다. 원래 요석이었으니 괜찮다는 식인데 '나는 스즈메의 아이가 되지 못했어...'를 마지막 말로 남기는 존재가 그리 되는건 정말 괜찮기만 한걸까? 아폴로니우스의 신화 이야기에서 나오던, 악마로 변해버린 무고한 거지가 다이진은 아닐까?


<문단속>으로 방한한 신카이 마코토가 실제로 관객들과의 대화에서 다이진이 너무 불쌍하다는 일부 관객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고 요석이 제 자리로 돌아갔으니 잘됐다는 반응을 원했었다는 식으로 밝힌건 이 지점을 매우 뚜렷하게 방증한다.(출처: 러버덕@30k_duck의 트윗 https://twitter.com/30k_duck/status/1636035609461686272?s=20) 그의 이야기가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지. 저 일부 관객의 반응이 더 예리하고 보편성에 합치되지 않은가.


일본에는 죄없는 자만이 이 여자를 돌로 치라며 희생양 구조를 와해시키던 예수 그리스도나 희생제례를 반복하던 샤먼을 도리어 강물로 던져버리던 서문표가 없었기 때문인가. 


이런 내 시야에서 <문단속>의 결말은 근본적으론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스즈메와 소타의 로맨스만 남았을뿐. 내가 좋아하는 사람 밖에 안보이나.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소중할 수 있지.


너무 억지 아니냐고. 그러면 이렇게 물어봐보고 싶다. 이 세계관을 가지고 디즈니가 애니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하고. 어떻게든 다이진도 구하는 방향으로 갔을게다. <알라딘>의 지니가 풀려난것처럼.


난 이런걸 느끼며 <문단속>이 참 흥미로워보였던 동시에 참으로 매정해보였다. 희생양 다이진의 관점에서.

<문단속>은 어느 누구도 아닌 다이진에게 가장 매몰찬 이야기다.


그래서 <문단속>은 나에겐 미완의 작으로만 보인다. 정말 해피엔딩이려면 저건 더 처절하게 근본적으로 세계관을 뒤엎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여야만 했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는 궁극적 결말은 다이진의 해방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아이를 구하러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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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말)


이 글은 <문단속>이 나쁜 작이라거나 혹은 신카이 마코토가 악한 작가라는 얘기가 전혀 아니다. 그렇게 읽었다면 이 글을 오독한 것이다. 쓰면서도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면 그런 반응이긴 했다. 전혀 그런 얘기가 아닌데. 굳이 말하자면 이 글은 다만 신카이 마코토와 <문단속> 세계관의 저편에서 망각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 불러오는 주술노래에 가깝다. <문단속>이 덮어버린 것들에 대한 글이다. 


아마 이 글도 희생양 구조를 폭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전복시키는 데에까지 이르러야 할까싶다. 그렇다면 그 글은 <트루 디텍티브 시즌1>과 함께 해야겠지. 나에겐 여태까지 압도적인 원탑 미드. 초안 정도는 써놓은게 있는데 정돈해서 언젠가 올릴 예정.

오오 지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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