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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결 Nov 02. 2023

디지털 시대 속 손글씨

손글씨의 기쁨

나의 과거 다이어리 중 일부




   나는 두 가지 시대 물결을 건너온 물고기다. 첫 번째 물결은 느린 유속의 아날로그 시대이고 두 번째 물결은 빠른 유속의 디지털 시대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이 커다란 변화를 나는 청소년기에 맞이했다. 일명 밀레니얼 세대라고도 불리는 세대여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던 시대의 변화를 성장 과정 내내 지켜본 터라 이 변화를 훨씬 크게 체감했다.


   아날로그 시대엔 무엇이든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날로그 기록은 따뜻한 감성과 사고가 깊게 묻어나는 영역이었다. 이 시절엔 손글씨로 다이어리에 꼬박꼬박 일기를 남기거나, 직접 편지를 써서 보내고 수일이 지나서 답장을 받는 일이 흔했다. 유년기의 향수가 묻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난 이런 아날로그만의 기록방식을 사랑했다. 기록방식이 조금 투박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고유한 손글씨에서 묻어나는 매력과 섬세한 가치관이 마음에 들었고, 손에서 기록되고 손으로 이어진단 점에서 사람 냄새가 나서 더 좋았다. 아날로그 기록만의 따뜻한 손글씨 감성이 남아있는 한 세상이 조금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진대도 중심을 잘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각 가정에 컴퓨터가 자리 잡고 스마트폰까지 등장한 이후 아날로그 기록은 차츰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책은 인터넷과 영상으로, 다이어리와 노트는 각종 메모 어플과 SNS로, 편지는 메신저로 간단히 대체됐다. 사람들은 편리함에 중독됐고, 그만큼 아날로그 기록방식은 불편하고 고리타분해졌다. 손끝으로 화면을 톡톡 치기만 하면 어떤 글이든 쓸 수 있는데 굳이 펜을 쥐고 시간과 공을 몇 배나 들여야 하는 손글씨를 선호할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손글씨는 소수의 전유물이 됐고, 한때의 짧은 시대 흐름처럼 저물어가는 듯했다.






   영영 잊힐 줄 알았던 손글씨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된 건 뜻밖에도 대학교에서였다. 어느 날 시험을 치른 뒤에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대학생한테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평소에 손글씨 쓰는 연습 좀 하세요. 시험지에 뭘 썼는지 알아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학점을 줍니까? 앞으로 내용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악필은 감점당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신기했던 건, 꽤 여러 교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단 사실이다. 실제로 당시 글씨를 잘 쓰는 학부생이 드물다는 건 같은 학부생이었던 나까지 인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글씨를 잘 쓰는 건 둘째치고 아예 알아볼 수 없는 악필을 구사하는 학부생도 많았다. 악필이 심한 경우, 한글이 맞는지 의심해야 할 수준이었고 심지어 본인이 써놓고도 읽지 못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학부생들 사이에서 악필이 늘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글씨를 쓸 일이 줄어들면서 손가락 소근육 힘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글씨를 잘 쓰려면 손가락에 섬세한 힘 조절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지점까지 펜을 움직이기 위해서 정교한 필압이 중요한데, 손가락 소근육 힘이 떨어지면 펜의 움직임을 통제하기 어렵다. 평소에 꾸준히 글씨를 쓴 사람은 펜을 통제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괴발개발 날려쓰다가 악필이 되기 쉽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편리성을 안겨준 대신, 내 손으로 글씨를 쓸 힘을 빼앗아간 셈이다.




   물론, 악필이라고 해서 먹고 사는 데 크게 지장은 없다. 그러나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악필인 사람보다 얻는 혜택이 훨씬 많다. 예를 들어서, 똑같은 내용인데 글씨를 반듯하게 쓴 사람과 알아볼 수 없게 날려쓴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직장 상사든, 학교 선생님이든 둘 중 한 명을 뽑아야 한다면 누굴 뽑게 될까? 두말할 것도 없이 글씨를 반듯하게 잘 쓰는 사람을 뽑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만으로 첫인상이 좋아지고 꼼꼼하다, 섬세하다, 깔끔하다와 같은 좋은 이미지는 덤으로 얻을 수 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잃을 것이 전혀 없다. 오히려 얻어가는 것이 더 많다.

   반대로 악필인 사람은 사소한 데서 불이익을 경험할 수 있다. 내용을 제대로 썼으나 읽는 사람이 글씨를 읽을 수가 없어서 시험 점수가 더 낮게 나올 수 있고, 이미지 또한 뜻하지 않게 부정적으로 비칠 공산이 크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글씨로 인해 완성도가 떨어져 보인다면 억울하지 않을까?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컴퓨터와 스마트폰 중심으로 돌아가는 디지털 시대 속에서도 기본적으로 글씨는 잘 써야 한다.


   여기서 글씨를 잘 쓴다는 말은 명필가 수준으로 잘 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소한 상대방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균형 잡힌 글씨는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 사이에 말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글씨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상대방을 존중해서 단어와 표현을 신중하게 선택하듯 글씨도 마찬가지다. 읽는 사람을 생각해서 반듯하게 글씨를 쓸 줄 아는 것도 의사소통을 잘하는 것과 같다. 말도, 글도 결국은 같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는 손글씨를 가벼이 여기지 말고 꾸준히 갈고 닦아야 할 이유가 된다. 반듯한 글씨엔 그 사람만의 고유한 태도와 마음이 담긴다. 괴발개발 날려 쓴 글씨엔 그 어떤 진중한 태도도, 마음도 담을 수 없다.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기보다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 오랜 시간이 흘러도 꾸준히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과 고전 문학 등이 그러하다. 인간이 쓰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아날로그 기록이 예전처럼 각광을 받진 못하더라도 디지털 시대 안에서도 꾸준히 남아있는 이유는 인류의 발전이 쓰는 행위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흙 바닥과 동굴 벽에 글씨를 쓰던 인류가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기에 우리는 손으로 글씨를 쓰고 사고하는 행위를 멈춰선 안 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잠시 꺼두고 펜을 쥐고 글씨를 써보자. 간단한 낙서도 좋고, 일정 정리나 지금 떠오르는 생각, 오늘의 일기 등 쓰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 괴발개발 날려쓰지 말고 천천히 또박또박 글씨를 써보자. 처음엔 불편할 것이다. 펜을 놓은 지 오래돼서 손과 어깨가 아플 수도 있고,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은 불편함과 지루함이야말로 손글씨가 가져다주는 축복이다. 이 불편함과 지루함을 견뎌내는 사람만이 쓰면서 더 깊은 사고를 하고, 그만큼 더 멀리 갈 수 있다. 손글씨는 빠르게 돌아가고 남김없이 휘발되기만 하는 디지털 시대에서 나를 지켜줄 것이다. 비록 더디고 느리겠지만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손글씨는 결국 단단한 태도와 마음으로 거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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