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망토의 그녀
“저요? 나름 자타공인 영국 덕후입니다.”
덕질 하나쯤 있는 것은 꽤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한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엔 슬기로운 집콕 덕질 생활로 코로나 블루를 극복하기도 하지 않던가. 어릴 적부터 영국 문화와 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다. 영국식 발음에 매료되어 오만과 편견, 해리포터, 셜록, 오페라의 유령, 비틀즈 등 드라마, 영화, 뮤지컬, 음악 분야들을 하나둘씩 접하면서 영국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었다. 정원 가꾸기, 홍차 마시기, 축구와 함께하는 펍 문화까지 좋아하게 되고 심지어 ‘하루 동안에 4계절이 있다’라고 할 만큼의 변덕스러운 날씨마저도 마음에 들어할 정도. 영국인처럼 홍차 한 잔 하며 애프터눈 티 시간을 즐기기도 하고 윔블던 결승 경기 때문에 새벽을 꼴딱 세면서 TV 집관으로 테니스 경기를 본 적 있을 정도로 영국 덕후의 피가 흐르고 있다.
무언가를 즐기다 보면 즐기는 재미에만 그치지 않고 자연스레 이면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까지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과거 한 때 무서울 정도의 무자비한 식민지 지배자의 얼굴을 갖고 있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제국주의의 모습을 마주할 때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영국박물관에서 약탈해온 전시품들을 모두 무료로 언제든 관람할 수 있게 만든 점에서 ‘그래도 양심적이네’ 라며 그 복잡한 마음이 희석되기도 한다. 이집트 문명 해독의 열쇠인 로제타스톤 같은 유물을 보게 될 때면 그 당당함이 쿨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언급한 것 이외에도 영국 하면 가장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연 유니언 잭 문양이다.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하얀색 바탕의 붉은 십자가,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파란색 바탕의 하얀 X자형 십자가, 북아일랜드를 상징하는 하얀색 바탕의 붉은 X자형 십자가가 합쳐진 이 문양은 영국 감성을 대표하며 강렬한 팝아트적인 느낌 때문에 지금까지 패션디자인의 모티브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도 유니온 잭 디자인의 핸드폰 케이스를 사용했다.
사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니언잭은 영국에서 제국주의, 식민주의에 대한 향수로 인식되며 깃발을 흔드는 것 자체가 국수주의적이고 극우적인 행동으로 비쳤다. 이 때문에 1997년 토니 블레어 총리가 첫 출근길에 유니언잭을 든 지지자들과 함께 거리 행진을 했다 비난받기도 했다. 유니언잭 기념품 상점 주인들은 극우당인 영국국민당(BNP) 당원으로 여겨졌을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유니언 잭은 작은 소품부터 패션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벗고 ‘쿨 브리타니아(멋진 영국)’의 아이콘으로 부활했다.
-"사랑해요, 유니언잭" 동아일보. 2012-06-05.
처음 영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설렘 한 가득 안고 런던 거리를 돌아다니다 길거리 자판대에서 영국 국기 문양인 유니언잭 디자인의 모자를 집어 들었다. 모자를 쓰고 한껏 브리티시 감성에 젖어있는데, 유니언잭 문양이 들어가 있는 국기를 망토로 두른 힙(Hip)한 여행객이 앞을 지나간다.
“브리티시 감성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표현한 패피(패션피플)인가?”
자세히 보니 영국 국기가 아닌 호주 국기다. 영국 연방 국가들은 다 유니언잭 문양을 국기에 포함하니까 두르고 다닐 수 있겠다 싶었지만, 굳이 런던 거리에서 국기 패션 워킹을 하는지 의아했다. 궁금증이 사라지기도 전에 지하철역에서도 호주 국기를 두르고 다니는 또 다른 여성을 발견했다.
“뭐지? 오늘 무슨 날인가?”
뭔가 싶어 인터넷 검색창에 “1월 26일 호주”를 타이핑해보니 친절하게 네이버는 단번에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바로 호주의 최대 국경일인 “오스트레일리아의 날(Australia Day)”이다. 호주 건국기념일이 가지는 의미로 몸에 걸치고 다니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날(Australia Day)은 1788년 1월 26일 영국 제1함대 선원들과 영국계 이주민들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록스 지역에 최초로 상륙하여 오늘날의 시드니를 개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로 대한민국의 개천절과 같은 오스트레일리아 최대의 국경일 중 하루이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캔버라와 시드니, 멜버른, 브리즈번, 퍼스, 다윈 등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요 도시에서 각종 크고 작은 기념행사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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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호주를 개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인만큼 호주인들에게 매우 자랑스러운 날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국적 이민자들이 유입된 이민자의 나라이지만 호주인의 뿌리는 영국인 이주자들이다. 영국을 고향이라 여기고 영국 억양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며 공식적인 여왕의 지위 역시 아직도 영국 여왕이 맡고 있지 않은가. 국경일인 ‘호주의 날’이 되면 다양한 이벤트 행사를 즐기며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호주 국기를 흔든다고 한다. 백인들이 호주를 침략한 날로 규정하는 호주 원주민 입장에선 맹목적 애국주의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국뽕이 아닌 국가에 대해 보여주는 아주 단순하지만 모국에 대한 애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의 거리에서 호주 국기를 두르고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이벤트를 즐기는 것을 넘어 애국심이나 자부심을 드러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도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옷과 소품에 태극기를 쉽게 활용하게 되었다. 미국의 성조기나 영국의 유니언 잭 국기가 패션이 된 것처럼 최근 세계적 명품인 루이뷔통 패션쇼에서도 태극기 문양의 옷을 두른 모델을 볼 수 있고 다양한 태극기 컨셉 패션 상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이전보다 태극기를 활용하고 표현하는 일들이 많아졌는데, 그 형태에 대해서 막상 그려 보라 하면 정확히 떠오르지 않기도 한다. 작년 현충일 도봉산 등산길에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포스트잇에 태극기를 직접 그려 넣어 벽지에 붙이는 이벤트에 참여했는데, 부끄럽게도 이미 그려진 태극기를 커닝해가며 그렸던 경험이 있다. 둥근 원을 반으로 갈라 윗부분은 붉은색, 아랫부분은 파란색으로 그린 후 원 바깥쪽 가장자리 위치에 4개의 건곤감리 괘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헷갈렸던 나였다. 유니언잭 문양은 잘 기억하면서 우리나라 태극기 문양을 그리기에 이리 쩔쩔매는 모습이라니... 태극기를 잘 그릴 수 있다 해서 애국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태극기의 의미를 알고 그리려는 의지에서 애국심은 시작될 수도 있다. 애국이란 말뜻 그대로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인데, 나는 과연 얼마나 내 나라를 사랑하고 만족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았다.
사실 온라인상에서 헬조선, 탈조선 등의 자조 섞인 신조어들이 나오고 있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민 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 역시 몇 년 전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 열광하면서 주인공 계나처럼 한국을 떠나고 싶어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열리는 이민 박람회에 상담 신청을 한 적이 있다. 호주로 나 홀로 여행을 갔을 때도 스쿠버다이빙 체험 때 만난 한국인 선원과 대화를 하다 이민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지기도 했었다.
실제로 청년 10명 중 3명은 해외 이주를 고려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2019년 한국 청소년정책연구원이 전국의 만 15~39세 청년 35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9 청년 사회ㆍ경제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8.8%가 해외이주를 고려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을 정도다. 해외이주를 고려한 이유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30.9%)라는 답이 가장 많았던 만큼 젊은 세대에서 애국을 찾기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까지 포기해야 한다고 해서 7포 세대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포기할게 많아 셀 수 없을 정도라는 의미의 N포 세대라는 자조 섞인 언어들까지 나와 쓴웃음을 짓게 한다.
매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더 나은 삶의 질 지수’(The Better Life·BLI)를 발표하는데, 웹주소(www.oecdbetterlifeindex.org)를 클릭해서 들어가 보면 나라별로 영역별 세부지표까지 자세히 볼 수 있다. 한국의 종합순위는 조사국 40개국 가운데 30위를 기록했는데, 세부 지표를 보다가 너무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사회적 관계(COMMUNITY), 환경 영역(ENVIRONMENT)에서 40위로 꼴등이 아니던가. 환경 영역은 겨울철 ‘삼한사미(삼일은 춥고 사일은 미세먼지가 분다)’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OECD 최고 수준의 초미세먼지 농도 지표 때문이었다.
새로운 나라에 도전해보려는 마음도 있겠지만, 각박한 한국생활에 지쳐 현실 도피성 이민을 생각하는 마음도 꽤 차지할 것이다. 나 역시 후자였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기회의 무덤이라 여기며 한국만 아니라면 된다는 식의 해외도피를 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만 하고 불만 불평만 늘어놓고 현실만 도피하려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먼 타지에서 치열하게 적응하려고 노력할 의지가 있다면 한국에서도 그만큼의 노력으로 변화를 만들면 된다고 꾸짖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불만과 부정적인 면에 매몰되지 않고 어떻게든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회피할 것인가?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에 따른 경기침체, 대통령 선거를 앞둔 사회갈등 격화, 식지 않는 부동산 열기, 악화일로를 걷는 북핵문제 등 안팎으로 난제들이 산적한 상황에서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구조의 문제인 현실의 벽 앞에서 나는 어떤 마음으로 한국을 대해야 할지 여전히 복잡한 마음이다.
만약 이민을 간다면 가고 싶은 나라는 어디인지 물었을 때 처음 떠오르는 나라는 호주였다. 호주 북동쪽 작은 마을인 케언즈(cairns)에 가서 살고 싶었던 적이 있는 만큼, 1월 26일, 호주의 날을 맞이한 호주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오늘을 보내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