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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Oct 30. 2023

between 9 and 6

하루종일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수리기사.

나 : (애가 타는 목소리로)그런데 너 오늘 2시까지 온다고 하지 않았어?


수리공 :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응, 맞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어. 오늘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에 갈게"


 여기 전설처럼 전해지는 우스겟소리가 있다. 영국에서 뭔가 수리를 받거나 전자제품 설치 등의 서비스를 받으려면 'between 9 and 6' 가 기본이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꼼짝않고 집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영국에서 생활하면서 A/S를 받거나 수리공의 방문을 받아야 할 일들이 다행히 많지는 않았다. 처음 우리 집에 들어와 맞이했던 인터넷 설치기사도, 전기와 가스 점검하는 아저씨도 2년째 제 시간에 맞춰 딱딱 와줬기에 'between 9 and 6' 은 우리에겐 그저 도시전설로만 남으려나 내심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동안 내 설거지 이모님으로 충실히 일해준 식기세척기가 어느 순간 문이 잘 닫히지 않았고, 작동 시 하부장으로 물이 새는 현상이 생겨 수소문 끝에 수리기사를 불렀더니 2시 쯤에 방문하겠다고 답장이 왔다. 다행히 'between 9 and 6' 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오전 10시가 넘어 겨우 받은 2시라는 시간은 'between 9 and 6'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마침 방학이라 아이와 외출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집에서 점심을 먹고, 2시에 올 수리공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시계는 어느덧 2시 45분. 답답해하던 아이가 창문밖으로 고개를 빼고 하염없이 아저씨를 기다렸지만 수리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참다못해 전화를 했더니 들은 말이 바로 저 말이다. 

"오늘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에 갈게~"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싶었다. 애가 타는 우리와는 달리 아주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이미 집 주소도 알고 얼굴도 아는 처지(?)여서 오늘 저녁에 보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 저녁에 오지 않았다. 물론, 연락도 없이 말이다.




익히 들어왔던 에피소드라 이렇게 당황할 일도 아니건만, 이곳 특유의 여유로움은 언제나 당황스럽고 때로는 불편하다. 하긴, 내 부러진 손목에 수술이 필요하다고 진단이 내려진 날도 담당의사가 곧 자기 퇴근시간이니 오늘은 어렵겠다고 쿨하게 말하고 퇴근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이미 이른 아침부터 병원을 방문해 진단 후 바로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기타 준비를 마친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아예 처음부터 오늘은 수술이 안되니 다른 날을 잡아줄게 라고 하거나 오늘은 다른 수리때문에 방문이 힘들것 같으니 내일 방문하겠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방문 날짜는 물론이요, 몇시 몇분까지 거의 정확하게 지키는 한국에서 살다가 이렇게 상대방만 여유있는 경우를 만나면 정말이지 그날은 나홀로 속터짐 대환장 파티를 하는 날이다. 다행히 세척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누수가 없는 상태이니 이번은 그나마 나은 경우겠지만 혹시나 정말 지금 당장 처치가 필요한 일을 살면서 만나게 된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해진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긴장감 속에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가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앞의 집 물건을 수리하다 보면 예상시간이 늘어날 수 있고, 그럼 너희집도 늦을 수 있지' 라는 이곳의 유연한(?) 사고방식이 어찌보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을텐데 그럼에도 시간을 맞춘다는 것은 어찌보면 일하는 동안 숨돌릴 틈 없이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맞바꿔 우리가 누리왔던 혜택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경우가 많을 것이다. 




 결국 식기세척기는 수뢰를 의뢰한지 5일만에, 두번의 시간 약속을 어긴 후 세번의 방문 끝에 완전히 마무리 되었다. 윗 대화 속 저녁시간을 펑크낸 수리공은 다음날 오전,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없이 방문해 활짝 웃으며 "지금 괜찮아?" 를 물었다 ㅋㅋ 화가 나도 급한 사람은 나였기에, 내 자신을 스스로 잘 다독거리는 거 말고는 딱히 방법도 없던 5일의 시간이었다. 수리가 완료되자 나와 수리공은 박수를 쳤는데, 내 기분탓인지 나만큼이나 그 수리공의 얼굴도 후련해 보였다.


 돌아갈때까지 이제 더 이상 'between 9 and 6' 을 체험할 기회가 없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여유로움이 이곳의 장점이자 미덕이지만 때론 성질 급한 나같은 한국 사람에겐 그들의 여유로움은 정말 너무 견디기 힘든 부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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