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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unQ Oct 13. 2021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현대인을 너무도 사랑한 줄리안 오피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신기해


6시 땡! 피곤한 기색을 억누르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몰려든다. 광화문역을 시작으로 강남역, 삼성역 사거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반짝반짝 매워지고, 지하로 다니는 지옥철 속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채 무심한 표정으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자유로이 배회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어릴 적 서울에 처음 상경했을 때만 도, 끝없이 펼쳐지는 8차선 도로와 점심시간만 되면 사원증을 목에 건 직장인 무리를 보며 한때 서울에 대한 로망이 쌓였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로망 따위 잊은 지 오래. 퇴근시간만 다가오면 1분 1초라도 일찍 집에 도착하기 위해 저녁으로 무엇을 픽업해갈지, 약속 장소가 정해지면 지옥철을 피해 가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내 노력이 가상하다고 할까나.




길가다 누굴 마주쳤는지 알게 뭐람


뭐.. 이 말이 어떤 이에겐 꽤 냉소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직장인들이여(또는 현대인들이여) 솔직히 말해 오늘 출퇴근길에 앞에 앉았던 사람의 차림새가 진정 기억이 나는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 앞에 서있던 이가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는지 하나, 둘, 셋 하고 바로 정답을 외칠 수 있는 이는 정말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바쁘게 굴러가는 현대사회 속에서도 우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주는 이가 있었는데.


Julian Opie, Julian., 2013. ©Cristea Roberts Gallery


한국에서는 이제 줄리안 오피(Julian Opie, b.1958) 하면 그의 작품을 떠올리거나 오! 나 이거 어디서 봤어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꽤 될 듯하다. 대표적으로는 국제갤러리를 통해 서울과 부산뿐 아니라 아트페어로 전국 또는 전 세계를 순회하며 관객들을 맞이해온 그는, 특유의 굵은 테두리를 가진 형상을 캔버스에 담았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에게 앤디 워홀 다음으로 손꼽히는 팝아티스트로 꼽혀 왔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신기해
팔다리가 앞뒤로 막 움 움 움 움직이는 게



최근에 오픈한 국제갤러리 Julian Opie, 2021 전시 전경

예전에 유스케에서 악동뮤지션의 컴백 무대를 보다가 우연히 위 노래의 작곡 스토리를 듣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오피의 작업 방식과 매우 유사하게 다가왔다. 먼저 찬혁의 스토리를 짧게 요약하자면: 그냥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운전 중 신호등을 건너기 직전에 빨간불에 걸려 건널목을 지나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날따라 그들의 움직임이 슬로 모션으로 보이면서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고. 그는 그렇게 집에 돌아오자마자 당시 느꼈던 감정을 기억하며 또 하나의 명곡을 탄생시킨다. 흥미롭게도 오피 또한 마찬가지로 거리의 행인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아 왔는데, 심지어 해외전시가 있을 때면 포토그래퍼를 따로 고용해 해당 지역의 인구 밀집 거리를 찾아 나설 뿐 아니라,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작업실에서 슬로 모션으로 돌려보며 걷는 자와, 조깅을 하는 이의 팔다리 관절이 각각 어떻게 움직이는지 하나하나 유심히 관찰하는 정도라고. 이러한 그의 집요함은 추후 그만의 자연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난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게 된다.





간결한 선과 없어진 눈코입


Walking in Melbourne. 8. 2018 & Walking in Sinsa-dong 3. 2014. ©Julian Opie


백문이 불여일견! 그럼 이제 이론 말고 앞서 말한 내용을 실제 작품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나름대로 각 지역의 특색이 잘 캐치되었다고 생각되는 두 작품을 예시로 들고 왔다. 우왼쪽은 멜버른 풍경을 모티프로 한 작품. 일단 보이는 대로 서술해보자면 햇빛이 강렬한 지역답게 옷 색상이 전반적으로 옅고, 커다란 캔버스 백이나 백팩에 다른 짐들을 주렁주렁 매단 모습에서 서양 사람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에 위치한 두 여성은 태닝을 꽤 즐기는 듯한데, 특히 길거리를 수영복 차림으로 배회하는 저 자유분방함은 한때 동방예의지국이었던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닌 듯하다. 그럼 이제 오른쪽 작품을 살펴볼까. 과연 신사동이란 작품명답게 한때 유행하던 하의 실종 패션을 포함해 스틸레토 힐과 빨간 양말에 닥터마틴을 매치한 요소들이 이목을 이끈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는 가방 사이즈를 꼽을 수 있겠는데, 가죽 백팩을 멘 남성을 제외하고는 미니백과 클러치부터, 심지어 막 쇼핑을 끝내고 나온 것 같은 이가 다른 한 손에 테이크아웃 음료를 들고 가는 풍경은 지극히 코로나 이전의 한국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 반대로 두 작품의 공통분모를 살펴보자면, 현대미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테두리가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볼드 처리되어 있는 반면, 그 어떤 이의 얼굴에서도 이목구비를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이에 대해 마치 우리가 길에서 마주친 사람을 기억할 때, 그의 눈코입이 어땠다고 말하기보다 그(녀)가 맨 가방과 옷차림이 어떠했는지를 중심으로 기억하는 점을 캐치했다고. 또한 배경에 장식적인 요소를 없애고 추상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단색으로 통일한 점 또한 눈에 띄는데, 이마저도 초기작의 원색과 같은 짙은 배경부터 시작해 점점 파스텔 톤이나 무채색으로 옅어지는지는 걸 볼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을 시간순으로 보고 있자면, 초기의 인물들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사알짝 걸치고 있었지만, 점점 명암이 없어지고, 중후한 배경색을 날려낸 뒤 옷과 장신구의 표면을 단순화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색채 테두리만 남기두는 추상적인 형태를 갖춰가는 듯하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현대인의 모습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행인의 모습을 자신만의 색깔로 담아낸 줄리안 오피와 그의 작품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날이 제법 쌀쌀해졌네요. 더 추워지기 전에 이번 주말에는 아껴두었던 트렌치코트를 꺼내 들고 근처 공원에서 쉼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바쁜 일상 속 때로는 멍 때릴 시간도 필요하죠. 저는 그때마다 집 근처 공원에 가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곤 하는데, 그때마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아이들과 공놀이 하러 온 가족, 손잡고 거니는 연인들, 삼삼오오 수다를 떠는 학생들을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을 때가 있지요.


그럼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에피소드에서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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