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우리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면서 인간에게는 동물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속성이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연구는 이 선언서의 상당 부분이 그저 상상 혹은 희망이었다는 걸 밝혀내고 있다. 도구의 사용 능력은 물론, 제작 능력에서도 그것이 인간만의 유일한 특성이라는 믿음이 깨진 지 오래다. 인간만이 번식의 목적 없이 성생활을 즐긴다거나 인간만이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공감할 수 있다는 식의 관점을 부정하는 증거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단순히 본능을 따르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행동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틀 역시 깨지고 있다.
오히려 인간의 사고방식이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인간이ㅡ마치 뉴턴의 고전의 물리학처럼ㅡ동일한 환경에서 언제나 동일하게 반응하는 단순한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행위는 세밀한 관점에서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다. 다만 인간이 하나의 개별자로서 외부의 영향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건 아니었다. 인간의 사고는 주변의 영향을 쉽게 받았고, 그에 따라 패러다임에 갇히거나 일종의 패턴을 그리는 경향이 있었다. 인간의 사고는 한정된 영역 내에선 카오스처럼 혼란해 보였지만, 거시적 구조에선 특정한 양상을 띠었기에 근사적인 예측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지식은 다시 과거를 참조하게 된다. 인간은 판단하기를 꺼리고 단지 믿으려 한다는 세네카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관점에서 물리학자 마크 뷰캐넌은 예측에 관한 통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니체는 오래전에 철학의 맥락에서 인간의 문화를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너무 많은 철학자들이 먼저 자기가 믿은 것을 결정한 다음에 이유를 찾는다는 것이다."(사회적 원자, 2017, 53)
이와 같은 관점ㅡ인간의 사고와 그를 기반으로 이뤄낸 지식은 불완전한 토대 위에 서 있다ㅡ을 밀고 나가다 보면, 과학에 상대주의 문제를 일으킨 뒤앙-콰인 논제가 떠오르게 된다. 가설들을 하나하나 모두 검증한 뒤 '모든 가설이 온전히 타당해야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엔 분명 합당한 면이 있다. 이런 식의 태도는 실험 절차, 관찰 장비, 측정 장비의 오류를 검증하는 문제까지 나아갈 수 있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ㅡ현대의 지식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ㅡ필연적으로 상대주의나 허무주의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이 문제는 과학이나 사회 문제가 아니라 내가 당면하고 있는 일상적인 삶의 문제로 다가왔다. 내가 일상에서 어떤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가? 난 내가 이루고 있는 구성원을 상대로 수많은 노력, 이른바 정치를 시도했다. 그 결과 이런 식의 검증은 끝이 나지 않는다는 걸, 무엇보다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검증은 처음에는 비교가 가능한 듯 보였지만, 절대적인 측정이 불가능하고 명확한 기준조차 세울 수 없다는 점에서 갈등만 야기했다.
다시 한번, 난 우리가 정치라고 이해하는 것이 실제로는 그저 치안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던 랑시에르의 지적을 떠올렸다. 난 남녀의 문제를 두고 이에 관해 간단히 논의한 뒤(결혼은 왜 증오의 대상인가, 2020) 그곳에 유토피아는 없다는 암묵적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즉, 정치적 관계는 일시적 갈등 봉합에 성공하여도 다시 터지게 마련이었다. 정치는 곧 치안 행위로 내려온다. 따라서 난 수동적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에 적정한 선을 그은 뒤 타협해야 했다. 허무주의에 빠지고 싶지 않았던 나는 펜을 들어 선을 그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 선을 대체 어디에 그어야 한단 말인가?
이원론적이며 실용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선 거시 모델과 미시 모델로 구분하는 게 편리할 테다. 여기에서 거시와 미시의 의미는 물리 세계를 가르는 말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철학적이며 윤리적인 관점의 개념이다. 거시의 세계로 올라갈수록 선 자체의 두께가 얇아지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흐릿해진다. 결국 선의 위치는 점차 중요해지지 않게 된다. 아니, 인식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니 나는 펜을 내려놓고 거기에서 시작해야 했다. 모든 것이 흐릿하여 판단 자체를 유보할 수밖에 없는 현장에서.
과학철학자 장하석은 '여러 실험이 같은 결과를 내놓고 있기에 그 명제는 참이다'라는 식의 논증이 "심리적 보증을 제공하는 것 외에 다른 역할을 과연 할까?"(물은 H2O인가, 2021, 437)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문맥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난 심리적 보증이라는 단어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지금에 와서, 나는 심리적 보증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추적인 요소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중성임neutral은 자연적임natural이 아니다"(같은 책, 439)라는 그의 주장을 돌아보았다. 수소나 산소 같은 원자는 '자연적으로' 음전기와 양전기를 띠려는 (이온화되려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수소나 산소를 '중성'으로 바라보는 것은 자연적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과학계는 수소나 산소의 중성적 상태를 '원소'로 놓은 뒤 그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며 다른 방식의 해석을 거부하려 했다. 그의 생각에 이는 옳지 못했다. 같은 원리로, 내가 그리고 상대방이 자꾸 어떤 특정한 경향과 태도를 보이려 한다면 그 태초의 성향을 자연스러움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애써 중성으로 돌려놓아봐야 우리는 곧, 다시, 아주 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철학이나 사회학의 다원주의는 극단주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는 회의도 싹텄다. 관용의 정신은 이미 상대주의라는 오독을 낳지 않았는가? 실제로 다원주의는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이기심을, 악의 속성을 낙관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있었다. 교조주의는 내 흐릿한 눈을 보며 미소 지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수정한다. 펜을 내려놓지는 말아야 한다고. 펜을 내려놓는 순간 배우려는 태도마저 놓치게 되기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내재된 특정한 성향이 있고,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며, 절대적으로 경계선을 나누지 못하는 데다가, 근본적으로 순환성에 빠질 수밖에 없더라도, 머뭇거리며, 갈등하고, 떨며, 흔들리더라도, 우선 가볍게 칠을 하고 그 위에, 혹은 그 아래에 조금씩 다른 색을 덧칠해 나가야 한다고. 그러다 때때로 고개를 들고 스케치에서 한참 떨어진 뒤 그 선이 너무 날카롭지 않았는지 계속 돌아봐야 한다고. 그리고 반대로, 때때로 선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기도 해야 한다고. 사소한 티를 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까이 다가갈수록 선명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다시 흐릿해지는 선의 상대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것이 당신이 도달한 피안의 세계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완벽한 진리가 아니라 심리적 보증 위에 머무는 것은 그저 인간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성공은 진리를 담보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원리를 모르고도 배를 물에 띄우는 데 성공한다. 아이들은 행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