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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Mar 17. 2022

박완서 <잃어버린 여행가방>

잃어버린 건 여행 가방이 아니었다.

기행문을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읽을 만한 기행문을 쓰기는 더욱 어렵다. 독자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글을 읽을 테고, 그래서 작가는 독자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린다. 독자의 바람이 문화나 건축물 혹은 자연에 대한 객관적 정보에 머물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행문을 읽는 독자는 대개 작가의 경험을 원한다. 그를 발판 삼아 자신이 보아야 할 것, 혹은 보지 못했던 것을 알아내길 바란다. 그런데 그 경험이라는 것이 되돌아보면 하찮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자국 문물에 대한 사랑은 속 좁은 국수주의로, 인류에 대한 헌신은 자기 가족을 뒤로한 이기심으로 드러나곤 했다. 올곧은 강단이 옹졸한 고집이었음을, 엄격한 비판이 자신을 향한 적은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기행문 쓰기는 어려운 일이 된다. 훗날 그 기록이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결국 이름 있는 작가의 기행문은 흔히 관망과 포용의 자세를 취하게 되기 마련이다. 여행 중에 자신이 보고 겪은 것들에서 장점을 찾아내어 아름답게 묘사하면 독자에게 비판받을 일이 줄어든다. 독자 역시 기행문에서 안녕과 휴식을 기대하지, 사회적 모순과 독자를 향한 충고를 찾지 않는다. 그래서 기행문의 사막은 대개 메마른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고대 로마의 건축물과 예술품은 영웅적 탄사를 자아내며, 보호구역의 원주민들은 순수라는 이름의 세례를 받는다. 뭔가 조금 알고 있던 사람들도 그 글을 보며 웅얼거린다. '그래, 몇 년 전 저 원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잔인한 내전은 서구 문물의 이기적인 영향 때문일 거야. 우리 본성은 절대 그렇지 않아.' 독자는 기행문을 읽으며 희망과 위로를 선물 받는다.


기행문을 읽을 때의 통상 내 느낌은 대개 그런 편이었다. 그런데 박완서 선생의 기행문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선생은 이렇게 썼다.


"1980년대 초에 처음으로 유럽 구경을 해보고 나서 나는 그쪽 문화뿐 아니라 그쪽 농촌의 풍요한 아름다움에 거의 경도돼 있었다. 그 후엔 순전히 나 개인적인 마음 고통의 돌파구로서 자주 그쪽을 여행할 기회를 만들었지만 아직은 기행문 비슷한 것도 쓸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그쪽 것을 선망하는 마음이 우리의 초라한 문화와 엉망으로 훼손되고 오염된 자연에 대한 혐오감과 표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남 앞에 드러내기가 싫은 것이다."(박완서, <잃어버린 여행가방>, 23쪽)


비록 유럽 여행기(교황 바오로 2세의 조문 사절단으로 참가했던 기행을 제외하면)는 아니었지만, 난 선생의 그 기행문에서 선생이 드러내기 싫었다는 그 표리를 느꼈다. 아마 선생도 아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기행문을 남기셨다. 그 이유는 그저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인간을 뛰어넘은 성인은커녕 그 근처도 가기 어렵다는 걸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흔히 특별한 혜안을 가져야 한다고, 혹은 그런 사람만이 작가라 불릴 자격이 있다고 평가받곤 한다. 하지만 작가는ㅡ심지어 그런 놀라운 평가를 받는 작가들조차ㅡ그의 마음속 가장 희망적인, 어쩌면 낙천적인 가지 하나만을 의도적으로 드러냈을 뿐이다. 물론 독자가 그 글에 위로를 받았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는 아이를 달래주는 듯한 따뜻한 말과 행동을 평생에 걸쳐 그리워하니까. 다만 막연한 기대와 위로가 주는 오독을 평소 걱정스러워하던 나는 자신을 꾸미지 않는 선생의 기행문에 색다른 감명을 받았다.


많은 작가가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 아마 독자가 없다면 작가 또한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할 작가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난 박완서 선생의 저 기행문이 독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선생은 그저 자기 생각이 글로 담기길 원하셨던 것 같다. 비록 완벽하지 않아서 그 표리가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순간 글쓰기는 벌이의 수단이 아니었다. 여행이 고통의 돌파구였듯, 글쓰기는 또 다른 돌파구를 내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관조하는 시각으로 세계를 고양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숙함을 드러냈다.


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는 법이니 비록 읽은 책은 같다 하더라도 내가 본 것과 다른 독자가 본 것은 제법 다를 테다. 실제로 많은 독자가 선생의 기행문에 드러나는 자연주의적 묘사에 감명을 받았다. 독자의 호의는 대개 그 부분을 향했다. 내가 본 것은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나는 선생의 글에서 잠깐씩 묻어나는, 삶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분분한 모습을 보았다. 어떤 독자는 내게 왜 작가 개인의 그런 단점에 주목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선생 스스로 신성한 존재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남길 원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선생의 기행문을 읽고 느낀 건 바로 그것이었다. 게다가 난 그것을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이 잃어버린 건 그저 여행 가방이 아니었다. 여행 가방이라 하더라도 선생은 그 안에 사람들이 평소 여행을 꿈꿀 때 생각하던 것과는 영 다른 걸 담아두고 있었다.


우리가 그저 존재하는 자연을 두고 혼자서 사랑을 줬다가 뺏었다가 희로애락 하는 것처럼, 선생은 그 속에서 영락하고 애면글면하는 한 사람의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비록 작은 걸음일지라도, 지평에 다가간다는 건 실로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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