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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Apr 18. 2021

종이책은 어떻게 승리하는가

아내가 커피 한 잔을 내 책상에 두고 갔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생각하여 특별히 주문한 스페셜티 커피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커피는 바닥이 넓고 전체적으로 무거워서 살짝 건드려도 내용물이 출렁거리기만 할 뿐 넘어지지는 않는 머그컵이 아니라, 바닥이 좁고 몸통은 기린의 목처럼 긴 플라스틱병에 담겨 있었다. 이 플라스틱병은 움직이다 보면 언젠가 건드릴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부비트랩과 다를 바 없었지만, 당시 난 그동안의 평화에 취해 노골적인 위협마저 무시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플라스틱병은 내가 그 윗부분을 아주 살짝, 툭 건들자마자 내가 그간 잊고 있었던 지렛대의 원리에 중력의 힘을 보태며 바닥으로 쓰러졌고, 그 안에 담겨 있던 갈색 액체는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등가 교환 법칙과 움직이던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 한다는 관성의 법칙을 선보이며 순식간에 책상 위로 퍼져 나갔다. 내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 두었던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책 초판본과 이제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프랑코 모레티의 비평서가 손쓸 겨를도 없이 무자비한 갈색 군대와 조우했다. 두꺼운 표지는 잠시나마 저항할 수 있었지만 새하얀 우리 시민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무방비 상태였다. 난 액체 군대를 또 다른 새하얀 종이 감옥에 포박하고자 했지만, 이들은 소크라테스 시대 이전의 남녀추니처럼 이미 하나가 되어 한정판 책의 가치가 시간이 지날수록 올라가는 이유를 제 몸으로 입증한 뒤였다.


난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커피를 그런 컵에 담은 아내에게 있는지, 음료수통을 그런 식으로 만든 제조사에 있는지, 커피가 책상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내 기억력에 있는지, 아니면 책을 제자리에 두지 않은 내 조악한 습관에 있는지 숙고했다.


내 질책을 상대해야 하는 첫 타자는 움베르토 에코였다(둘째 타자에 관해선 함구하도록 하겠다). 그는 전자책과의 싸움에서 종이책이 승리할 것이라고 여러 번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니다. 요즘 태블릿이나 휴대전화는 기본적으로 방수 기능이 있어서 커피가 쏟아져도 한번 쓱 닦아내면 원상태로 돌아온다. 설령 커피가 내부 기판에 스며들었다고 해도 메모리 카드나 유심칩만 살아 있으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상복구가 가능하다. 하지만 종이책은 파손되지는 않더라도 누렇게 변하고 만다. 둘 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누렇게 변색한 책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이는 곧 새 책을 살 형편이 되지 못해 오래된 책을 붙들고 사는 불행한 서생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전통이란 이름의 고리타분한 타성에 빠져 사는 아빠를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아이들이 양산된다. 그 아이들은 지난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아빠의 모습에서 인간이 변하기란 사도 바울 같은 성인이 아니고서야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현대 문명의 축복인 전자책에 더욱 빠져든다. 종이를 넘기는 효과까지 시각과 소리로 완벽히 재현해 넣어서 오히려 이쪽이 더 진짜 책 같이 느껴진다. 그러니 내가 책을 가져와 아주 좋은 책이니 읽어보라고 권할라치면, 아이들은 관뚜껑을 열고 나온 미라를 본 것처럼 놀라서 도망갈 수밖에 없다. 책에서 풍기는 케케묵은 곰팡내와 누런 종이는 이 재현에 힘을 보탠다. 아이들이 이런 책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영화 <쥬만지>나 <해리포터> 덕에 고대 유물에 흥미를 갖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 움베르토 에코가 종이책이 승리할 거라는 주장만 하지 않았어도 나 역시 진작 전자책으로 넘어갔을 테고, 그럼 이처럼 커피로 변색한 책을 보며 자책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움베르토 에코가 정말 틀렸을까? 지구를 살려야 한다며 화장지를 전혀 쓰지 않는 환경보호 운동가도 결혼할 때는 종이 청접장을 당연하게 여긴다. 온라인 청첩장을 받은 하객은 무한 복제가 야기하는 군중 속의 고독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메일로 쏟아져 들어오는 광고는 곧장 삭제 버튼을 누르지만, 집 우편함에 꽂혀 있는 광고지는 몇 달이 지나도록 버리지 않고, 심지어 꺼내서 잠시나마 읽어보기까지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온라인에 빠져 살다 보면 그런 사소한 감촉에도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반면 아무리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고 해도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오는 순간 화장실 벽에 쓰여 있는 낙서 취급을 받게 된다. 로마 황제가 원형 경기장에서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돌리며 검투사에게 죽음을 내리면서도 자신이 성은을 베푼다고 믿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인터넷 항해자들은 인터넷에 올라온 보르헤스의 글에 악플을 달면서도 자신이 보내준 관심에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은 그게 셰익스피어와 보르헤스의 글이라는 걸 모른다. 아주 유명한 문장이 아니면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일부의 문장만 가지고 그게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제 사라마구도 시덥잖은 삼류 판타지 작가라는 비난에 휩쓸린다. 구심축이 없는 포스트모던한 세상은 권위를 추락시키고 질서를 고리타분하다고 선언하는 한편, 존경과 아량까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포스트모던이라는 표현조차 구식으로 느껴지는 시대. 어쩌면 우리 아이들이 이 혼란에 너무 일찍 물들고 있는 건 아닐까? 전자제품은 자신이 더러워지면 새걸로 대체하라는, 구식이 되면 그만 잊으라는 계명을 내린다. 그런데 종이책은 자신이 더러워져도 간직하라고, 커피로 물든 부분을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라고 주문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겐 인터넷의 무한성과 카오스 이론이 아니라 사물의 유한성과 뉴튼의 질서가 필요했다. 그것이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게다가 충격에 약한 전자책 기기와는 다르게 종이책은 떨어뜨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이 부분에선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 옳다. 그러니 책이 커피로 더러워졌을 때, 난 탓할 대상을 찾기보다는 수시로 물을 쏟는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유를 알아채야 했다. 


어느날 아파트 전체에 정전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전자책에서 여전히 불빛이 나오고 있음에 안심했지만 곧 책을 로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신처럼 여겼던 물건이 고작 정전 하나로 먹통이 될 수 있다는 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난 부러 촛불 하나를 켠 뒤 그 앞에 앉아 종이책을 꺼내 읽었다. 아이들은 놀라운 눈길로 날 바라보았다. 난 신을 뜻을 영접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이었다. 내 안내에 따라 거인의 어깨로 올라가는 아이들의 얼굴 위로 고대의 지혜를 기록해 놓은 종이와 화로의 빛이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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