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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앤비 Oct 05. 2020

가나 혼인잔치

은밀한 일

잔치의 주인공이 입장한다. 마음과 정성을 들여 준비한 고운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신부가 하객들이 내는 각종 환호소리 가운데 절제된 미소를 지으며 등장한다. 신부 바로 옆에는 입꼬리가 귀까지 치솟은 신랑이 동행하고 있다. 흥이 잔뜩 들어간 신랑은 어떠한 의지적 노력으로도 다물어지지 않는 입꼬리를 애써 내려 원상태로 복귀시키려 하지만 그 이성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한다. 그의 기쁨은 분명 선하고 흠 없는 것이지만 오늘은 한 여자를 평생 책임질 남자로서 이웃들에게 평가받는 날이기에 그는 조금 위엄 있는 모습으로 보이길 다짐했을 것이다.  


절차를 따라 식이 끝나니 잔치 분위기가 제법 물씬 풍긴다. 기분이 고조된 하객들은 먹고 마시는데 온 정성을 쏟기 시작한다. 포만감이 충만히 밀려옴에 사람 간의 어색함이나 긴장감이 풀어지며 그들의 대화는 고삐 풀린 말처럼 대단히 자유해진다. 그들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가나 지역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뉴스거리나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부재중인 이웃들에 대한 험담이나 그동안 남편이 들어주지 않은 속 얘기를 모두 논하기에 시간이 한참 모자랐다. 그들은 왕래하는 수많은 대화중에도 주어진 그 짧은 틈을 이용해 포도주를 마셨다. 이제 잔치 분위기는 더욱더 최고조를 향한다.  


바로 그때 포도주가 바닥이 난다. 그 당시 혼인잔치에 기쁨의 상징이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현대인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위기 그 이상을 뜻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당황한 이는 마리아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그녀는 최소한 이 혼인잔치 주인공이나 관계자와 아주 무관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마리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는 마침 그 잔치에 동행한 예수였다. 마리아가 급히 예수를 찾아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으니 해결해 주세요.” (요 2:3) 

그때 예수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로 답한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요 2:4) 


한 어머니의 부탁에 대한 아들의 대답 치고는 대단히 파격적이다. 예수의 기대치 못한 냉랭함에 마리아는 적지 않게 당황하지만 그녀는 곧 그 말의 뜻을 이해했을 것이다. 과거에도 마리아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열두 살 되던 예수가 유월절 날 예루살렘에서 귀가하는 길에 실종된 사건 말이다. 사흘 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서 예수를 찾은 마리아가 예수에게 한소리 하자 사춘기도 오지 않은 나이였던 아이 예수가 대담히 받아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십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십니까” (누 2:49) 


예수는 현재 본질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한 여자의 아들이기 이전에 아버지의 일들을, 아버지의 방법으로, 아버지의 때에 순종하고자 이 땅에 성육신 하신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 아들임을 선포하고 있다.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던 마리아는 그 선포의 의미를 온전히는 아니어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 예수에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인들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 2:5) 


마리아의 요구에 냉랭한 대답으로 무안을 주었던 예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혼인잔치에서 맞이한 이 위기를 해결할 조치를 취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사람과의 밀고 당기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예수는 사람의 때에 사람의 요구에 의해 일하지 않는 자신의 성품을 소극적으로 표하고 있다. 이에 예수는 하인들과 은밀하게 일을 시작한다. 제자들은 그의 바로 옆에서 이 일들을 목격하는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는 하인들을 불러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여 그 물을 전부 맛 좋은 포도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명한다. 이 일의 가장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은 바로 동일한 혼인잔치에 있던 이들의 상반된 반응이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요 2:9) 

‘물 떠 온 하인들은 알더라’ (요 2:9) 

‘예수께서 첫 표적을.....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나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2:11) 


혼인잔치를 주최하고 수많은 하객들을 주관한 연회장은 벌어지는 사건과 상황에 대해 그 누구보다 먼저 파악했어야 할 인물이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예수의 ‘은밀한 일’을 보고 듣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처음 내었던 신선한 포도주보다 더 맛 좋은 포도주를 맛보는 일에 참여되었지만 그것의 출처나 의미를 도저히 알지 못했다. 이 현장에 대한 묘사는 연회장의 부족함을 강조하거나 그의 무지함을 탓하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다만, 저자는 예수의 존재를 알고 그가 행하는 일들을 보기 위해서는 죄인 된 사람이 오직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는 핵심 진리에 의미를 두고 있다. 


예수의 ‘은밀한 일’을 내 두 눈으로 보고 가득 느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두발 디딘 땅 위에서 연회장의 위치에 있기보다 예수의 말씀에 순종했던 하인이나 예수의 일을 직접 목격했던 제자의 자리에 견고하고 한결같이 서있기를 원한다. 표적은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키지 못한다. 갈라진 홍해를 두발로 건너고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를 체험했던 백성들의 불순종, 예수 곁에서 표적을 수도 없이 경험했던 베드로의 자기 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능력을 행한 이들을 도저히 모른다며 나무라신 예수 말씀 모두가 그것을 자명히 증명한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임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일과 예수가 은밀히 베푸신 은혜의 현장을 보고 누리는 일은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고 힘 있게 한다. 꼭 강산을 옮기는 일이나, 엘리야의 화려한 영적 전쟁 끝 승리나, 시한부 인생을 받은 사람의 깨끗한 치유를 목격하는 것 같이 보이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일에 제한된 고백이 결코 아니다. 지극히 작은 나의 일상에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때에 따라 맺는 열매를 맛보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내가 오늘 심은 씨앗이 싹을 트는 그 현장에 깨어 머물기 원하고, 성령이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부르심의 소망됨과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사람에게 부음 됨을 날마다 경험하는 것으로 감격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예수의 은밀한 일을 보는 것은 오직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가능할 것이다. 예수는 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온 아들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자 즉 그의 자녀 된 자들만이 아버지의 권한을 위임받으며, 아버지의 기쁜 뜻을 분별하여 그것에 순종할 때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를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미련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기쁜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조급한 사람의 삶에게 늘 요구되는 것은 나의 때가 아닌 그분의 돕는 때를 향해 담대히 인내하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나의 삶을 그분께 드리기 원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은밀한 일들을 삶 깊이 경험하고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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