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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앤비 Dec 08. 2020

우리를 주님의 아들과 딸로 부르신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노예 또는 종에 관한 얘기다. 아수라장인 시장에는 굶주림에 허덕인 상인들과, 그들이 매매하여 이익을 남기게 될 각종 곡식과 가축들이 보기 좋은 모습으로 진열되어 있다. 돼지, 소, 닭, 말과 같은 냄새나는 가축들 사이로 조화롭지 못해 보이는 특별한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데, 이들은 바로 노예다. 피부는 어둡고, 표정에는 저항이나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도 상품에 대한 좋은 인상을 풍기기 위해 주인에 의해 훈련된 연출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을 것이다. 노예들은 어떠한 미동도 만들지 않는다. 불필요한 움직임이나 소리로 인해 고객들의 호감을 잃는다면, 그 대가는 주인이 감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고운 비단옷을 차려입은 어느 귀족 댁 고객님이 지나간다. 발걸음을 멈춘더니 한 노예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우측 검지 손가락을 들어 그 노예의 얼굴을 지목한다. 서로 교환하는 그들의 눈빛에는 가시적인 것 이상의 간극이 존재한다. 자유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을 쥐어 틀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넓고 거대하다. 그는 노예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더니 상인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넨 후 값을 지불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택된 노예는 심히 혼란스럽다. 택함 받았으나 그는 여전히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고, 영접하게 될 새 주인의 어떠함에 따라 그의 여생의 형태가 결정되는 극도의 불안감을 동일하게 안고 살 것이며, 가족을 잃은 후의 상실감을 욱여 잡고 버티어내는 날들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팔려가는 운명에는 어떤 일말의 소망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다르다. 이 종에게는 충만한 자유와 안식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그의 손에 꽉 붙들린, 그분의 계획 안에 붙잡힌, 그리고 그분에게 얽매인 이들은 참으로 복되다. 이것은 세상의 보편적 이치나 현상과는 극명하게 구별되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얽매이는데 어떻게 자유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이에게 사로잡혔는데 어떻게 차오르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뜻과 의지를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을 건네는 이 모순된 논리는, 과연 사람의 불안정한 미래를 견고하게 보장할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거나, 그 존재를 알아도 그분 안에 거하는 참된 안식을 맛본 경험이 전무한 자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얘기일 것이다. 


이러한 진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하나님의 그 본연, 그분의 그분 됨이, 그분 자체가 유일한 진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떠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물론 진리의 본체 되신 그분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것들 또한 진리일 것이나, 지금 논하는 것은 예수 그 자체가 길과 생명과 진리라는 시원적(始原的)인 얘기에 관한 것이다. 그는 사랑과, 선과, 정의와 공의의 본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의 종이 되는 것은 복되다. 유일한 진리 그 본연의 종이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일이며 가장 놀라운 축복이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본체었으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셨다. 하나님은 그런 종 된 예수와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정했다. 신약에 넘어와서 이 아들 됨은 부모의 내리사랑이나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당시 맏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는 상속자의 의미로 쓰였는데, 성경 속에서도 이러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딸보다는 아들에 관한 비유가 월등하게 많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 받은 예수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 전체를 물려받는다.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해 보였던 예수의 믿음 안에서 부름 받은 우리는, 예수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믿음을 믿는 그 믿음 안에 거하는 우리는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그분의 자녀들은 복되다. 그리스도의 종 됨은, 세상 것의 종 되는 것과는 선연하게 다르다. 진리 되신 예수는 그의 종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분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사람의 불순종 가운데에도 인내하시고, 기회를 주시며, 때론 질책하시고, 무지한 모세가 그분의 종이 되는 여정을 무수한 사연을 통해 그려내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리 하시며, 주시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며, 땅 위에서의 형통과 고난을 그분과 사람 모두의 필요에 부합되도록 허락하시고,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을 단번에 이루실 수 있음에도 사업보다 그분의 자녀들과의 관계적 친밀감을 추구하는 분이다. 그는 또한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이해하는 분이고, 형통과 고난으로 빚어진 사람의 갈등 안에서 그분의 의를 성취하는 이며, 스스로의 의에 갇혀 자기중심적인 의견만을 피력하는 몽매한 사람들을 포기 안 하고 은혜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노예를 자신의 소유물이나 상품으로 삼아 일평생을 부리는 이들의 손 대신, 예수의 검지 손가락으로 지목당한 우리의 삶은 복되다. 예수의 피로 값을 치러 그의 종 된 사람의 하루는 소중하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의 크고 작은 일상은 안전하다. 예수에게 붙들린 사람의 삶은 기쁨으로 내면이 충일하다. 지금 이 시간 그러하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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