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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정 May 26. 2024

일기일회一基一會

따르릉, 모니터에서 요란한 알람이 울린다. 새로운 방문자의 입장을 알리는 신호음이다. 화들짝 의식이 명료해지고 심박수가 상승한다. 화면 중앙에 문구 하나가 떠오른다. “상담이 연결되었습니다”. 나의 모니터와 방문자의 모니터, 두 개의 창문이 서로를 향해 열리는 순간이다.

  

초보상담자로서 내가 첫발을 내디딘 이곳은 '실시간 비대면 문자상담'을 제공하는 공익기관이다. 상담자들은 각자의 모니터 앞에서 대기하고 인터넷으로 접속한 내담자가 컴퓨터시스템에 의해 무작위로 연결된다. 이곳의 특징은 익명성과 일회성이며 개인정보 노출을 꺼리는 이들, 정보와 비용이 부족한 청소년, 힘든 마음을 즉각적으로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이 주로 찾아온다. 위기 상황에 처한 절박한 이들 또한 드물지 않게 만난다.


텅 빈 대기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병원 응급실 풍경이 떠오른다. 부엌칼에 손가락을 베인 사람부터 뼈가 부러지거나 화상을 입은 사람, 삶의 끈을 막 놓으려는 위급환자에 이르기까지, 예고 없이 유리문을 밀어 제치며 들어오는 광경 말이다.


나의 방문객들도 귀 따가운 벨소리를 울리며 불시에 찾아온다. 오늘 친구와 싸운 초, 중등생부터 삶을 놓으려고 시도하는 사람까지. 이곳에서 고통의 경중은 타인과 비교되지 않는다. 심리적 고통은 느끼는 자의 내면에 있고 그 무게는 자신에 의해 매겨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50분, 시스템에 의해 익명과 무작위로 연결되는  이곳에서   단 한 번 만남의 기회가 주어진다.


첫인사 문구를 입력하고 응답을 기다린다. 커서가 깜빡인다, 맥박이 뛰듯. 미지의 방문자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찡그린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까. 스마트폰 불빛이 반사된 뺨 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는 건 아닐까. 자판을 두드리는 손목에 기다란 자해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아주 가끔, 난간에 위태롭게 몸을 기댄 모습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익명과 비대면이라는 특성은 많은 불편과 한계를 야기한다. 반면에 깊은 속내를 털어놓게 한다. 타인이 규정한 자기 모습에서 탈피하게 하는 위력 또한 발휘한다.  상담자 역시 직위와 연령의 계단에서 내려와 동등한 평지에서 내담자를 만난다.


“당신의 나이와 성별, 불리고 싶은 이름을 알려주면 저에게 도움이 됩니다”라는 두 번째 문구를 입력한다. 원하는 이름을 지어 자신을 재설정해보라는 권유가 내포되어 있다. 당신을 돕고자 하는 나를 도와달라는 부탁도 들어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에서는 누구도 우위에 서지 않게 된다.

 

말 그대로 상담자를 도와주는 방문자들이 있다. 누적상담 횟수가 많아 이곳만의 특성을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 통찰에 다다른 내담자들이다. 그들은 빠르게 자기를 소개하고 도움받고자 하는 부분을 효율적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문제해결과 성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상담자와 협업하는 그들의 자세를 통해 상담자는 도리어 배우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을 ‘프로내담자’라고 지칭하곤 한다.      


유일한 소통 수단인 문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문자를 둘러싼 느낌표, 쉼표, 말줄임표, 타이핑 속도까지도 중요한 탐색 대상이 된다.  말줄임표 하나에 그토록 많은 표정이 들어있는 줄 몰랐다. 그것은 때로 머뭇거림이고 긍정이거나 강한 부정이다. 폭포처럼 화면 위로 쏟아져 내리는 분노와 억울함, 점점 가늘어져 마침내 말라버리는 물줄기 같은 외로움과 소진한 자의 우울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침묵 또한 강력한 발화(發話) 방식임을 이곳에서 배웠다. 시종일관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방문자들이 있다. 그들은 깜빡이는 커서로만 존재하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이때의 어둠이 내게는 가장 무겁고 아프다. 고양이의 눈인사처럼처럼 커서에 맞춰 천천히 눈을 깜빡여 본다. 대답 없는 질문들을 수면에 간헐적으로 던져 넣으며 그들을 가둔 통증과 불안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 묵묵한 마음속에 머물기로 한다. 침묵 속에 흐르는 통증과 불안을 함께 견디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버티는 힘은 믿음에서 나온다.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은 이미 답을 자기 안에 담고 온다는 것. 충분히 들어주고 마음을 알아준다면 사람은 스스로 길을 찾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백번쯤 배웠으나 진실로 믿는 것이 여전히 어렵다.  


"괜찮아요, 원한다면 주어진 시간 동안 당신과 함께 여기 머무를게요." 혼잣말처럼 입력한 후 한참 만에 모니터에 점 하나, 몇 글자의 응답이 떠오를 때가 있다. 눈물방울 같고 기적 같은 생존신호. 그때 내 안도의 한숨 끝에는 눈물이 배어 있다.


긴 시간 쌓아온 이론, 액자에 끼워 걸어놓은 자격증이 무력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그럴 때면 한여름 태양 아래 알몸으로 선 기분이다. 잘 차려입은 외피(外皮) 보다 훨씬 중요해지는 것은 ‘나라는 인간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질문. 그 대답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관점과 가치관의 한계는 대상을 왜곡시킬 수 있고  나는 자신과 세상을 이해한 딱 그만큼만 상대를 도울 수 있다. 수시로 나의 렌즈를 점검하고 매일 닦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마디 질문을 위해 매번 지혜와 경험의 총합이 필요하다.


나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나름의 방책들을 고안하게 되었다. 정보검색을 위한 또 하나의 노트북, 원하는 주제를 즉시 펼쳐 볼 수 있도록 색인지가 갈피갈피 끼워진 이론서, 비상연락망, 자살·자해·폭력 대처매뉴얼, 유용한 질문목록집... 초보 무사의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한 무기들이 주렁주렁 늘어간다.


크고 작은 포스트잇들이 책상 앞 벽을 메워가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동시에 쉽게 잊어버리는 원칙들을 메모해 놓았다. 막다른 길에서 고개를 들면 그 쨍한 형광색 표지판들이 알려준다. "기본으로 돌아가라!" 벽 가득한 포스트잇들 중앙에는 A4  한 장이 자리한다. 깊은 무력감에 빠져 마음을 앓고 있던 때에 만난 글 한편이 거기 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방문객> 전문   


그녀는 나의 다섯 번째 내담자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시련 속에서  발버둥 치는 10대 소녀였다. 50분 동안 나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숨죽여 울었다. 내담자의 정서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침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선량하고 기댈  없는 그녀의 인생에 내 울음소리를  얹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들어주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음을 갈아 넣을수록 쉽게 소진하게 된다." 무수히 들었던 충고가 희미해졌다. 한 달이 넘도록  아침에 눈뜰 때, 밤에 잠들기 전 그녀를 기억하며 기도했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 살고 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어서 허공에 기도를 올려 보냈다. 그녀를 도울만한 현실적 정보들을 수집했다. 그녀가 계속 상담받으러 오기를, 그래서 어느 날에는 꼭 다시 나와 연결되어서 내가 그녀를 제대로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와 나는 다시 연결되지 못했다.


오랜 공부에도 여전히 나는 까마득히 멀었다. 내가 도대체 무얼 하려는 사람인지 가늠되지 않아 자괴감으로 넘어졌다. 둘러보니 건재한 스승과 동료들이 보였다. 무엇이 저들을 계속 걷게 하는가. 이런 나는 왜 계속 걸으려 하는가. 그러다 만난 시 속의 문장들이 다시 나를 눈 뜨게 했다. “마음을 알아주고 한 번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라는 상담의 기본원리를 다시 새길 수 있었다.

 

지금 나의 최대치는 '당신을 환대하는 것'까지가 전부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한 당신. 그런 당신을 온 마음으로 맞아주는 일. 그저 후~~ 부드럽게 불어주고 가는 바람만 될 수 있다면 마음 앓고 넘어져 가면서 나 또한 계속 갈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만남은 알고 보면 일기일회, 단 한 번의 기회이다. 자기 삶의 시간 전체를 가지고 오는 방문객들은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세상 전체를 가지고 온다. 현실은 느끼고 인식하고 해석하는 바에 따라 모두 다르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씩, 자신만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방문객의 우주와 나의 우주는  <지금, 여기>에서 단 한번 접촉한다. 연결된 두 새의 창 너머로 서로를 들여다볼 때 공감이라는 이름의 교집합이 만들어지고 변화가 일어난다. 한 번 만난 후에는 별리(別離)하는 아쉬운 운명이지만  함께 만들어낸 공감과 변화는 각자의 세계에 남겨지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서로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누가 누구를 돕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우리가 돕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일 것이다.


요란한 알람이 울린다. 또 하나의 우주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 <계간 에세이문학> 2023 여름호, 2022년 등단작가 13인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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