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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정 Mar 14. 2022

흐르거나,  흐르지 않거나

보이는 것들이 제대로 흐르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대신 흐른다.


삶은 흐르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 사이의 변주곡이다.


세상사는 순리로 흐르거나 역리로 거스르며 순환하고, 

그 둘의 엇갈림은 천변만화와 우여곡절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가운데 굳건히 서서, 모든 흐름을 감당해내는 것들이 있다. 

견고한 믿음, 기약 없는 기다림 같은 것들이다.


흘러야 할 때가 있고 멈추어야 할 때가 있다.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 적들이 거대한 힘으로 세상을 덮친 지 십수 개월이 지났다. 

희망적인 소식에 설레기도 하지만 기다림의 끝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무심한 일상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나는 자주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 시절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럴 때면, 물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떤 하루의 일을 떠올린다.



여기 한순간도 쉬지 않는 

어느 겨울의 개울물이 있다. 

그리고 물을 응시하며 

꼼짝 않고 쪼그려 앉은 꼬마 아이가 있다. 

물은 흐르고 나는 기다렸다. 

또렷하게 남아 있는 첫 기억, 

말하자면 삶에 대한 내 첫인상이다.





새해 첫날이었다. 

“잘 가지고 있거라.” 엄마가 종이돈 한 장을 손에 쥐어주었다. 

엄마는 동생을 낳으러 병원에 간다고 했다. 

오백 원 지폐 속 날아갈 듯 활짝 펼쳐진 기와지붕을 들여다보노라니 

집안 재산 물려받아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천 기저귀, 배내옷으로 불룩한 가방을 들고 엄마가 집을 나섰다. 

“외갓집서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 엄중한 명령을 남기고.


엄마는 무척 비장했었나 보다. 

당신 딸이 기다리는 일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잊어버린 걸 보면. 

두꺼운 외투를 여며 입고서 오래지 않아 나는 외갓집을 향해 대문을 나섰다. 

가족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한평생 오간 익숙한 길, 경로가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사준 빨간 구두가 똑똑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새것의 자태가 도도한 구두가 나를 위엄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한 손에 꼭 쥔 오백 원으로 위상이 더욱 드높아진 터, 마음이 몹시 흡족했다. 

퐁퐁 다리가 멀리 다가왔다. 이 여정의 제1난제를 맞닥뜨릴 참이었다.

다리라는 이름조차 황송한, 개울 위 턱 걸쳐진 넓고 긴 한 장의 철판은, 불안정하기도 하거니와 커다란 둥근 구멍들이 ‘퐁퐁’ 뚫려 있어서 동네 꼬마들이 자주 발을 끼거나 신발을 빠뜨리곤 했다. 

처음으로 혼자 건너는 다리는 여느 때와 달리 길고 울퉁불퉁했다. 

며칠 새 구멍들이 커진 듯 보였고, 출렁임은 왜 이리 요란한지, 왈칵 무섬증이 들었다.


신경을 온통 발에 모으고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길고 긴 한걸음, 한 걸음. ‘거의 다 왔다.’ 살짝 마음을 놓았을 때였다. 

갑자기 퐁퐁 구멍이 구두 한 짝을 꽉 물더니 놔주지 않았다. 

살살 발을 비틀어 빼내려는데 현기증과 함께 몸의 힘이 스르륵 풀렸다. 

순간 무언가가 퐁퐁 구멍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것은, 빨간 구두 한 짝이 아니라 오백 원 지폐였다! 

얻어맞은 풍선처럼 나는 풀썩 주저앉았다. 

오백 원을 획득한 물이 비웃으며 남실남실 어깨를 들썩였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찰나에 저만치 멀어지는 꼬깃꼬깃한 지폐 한 장. 

바라볼 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 머릿속이 팽팽 어지러웠다. 

가지고 있는 지식을 모두 동원해 궁리한 끝에 드디어 완벽한 해석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매일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것처럼, 뭐든지 시간 되면 돌아올 거야.’ 

‘저 물도 실컷 돌고 나면 다시 와서 오백 원을 돌려줄 거야’ 

놀라 끊어진 마음을 수습해 단단히 묶었다. 

다리 위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

물이 겨울 볕에 반짝거렸다. 

쪼록쪼록 속삭이고, 살랑살랑 꼬리 치며 해살거린다. 무에 그리 바쁜지 뒤에서 밀고 앞에서는 도망가며 한 방향으로 가고 또 가기만 한다. 

바라보았다. 기다렸다. 배고픈 것, 추운 것, 어쩌면 숨 쉬는 것까지 잊어버렸다. 

물은 언제 돌아올까, 무슨 구경을 얼마나 하려고. 

얼마나 먼 곳으로 마실을 다녀오려나. 

물이 한 구비 흐를 때 한 번씩 생각했다.




수없는 예행연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물이 오백 원을 싣고 오면, 저어기쯤에서 손을 뻗어야지. 그리고 잽싸게 잡아채야지.’ 

해가 갸웃해질 무렵 교복 차림의 막내 외삼촌이 놀란 얼굴로 나타났다. 

‘돌아올 때까지’로 다짐했던 내 기다림은 손목 잡혀 끌려가는 것으로 강제 종료되고 말았다. 

나는 벽을 바라보고 누워 곱씹기 시작했다.


‘좀 더 기다렸다면 돌아오는 물을 만났을 텐데.’ 

거듭 자책했다. 

그러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물은 원래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작은 세상이 쿵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마음속에 꾹꾹 홈을 파서 문장 하나를 새겼다. 


‘내.가.태.어.난.이.세.상.에.서.물.은.흘.러.가.버.리.는.것.한.번.가.져.간.것.은.다.시.돌.려.주.지.않.는.다.’




여전히, 흐르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 사이에서 무수히 흔들리며 살아간다. 

시선 돌리는 어디에서나 흐르는 물을 발견한다. 

물은 아차! 한눈파는 사이 손가락 새 주룩 새어나간 소중한 것들을 냉큼 받아 가버리더라. 

그에게는 가져간 것을 돌려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대개의 나는 무용(無用)한 기다림 대신 흐르는 물을 선택한다. 

두고 온 것, 놓쳐버린 것은 미련스레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소중한 것, 연연할 것을 만들지 않으며 한 방향으로 앞만 보며 가는, 삶은 내게 흐르는 것이다.


그런데 기억 모퉁이 하나 돌아가면, 하염없이 쪼그려 앉은 어린 날의 내가 있다. 

그날 내 기다림이 순결했던 것은 ‘물이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티끌 없는 믿음 덕분이리라.



긴 일단정지 신호 앞에 세상 전부가 함께 서 있다. 

종을 든 술래가 나타나 온 세상에 땡! 을 울려주는 순간까지 조금 더 얼음 기둥으로 서 있으라 한다. 

그런데 몸이 멀어질수록 세상의 생각, 마음들은 더욱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벽 너머 서로의 사정을 살피고 궁리해야 전체가 함께 살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까닭이 아닐까.


자유로웠던 시절엔 서로의 다름에 매혹되어 새로운 다름을 찾아 세상을 누볐다. 

지금, 각자 방에 갇힌 사람들은 서로의 다르지 않음을 찾아내려 애쓴다. 

덕분에 혼자라도 혼자가 아닐 수 있다. 

격리되어 역설적으로 서로 더 닮아가는 사람들.


연대한 마음들이 거대한 원으로 하나의 강강술래를 돌고 있다. 

동그라미는 점점 커져간다. 

보이는 것들이 제대로 흐르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대신 흐른다.


우리는 함께 

무용(無用)하지 않은 기다림의 자세를 배우고 있다. 그리운 시절이 돌아오는 날 나는, 

오래된 나의 각인 옆에 새겨 넣으려 한다. 

‘오래 기다려보면 알 수 있다. 

다시 돌아오는 물결도 있다는 것을.’


머지않아 종소리가 울리고 

무심한 흐름이 다시 시작되면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 곁에서 함께 흐르는 새로운 형태의 연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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