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목격한, 스타트업이 개같은 이유
지금 하는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스타트업과 의도치않게 얽혔던 적이 있다. 억대 투자 어쩌구 하는 수식어가 퍽 졸부스러운 그런 회사였다. 사명을 밝히며 "똥 피해!"라고 외치고 싶지만 소송을 당할 수 있기에 회사명을 밝힐 수는 없다. 매우 아쉽다.
나름 역사가 있는 탄탄한 중소기업만 다녀봐서 스타트업이 다 그런 건지 나는 잘 모른다. 잘 모르는 입장에서 이들을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들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남이 해서 돈 벌었다는 모든 일에 손을 대는 것 같았다. 온라인 판매 플랫폼부터 콘텐츠 제작까지, 팀이 십수 개다. 기적의 부서 증식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그럴싸해 보였던 이 회사의 속을 들여다보고 경악했던 몇 가지 포인트를 적어보고자 한다. 힌트 삼아 제발 당장 피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구직자를 위한 재난경보문자 정도로 봐주길 바란다.
개같은 이유 하나. 야근의 생활화(수당? 개코나)
대부분이 20대, 그리고 30대 나이의 직원으로 구성된 이 회사는 강남구 한복판 건물에 세 들어있다. 복장 기준도 따로 없어 여기가 학원인지, 회사인지 의문이 드는 풍경이다. 뭘 입어도 터치하지 않고, 간식 창고에는 늘 음료와 과자가 가득하다. 그러니까, 보기에는 젊고 풍족하고 잘 먹이는 회사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당황스럽다. 임원들은 정시 퇴근을 하는 법이 없는데 그것이야 회사를 경영하는 결정권자들이니 주인의식이다 쳐도, 어린 직원들까지 정시 퇴근을 하는 데 눈치를 봐야 한다. 이런 광경이 실로 오랜만이라 지금이 2023년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의자에 오래 앉아있으면 뭐라도 답이 나오겠지'라니. 게다가 지난해에는 KPI를 몇개월 연속 달성하지 못했다면서 정시 퇴근 금지령이 떨어졌단다.
왓더....
참을 수 없었다. 성과만 나오면, 내가 해야 할 일만 문제 없이 해낸다면 굳이 사무실에 출근을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무슨 고3 수험생도 아니고, 21세기에 지구력있게 의자에 누가 오래 붙어있는지가 능력의 척도인 회사라니.
간식이 가득한 이유가 있었다. 퇴근 늦을테니 단 거라도 입에 넣으면서 뇌를 굴리라는 뜻이었다. 아, 당연히 연장근무 수당은 없다.
개같은 이유 둘. '님'
수평적 관계를 지향한다며 '님' 호칭을 붙인다. 주임, 대리, 과장, 차장 같은 직급을 부르다 '님'을 부르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영어 이름 안 붙이는 게 어디냐 생각한다면 적응하기에 그리 큰 장벽은 아니었다.
문제는 호칭만 '님'이지 이곳은 젊은 꼰대와 능력보단 평등을 외치는 눈치 없는 MZ가 섞인 괴랄한 조직이라는 것. 실제 꼰대인 내가 문제 삼는 건 후자다. 직책을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상관 혹은 경력자와 같은 위치라고 생각하는 20대의 개념없음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짬에 따라 업무가 다르고, 책임의 경중이 다르고, 무엇보다 능력치가 다르다. 그러니까 '님'이라 부를 뿐 지위는 존재하는 것인데, 그걸 '평등'으로 퉁치려는 멍청함이 소름끼쳤다. 이런 애들에게는 직책을 불러 서열을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이지만, 기업 문화를 바꿀 수 없으니 저런 아이를 어거지로 끌고 가야 하는 건 꼰대인 걸 어디 가서 함부로 티도 못내는 불쌍한 젊은 꼰대들이다.
이게 '요즘 애들'의 문제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호칭을 통일한다고 모두가 평등할 것이라는 모자란 생각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것은 매우 놀라웠다. 모자라다는 말 말고 다른 어울리는 말을 못 찾겠다. 업무 숙련도도, 수행 속도도, 사회적 지위도 다른데 서로 이름 부른다고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냥 눈치가 없고 센스가 없는 모자란 애라는 방증이다. 이재용 회장을 '재용님'이라고 부른다고 회장이 아닌 게 아닌데.
'님' 호칭이 개같은 또 다른 이유, 대기업 혹은 외국계를 동경해 착용한 짝퉁 명품 같은 겉멋 요소라는 점이다.
겨우 건물 두 층 쓰는 회사인 주제에 온갖 구색을 다 갖추려 한다. 사내 무슨무슨 이벤트며, 뭔놈의 회식비 일주일에 몇만원 지원, 앞서 말한 이 회사 최대 강점인 간식 무한 제공, '눈에 보이는 소소한 복지' 따위에 관심이 많다. 진정한 복지라 할 수 있는 전세자금을 지원이나 출산 지원금, 등록금 지원 따위는 들은 바가 없다. 원래 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이길 바란다. 일단 나는 듣도보도 못했다.
카톡이나 텔레그램으로 소통해도 충분한데 쓰잘데기 없이 사내 메신저를 도입해 직원들에게 괜한 귀찮음을 선사하고, 퇴사할 때는 퇴사 인터뷰 같은 걸 진행한다. 어차피 개선도 안 할 거면서. 퇴사자가 매우 많고, 잡플래닛에서 악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참, 그렇게 큰 회사 문화 좋아하면서 식대도, 교통비도, 통신비도 지원되지 않는다. 모든 걸 '간식 무한 제공'으로 퉁치는 중이다. 한마디 겉멋이고, '님'이뿡이다.
개같은 이유 셋.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앞서 언급했듯, 잡플래닛에서 이 회사 이름을 검색하면 365일 구직 중이다. 구직 활동 중인 이들이라면 알 거다. 365일 사람을 뽑는 회사는 제일 먼저 걸러야 한다는 것을. 내가 얽힌 이 회사가 그렇다. 모든 구직 플랫폼에서 열렬하게 사람을 구하고 있다. 안 뽑히니까.
결국 이런 회사는 실업급여 증빙용 이력서나 넣는 그렇고 그런 기업이 되고 만다.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 있는 회사라 사람은 쉽게 드나든다. 퇴사율? 당연히 높다. 이 회사와 얽힌 지 수개월, 길게는 3개월 만에, 짧게는 하루 만에 퇴사하는 사람을 봤다. 이 회사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찍먹할 수 있는 흔템이라는 의미다. 물론 찍먹의 결과는 거지같다. 해리포터 젤리빈에 들어있는 귀지맛 젤리 정도쯤 될까.
찍먹하고 도망가는 이유는 명료하다. 이 회사는 쎄하다. 다닥다닥 붙은 수십 개의 책상에 빼곡히 앉은 직원들, 파티션따위는 없어 옆자리가 훤히 보이지만 서로 대화는 나누지 않는다. 이 회사에서 연장자에 속하는 내 눈에는 한여름에 깜빡하고 컬리에서 주문한 밀키트를 바깥에 방치해 썩어버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느낌이다. 신선하던 아이들은 이내 시들해지고, 부패해간다. 도망은 지능 순인 회사다.
실제 이 회사에서 일하는 몇몇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봤다. 오래 다닐 생각은 애초에 없다. 이력서에 쓸 정도의 경력만 차면 이직하겠다는 심산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적어도 내가 이야기를 나눈 젊은이들 중에는 이 거지같은 스타트업에 애사심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는 게.
개같은 이유 넷. 뒷일따위.
이 회사와 얽힌 뒤, 회사는 내가 업계 경험자라는 이유로 각종 컨택 포인트를 요구해왔다. 이미 엮여버린 이상 하는 협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내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을 울며 겨자먹기로 나눠줬다. 그리고 내가 나눈 나의 것을 가지고 좋은 성과를 내기를 기대했다. 연락만 되면 뭐든 해낼 것처럼 말했으니까.
결과는 실패. 괜히 연락만 취하고 나만 민망해졌다. 나에게 직접 시키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쳐도 나는 본의아니게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됐다. 너무나 어이없게도 실패의 이유는 이 스타트업의 더러운 과거 때문이었다. 회사가 특정될 수 있기에 이 부분은 생략하겠지만, 굉장히 지저분한 과거였다. 미래에 누구와 어떻게 만날지 모르고 돈 된다니 달려들었던 과거는 결국 회사의 앞길에 똥물을 투척하고 있다.
"거기 뭐하는 데예요?" "이상한 회사는 아니죠?" "어디 회사 OO님 포지션 찾는다는데 연결해 드릴까요?"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탈출은 지능순이니, 나는 일단 퇴사라는 탈출을 선택했다.
그나마 나는 '청춘'과는 거리가 먼 나이라 내 시간이 그리 아깝지 않았다. 몇개월쯤이야 내 인생에서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걸 아니까. 이 또한 지나갈 거라는 막연한 믿음과 현실 도피 능력은 연륜이 가져다 준 미덕이다.
개같은 이유 마지막. 그냥 스타트업.
모든 스타트업을 욕하자는 건 아니다. 분명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사명감,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돈도 벌겠다는 패기, 아이디어 하나로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포부 등 나름의 뚜렷한 이유를 가진 책임감 있고 진짜 멋이 있는 젊은 스타트업 종사자들은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존재이고, 대한민국을 이끄는 힘이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된 이 스타트업, 이미 남이 해놓은 걸 짜깁기하고, 짧게짧게 거쳐가는 청춘을 조각모음해 갈아넣는 이 회사에 건강한 미래는 없어 보였다. 수뇌부들조차 짧게 치고 빠지겠다는 생각으로 호시탐탐 눈 먼 돈 투자 받을 생각만 가득한, '반석 위의 집'과는 거리가 먼 이익집단이다.
대기업 흉내내면서 스타트업의 온갖 패악을 속속들이 다 갖춘 유사 스타트업을 조심하시라. 특히 20대인 당신, 꼼꼼하게 알아보고 잘 거르시라. 당신의 1분 1초는 중년을 향해 가는 30대인 나의 1분 1초보다 훨씬 소중하고 값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