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하인
호른과 같은 한 남자의 죽음만으로도 이 도시를 성경의 고모라처럼 소멸시키기에 족할 것이다.
p6
동둑의 작은 도시 굴덴베르크.
그해 여름의 끝, 이 도시의 숲에서 호른이라는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총 8장章으로 구성된 소설은 매 장章마다 죽은 호른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망자는 끊임없이 기억해내라고 다그친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몇 페이지가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호른은 누구인가?"
호른은 죽은 날로부터 4~5년 전에 굴덴베르크로 왔다. 열네 살 아들을 키우며 상점을 운영하는 게르트루데 피슈링거의 집 거실에 셋방을 얻어 살았고, 도시의 성에 있는 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었다. 라이프치히 출신으로 지식인이었던 그가 시골 동네까지 떠밀려 온 까닭은 따로 있었고, 이 도시에서 뜻밖의 인물과 재회한다.
소설은 마치 의문의 사나이 호른의 죽음의 원인을 추척하는듯 하지만 냉전 당시 동독인들의 삶을 다섯 명의 화자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슈포데크 박사의 강제된 삶, 토마스의 억압된 일상은 사회주의 체제, 그것도 파시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말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유를 향한 토마스의 열망, 그리고 정작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에는 너무 늙어버린데다 순종과 굴욕적인 보상에 익숙해져버린 슈포데크 박사는 당시 체제의 시민들을 대표한다.
또한 유린했던 수많은 여성과 사생아들의 불행에는 아랑곳 없이 천수를 부유하게 누리고 화려한 장례식으로 삶의 마침표를 찍었으나 정작 제 자식들한테 외면당한 뵈고는 시민을 억압하는 절대 권력으로, 슈포데크가 영원히 가질 수 없었던 크리스티네는 자유로 읽힌다. 또한 열두 살 소년 토마스의 울부짖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다.
이러한 장치는 일평생 폭력적인 남편과 아들에게 시달려왔던 게르트루데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남편, 아들, 호른이 떠나고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게르트루데가 느낀 것은 외로움이나 상실감이 아닌 다시 살아나는 내면의 힘과 욕망이었다.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난 그때야말로 그녀는 비로소 진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 속, 집시와 장애에 대한 혐오, 특히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집시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은 당시의 체제뿐 아니라 우리의 모순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더불어 6장에서 크루슈가츠와 슈포데크의 대화, 그리고 박물관에서의 목요 모임 직후 네 사람(슈포데크, 크루슈가츠, 이레네, 호른)의 대화는 당시 체제에 미래가 없음을 똥 무더기에 빗대면서 한편으로는 '이 도시'로 대변하는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크루슈가츠가 아내 이레네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내야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다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소설은 호른을 통해 죽은 자들을 기억해야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물리적인 죽음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권리조차 빼앗긴 채 순종을 강요당하며 학문과 사고가 사장死藏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모든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특히 8장에서의 호른과 슈포데크의 기억에 대한 견해 차이를 보이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호른의 죽음 이후 화자들의 변함없는 일상의 모습은 앞선 대화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화자 중에서 가장 물음표를 찍게 되는 인물은 마를레네다. 지적장애를 안고 있는 이 여성은 어머니의 희생으로 살아남았으나 전쟁 이후에도 아버지에 의해 은둔 생활을 한다. 가만히 있으면 존재조차 의식되지 않고, 다른 네 명의 화자들에게 전혀 회자되지 않는 그녀가 화자로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도 소설의 전체 맥락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아주 적은 분량으로.
이 소설에는 폭력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자와 속수무책으로 순종하는 자가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러한 구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달하려는 바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냉전 시대에 당시 체제 안에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도 꽤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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