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기업, 근무지 청주, 자세한 내용은 채용홈페이지 참조.
에스기업 이직역사 시작은 기업명 그리고 청주라는 두 가지 정보였다.
직장인 5년 차, 신혼 6개월 차. 회사에서는 나름 인정받고 있었고, 노원에 마련한 신혼집은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에 손색없었다.
폼나게 사표를 던지는 꿈 정도야 모든 직장인의 꿈이니 뒤로한다 치더라도, 이직이 나에게 꼭 필요한 필요조건은 아니었다. ‘나 혼자 산다 ‘에서 ’ 아빠 어디 가 ‘로 내 조건을 바꿀 첫 단추는 꿰었으니 말이다.
우연이었다. 한 번도 관심 갖지 않았던 직무와 지역 그리고 회사까지도.
누군가가 말했던 운명처럼 아니 조물주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어를 짜놓은 코드처럼 나는 아내와 한 마디 상의 없이 이력서를 써내려 갔다.
그로부터 1 달 후, 코로나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생소한 메일 하나가 도착했고, 면접을 봤고, 합격했다.
“나 사실할 말이 있어, 나 00 기업 썼는데, 붙었어 다음 주에 면접 보러 오래”
“진짜? 붙으면 갈 거야? 아니다. 붙고 나서 생각하자”
인생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드라마라고 하지만 이렇게나 급작스러울 줄이야. 서울토박이 깍쟁이 아내는 합격통보와 함께 신체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전화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주말에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며, 일 때문에 매일 늦게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며.
지방은 마치 피터팬이 꿈꾸던 원더랜드처럼 꿈과 희망이 가득한 곳이었다. 워라밸이 보장될 것이며, 직장과 집은 가까울 것이며 생활비는 저렴할 것이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살던 처갓집과 떨어지게 됐지만, 와이프는 그것 또한 새롭다면 싱긋 웃어 보였다.
물론 그 꿈이 무너지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내가 다니던 직장을 모두 정리하기 전 아내는 먼저 일을 그만두고는 집을 알아보러 청주를 오갔다.
청주아이씨를 빠져나와 눈을 사로잡았던 고층 아파트는 청주를 고급스러운 동네로 만들었지만, 민낯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다. 쓰러져가는 아파트, 고민 없이 설계된 도시계획 그리고 즐비한 슬럼가까지.
아내는 청주를 오가면 오갈수록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갔다.
사실 서울 외곽에 살던 우리에게도 그리 큰 예산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지방에 내려온다면 최고의 지역 또는 회사 근처에 자리 잡을 것이라 막연한 기대를 해왔다. 그러나 막상 발품을 팔아보니, 지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살고 있었고, 우리는 현실감각이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퇴직금으로 조금 쥔 현금이 그나마의 자존심을 지켜줄 뿐이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신혼집 보다 조금 덜 늙어버린 아파트와 아주 작게 커진 평수였다고 할까.
지방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희망과 불만이 공존하는 또 다른 제2의 삶이라고 해야 조금 더 정확할까. 사실 나 자신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 불만을 가중시켰다. 중심에서 살아냈던 것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는 세간의 인식. 청주라고 10번씩이고 얘기해도 시골 내려간다고 했던 많은 사람들. 만나자고 하면서 하는 대답이라고는 “서울 언제 올라오냐”라는 당연한 대화.
나는 그저 살아가는 장소를 바꿨을 뿐인데, 내 삶이 주변인으로 밀려나버렸다.
그것이 바로 내 이직의 결과였다.
하루, 이틀 “아 다시 가고 싶다” “서울 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농담처럼 나는 아내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말을 건넸다.
“우리 다시 서울로 돌아갈까?”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꽤나 현실적이었다.
“지금 돈으로 서울 어디도 못 가, 요즘 집값 올라서”
티브이를 켜면 ‘성수동 핫플레이스’와 같은 서울 지역명이 자랑스럽게 아무런 설명 없이 흘러나왔다. 지역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지역을 내려오고 나서야 ’ 서울공화국‘이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방송에서 ’ 서원구‘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사람 하나 없어서 ’ 청주시 서원구‘라고 말해야 할 텐데 말이다.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큰 축복이 ’ 망각‘이라고 했던가. 힘들었던 기억은 사라졌고 일부는 미화되기까지 했다. 야근과 술자리에 시달렸던 그 순간이 열정적으로 살았던 과거가 됐다. 전화로 스트레스받으며 싸웠던 그 순간은 능력 있었던 시간으로 포장됐다.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했다.
그 사이 파고든 것은 고된 회사생활이었다. 처음으로 사무실에 하루종일 앉아있는 생활은 고문에 가까웠다. 하루는 종각, 하루는 역삼, 하루는 판교를 누비며 온갖 커피숍을 누비던 지난 ’ 자유의 시간‘은 이제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카드키를 찍는 순간 내가 언제 출근했는지 기록이 됐고, 회사 시스템은 내가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는지 모두 체크하고 있었다. 내가 일주일 동안 몇 시간을 일했는지까지도.
공장으로 둘러싸인 사무실 안에서 ‘스타벅스’가 절실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은 실로 대단했다.
이직 통지서를 받기 단 하루 전만 하더라도 허구한 날 일을 그만두겠다고 천명했고, 중소기업이라도 좋으니 일반직으로 옮겼으면 했는데, 사람은 참으로 간사했다.
대기업으로 이직해도 만족할 수 없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처럼 더 좋은 학벌을 갖고 싶었고,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처럼 더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싶었다.
공채로 들어온 사람보다 연봉이 조금 적은가 많은가를 묻는 ’ 블라인드‘ 글을 몇 번이고 눌렀는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직 후 1년쯤 된 어느 날까지도 가볍디 가벼운 입을 몇 번이고 때리고, 내 지나온 날을 후회했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시간, 내가 만들어온 현실이기에. 바뀌어 버린다면 그것이야 말로 신이 내 인생을 갖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닐까.
점점 내 과거와는 멀어지고 있었고, 나의 새로운 미래가 아니 그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전히 지방부적응자로 살아가던 어느 날, 새로운 생명이 가정에 찾아왔다. 회사는 여전히 정신없었고, 적응은 어려웠지만 과거에 대한 집착의 끈은 서서히 끊어지고 있었다.
신혼생활의 달콤함을 막고 있던 코로나19 시대는 임심과 출산시대로 바뀌었고, 하루하루 육아에 지친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 적응‘해버리고 있었다. 지방의 삶에.
어느덧 이직 5년 차, 지방생활 또한 5년 차가 됐다. 여전히 친구들은 ’ 서울 언제 오냐 ‘고 묻고, ’ 서울로 돌아와야지 ‘라고 조언한다. 지방에서 썩으면 안 되잖아라고 조금 더 강하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직장생활은 어떠냐는 말에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라고 건조하게 대답할 뿐이다.
그런데, 나는 참 많이도 바뀌었다. 서울병은 조금 치료된 듯하다. 동요하지 않게 됐으니까. 그저 씩 하고 웃음을 지을 뿐이다.
미화됐던 과거는 이제 조금은 희미해지고 있다. 광화문과 여의도를 누비던 기억과 함께 핸드폰에 고개를 처박고 쏟아지는 메시지를 처리하던 기억이 공존한다. 한가롭게 서울숲을 거닐거나, 삼청동을 걸었던 기억과 함께 뻥 뚫린 하늘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낸 기억이 함께한다.
현실에 순응에 버린다고 누군가는 얘기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현실이 썩 나쁘지 않다. 나는 여전히 출근하고, 퇴근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첫째 아이가 뛰어나와 ”아빠아~“하고 외치고 아내는 ”오빠 수고했어 “라고 말한다.
물론 그 아내에 손에는 둘째가 들려있다.
삶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 청주로 내려간다 ‘라고 표현하고 ’ 지방으로 가요 ‘라고 말한다면 나는 중심부에서 멀어진 그저 주변인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 내가 00 기업에 다닌다 ‘ ’ 나는 청주에 있다 ‘ 고 말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그 기업의 소속감 그리고 그 지역에 사는 그저 하나의 중심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서울에서의 집착을 걷어내자 나는 기분 좋은 동료를 얻었고 사랑하는 가족을 꾸릴 수 있었다.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서야 나는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물론, 여전히 아내와는 가끔 다투고 아이는 말을 듣지 않지만. 그 또한 살아낼 만하다.
더 이상 업계에서 일등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날이 이어지는 날은 없으니 말이다.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떻게 될 것이라 장담하지 않는다. 딩크로 살겠다고 확신에 가득했던 삶이 지금 아이 둘이 됐으니, 얼마나 부질없을까.
나는 오늘을 살아낼 뿐이다.
나는 청주에 내려왔다. 아니 나는 청주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