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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imoriho Dec 21. 2021

이상과 현실 너머의 일기

중요한 것은 내가 그날 루 리드를 만난 것. 그뿐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회사 밖으로 나왔다. 회색 안개가 자욱한 도시 한가운데에서의 점심시간은 달콤하지만 너무나도 짧기 때문에 메뉴 선택은 신중하고도 빨라야 했다. 나는 정신없이 바쁜 거리 위의 사람들을 지나며 메뉴를 생각하다가 바로 앞 식당에 들어가 샐러드를 주문했다. 내게 생기를 주는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금방 나온 샐러드를 받아 창가 앞에 앉았다. 통유리창 너머에는 겨울 행색을 하기 시작한 마른나무들과 차들이 보였다. 희미한 얼굴들(그들은 마스크를 썼으니!라고 애써 위로하고 싶다)도 아무 영혼도 없이 지나갔다.   


올리브 오일과 소금이 곁들여진 샐러드를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벌거벗은 채소들은 어찌 이리 당당하고도 완벽할까. 날 것의 맛을 의식하는 행위는 언제나 내게 생기를 준다. 나는 그것이 주는 만족감에 사로잡힌 채 샐러드를 또 한 입 가득 넣었다. 그리고 가방 속에 들어있던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책의 얼마 안 남은 페이지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드는 아쉬움에 글자를 손으로 만지고, 책 넘김도 미뤄 보았다. 창밖 너머 희미한 얼굴들은 가끔씩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지나갔다.


30분간의 완벽한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바로 옆 편의점에 들어가서 캔으로 된 뜨거운 커피를 산 뒤 근처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추운 날 뜨거운 캔커피를 가진 자의 발걸음은 세상을 한 손에 넣은 듯이 당차다는 것을 당신은 공감할 수 있는가? 나는 희미한 얼굴들에게 그 기쁨을 나눠주고 싶었다.  


작은 공원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볼 수 있던 것은 붉고 노란 가을 나뭇잎들이었다. 이 도시에서 색깔을 가지는 건 오직 이들뿐이라 나는 그들의 유일과 유한함, 그 너머 온화함을 존경한다.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서 포근함을 기꺼이 내어주는 그들의 희생을 존경한다. (희생이 아닐지라도 나는 그들과 연관되어 하나의 선을 이루고 싶었다.)


철제로 만들어진 공원 벤치에 앉았다. 회색빛을 띤 브라운 퍼의 소매 끝으로 뜨거운 캔커피를 감쌌다. 커피의 온기가 천천히 옮겨졌다. 시간도 그만큼 천천히 흘러가는 듯했다. 광장 가운데에 혼자서 보드를 타는 남자가 있었다.


 ‘학생일까? 이 작은 광장에 존재한다는 것 빼고는 나와는 전혀 공통점이라곤 없겠다. 아니 있을지도. 근데 왜 저걸 연습하는 걸까? 재밌어서?’


그를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생각하는 스스로가 웃겨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하는 책에서 오타를 발견했을 때 이름 모를 승리감과 순수한 재미로 가득 찬 그 미소.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 중 하나였다. 남은 시간은 20분. 커피를 마시기에도, 바람과 자유를 느끼기에도 그날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따뜻함이 승리했다.’


그것은 내가 느꼈던 마지막 가을이었다.


계속해서 광장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세상에 심취해 있을 때, 한 남자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나는 남자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남자의 존재를 깨닫게 된 그 순간 나의 표정을 당신이 보았다면 며칠 동안 놀렸을지도 모른다. 그 표정은 아주 우스꽝스러웠을 테니까. 나는 남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곧바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 남자가 내 옆자리 말고 앉을 곳은 너무나도 많았다. 두 개를 제외한 모든 벤치가 비어 있었다. 그 사실과 더불어 남자의 검은색 코트를 보고서 나는 더욱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의 길고 단정한 코트는 어딘가 거친 느낌이 나는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는 걸까? 변화를 원하는 남자? 혹은 베를린의 천사?


말없이 광장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남자의 표정은 무(無)에 가까웠다. 남자의 이마와 눈가, 볼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지만 이목구비는 매우 뚜렷했고, 윗입술은 창백했다. 속눈썹은 길면서도 얇았으며 눈빛은 깊고도 이국적이었다. 나는 어느새 남자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었고 나의 경계심 가득한 표정은 조금씩 남자와 같은 표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남자가 나를 쳐다보기를 바랐다. 잠깐 동안 남자에게 이상한 승부욕을 느꼈던 것이다.


'봐라, 봐라, 여기 좀 보세요… '


나는 속으로 주문 비슷한 것까지 외웠다. 하지만 남자는 조금도 내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니, 나의 시선을 아예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투명인간이 느끼는 기분은 이런 것일까 느꼈다. 내가 투명인간이라면 마냥 짜릿하고 좋을 줄만 알았는데 이런 식이라면 …


그 순간 서글펐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왜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거기서 이상한 안도감을 받았다. 나를 바라보지 않으며 다가오지도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곤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희미한 얼굴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이 세계 너머의 사람 같았다. 그는 나의 스승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남자에게 시선을 두는 것을 멈추고 광장을 바라봤다. 광장 가운데에서는 여전히 젊은 남자가 보드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 그곳을 바라봤다.  


"이곳을 좋아해요?"


그러다 갑자기, 남자가 내게 물었다. 시선은 여전했다.


"아뇨."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당연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내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곳을 싫어했다.


"왜죠? 이렇게 조용한 곳은 이 도시에서 이곳 한 곳뿐인데요. "

"이곳은 조용하죠. 그런데 여기서 5분만 나가도 시끄러운 것들이 가득이에요.”

“네. 머리 아픈 것들이죠.”


머리 아픈 것들. 머릿속에 아까 건너온 횡단보도와 도로가 떠올랐다. 높고 크기만 한 회사 건물이 떠올랐다. 점심시간이면 올려다본, 언제나 흐린 하늘도 떠올랐다. 나는 언제나 그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곤 했다.


"저는 이 도시 자체가 싫어요. 일 때문에 이곳에 오는 거긴 하지만 이곳은 다른 곳보다 흐리고 쾌쾌한 느낌이 있어요. 사람들 표정은 잘 보이지도 않고요. 꼭 유령도시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전 이곳을 항상 떠나려고 생각해요. "


남자는 끄덕였다.


“그럼 어디로 갈 예정이에요?”

“모르겠어요.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요. 누가 살고 있든 얼마나 멀든 상관없어요. 될 수 있으면 멀리 가려고요.”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그와의 대화에 빠져 들어 커피가 식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내가 자꾸만 무언가를 잊게 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와 대화하다 보면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잊었는지는 몰랐다. 그냥 그러면서도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했다. 그러다 내가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을 의식했다. 나도 또 이상한 승부욕이 생겼고, 그에게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어렸다.


“이름이 뭐예요?”


그는 내 질문에 몇 초간 대답하지 않다가


“루 리드.”


라고 짧게 대답했다. 여운은 길었다.


어딘가 얇고 각진 느낌의 이름. 여름날 잃어버린 짙은 남색 향수병을 연상케 하는. 그 병에는 향수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지만 자유의 잔향은 영원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모든 곳에서 그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지호."


그때, 그가 갑자기 나의 이름을 불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단호하고도 다정한 두 글자였다. 그는 내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의 시간은 그때 멈추었다. 차가운 바람이 한순간 세게 불어왔다. 황홀과 무언의 암시가 뒤섞인 바람이었다.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 긴장감은 나를 부른 그에게 대답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모르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마 그는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한치의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그가 나를 파악했다는 생각을 함께 있는 동안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는 막다른 여행자였다. 그는 초인이었다. 그만큼의 시간과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정확히 보았다. 눈동자는 슬픔과 애정으로 가득 찼다. 강렬함이 애써 그것을 숨기려 했다. 내가 그의 눈동자에 나의 영원을 내맡겨도 좋다고 생각했을 때쯤,


"이제 꿈에서 깨야 해."


그는 한 번 더, 더욱이 단호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마저 들었다. 오직 나만 알고 있던 환상을 누군가에게 들킨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깐 필름이 끊어졌고, 다시 이어졌다. 다시 이어졌을 때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와의 대화에 빠져들어 시간을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아,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가야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로. 나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저기, 다음에 마주치면 우리…”


떠나기 전 그에게 마지막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에 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 순간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어설프고도 기약 없는 말의 첫마디를 뱉고 나서 금방 그만두자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곧 슬픈 인정이 뒤섞인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음을. 그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눈빛으로, 온몸으로 작별했다. 짧은 정적 뒤에 공원을 떠나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사실은 몸을 되돌려 그에게로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 함을 알았다.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래서 나의 발걸음은 전쟁터로 나가는 결의에 찬 어린 소년의 발걸음이었다. 나는 퍼의 옷깃을 꽉 여미고 두 팔로 내 몸을 감싼 채 광장의 반대쪽으로 걸었다. 금세 공원에서 나와 회색 도심 속으로 스며들었다. 걸음의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높은 건물들과 다리, 아직 완공되지 않은 건물들과 공사현장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 머리 위를 떠다녔다. 나도 희미한 얼굴들 중 한 명이 되었다.


회사 건물 앞에 다다르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그것이 나의 이상과 현실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나는 차들이 모두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했지만 차들은 쉴 새 없이 오고 갔고 저 멀리까지 줄지어 있기도 했다. 내 머릿속엔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회사에 도착하는 것 딱 한 가지뿐이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나는 지나치는 차들의 타이밍을 맞춰 최대한 빨리 건너기로 하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건널 순간만을 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자마자 재빠르게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차들이 가까워지면 나는 멈췄다가, 건너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 순간 서두르던 차가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차의 클랙슨은 아주 급하게 울렸고 내가 깜짝 놀란 동시에 그쪽을 쳐다봐야 했을 때, 잠깐 동안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나를 비췄다. 그리고 그 순간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에게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날 루 리드를 만난 것. 그뿐이다.








루 리드의 Perfect day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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