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시작 사인이 떨어지면, 배우들은 연기를 시작했다. 주연 배우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촬영이 한 번에 성공하려면 엑스트라도 실수가 없어야 한다.
엑스트라가 촬영 중 지켜야 할 것은
첫째, 카메라를 쳐다보지 말 것!
둘째, 목소리를 절대 내지 말 것!이었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기면 바로 NG가 난다.
엑스트라, 어떻게 일하나?
엑스트라 대행사가 있는데, 나와 친구는 한*예*이라는 회사 소속 엑스트라였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 촬영에 필요한 엑스트라 요청이 오면 보내주는 곳이었다. 1팀, 2팀, 3팀 등 여러 팀으로 나누어져 있고, 팀장도 정해져 있었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다. 20대 여자여서, 20대 여자 엑스트라가 필요하면 우리에게 연락이 왔다. 보통 며칠 전에 연락이 왔지만, 급하면 전날에도 촬영하러 갈 수 있냐고 연락이 오기도 했다. 가능하다고 하면 몇 시 어디로 가라고 알려준다. 보통 이른 새벽부터 모이며, 장소는 주로 여의도에 있는 SBS나 KBS 방송국이었다. 약속된 시간에 가면 큰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촬영했다.
새벽부터 오후 6시(오래된 일이라 마치는 데드라인 시간이 정확하지 않다.)까지 일하며 하루 일당을 주는데, 1시에 끝나도, 5시 59분에 끝나도 일당은 똑같았다. 빨리 마치는 날이 아주 가끔 있긴 했지만, 대부분 꽉 채워서 끝났다.
점심은 촬영지의 주변 식당에서 해결했다. 물론 대행사에서 점심을 사주기 때문에 그 점은 좋았다. 엑스트라 일 덕분에 각 방송국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어볼 기회도 있었다. 방송국 구내식당 음식이 굉장히 맛있게 잘 나왔다. 그리고 식당에서 유명 연예인을 보는 즐거움도 함께 누렸다.
엑스트라 일의 장점
엑스트라 일의 장점은 내가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주로 주말이나 방학 때 잠깐 알바로 이용했다. 물론 20대 여자를 필요로 하는 촬영이 없으면 일하고 싶다고 해도 일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이 당시 다른 알바에 비해 하루 일당이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일의 강도가 세지가 않았다. 점심도 제공해 주었다. 몇십 년 전에는 점심을 주는 곳은 흔하지 않았다.
엑스트라 일의 단점
가장 힘든 점은 지루하다는 것이다. 엑스트라는 종일 기다리는 일이었다. 새벽부터 모여서 엑스트라 전용 버스를 타고, 촬영장으로 가는데, 어떤 날은 세트장이 멀어서 몇 시간씩 가기도 했다. 도착해서 바로 촬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몇 시간이고 버스 안에서 기약 없이 기다렸다. 왜냐하면 우린 엑스트라이기 때문에 아주 잠깐의 장면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대기조라 생각하면 딱 맞는 표현이다.
언제 촬영할지도 모르고,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나는 친구랑 늘 같이 다녀서 이야기하면서 그 지루함을 달랠 수 있었다. 혼자라면? 절대로 엑스트라 일을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맡은 배역
나는 주로 드라마 엑스트라로 참여했다. 가장 많이 했던 역할이 지나가는 사람이었다. 행인 1, 행인 2... 이것이 나의 배역이었다.
그리고 카페에서 차 마시는 쵤영도 종종 했다. 모르는 사람이랑 앉아서 이야기하는 척 연기했다. 물론 말하는 모습만 흉내를 내고 절대로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촬영 때 동시녹음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주연 배우들의 목소리만 녹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은 촬영은 클럽에서였다. 클럽에서 춤추는 장면인데, 음악이 없었다. 주연 배우들의 대사만 녹음해야 하기 때문에 나머지 소리는 음소거가 되어야 했다. 우린 소리를 내지 않아야 했고, 음악 없이 춤을 추는 촬영을 해야 했다. 음악은 나중에 편집 과정에서 입힌다고 했다.
영화 촬영을 하고 싶었는데, 영화는 엑스트라도 배우 캐스팅 되는 것처럼 처음부터 영화 촬영 끝날 때까지 같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나처럼 가끔씩만 하는 엑스트라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자본주의 현실을 보여주는 곳
엑스트라 일을 오래 하지 못한 큰 이유가 기다림이 힘들어서였다. 단 몇 분의 촬영을 위해 종일 기다려야 했다.
가장 일찍 오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은 엑스트라였다. 신입 배우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조연급 배우들은 가끔 엑스트라들이 타는 버스를 타고 함께 이동하기도 했고, 엑스트라와 함께 기다렸다. 같이 버스를 탔던 신입 배우 중 아주 유명한 배우가 된 사람도 있었다. 후광이 비친다는 표현이 딱 맞는, 외모가 출중한 배우였다. 훗날 성공한 배우가 되어 반갑기도 하고 혼자 괜스레 기뻤다.
유명 배우, 즉 성공한 주연급 배우는 촬영 시간에 맞춰 나타나서 촬영만 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촬영하자마자 가는 배우를 부럽게 쳐다보는 나를 보고 당시 촬영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억울하면 성공해."
이 세계야말로 자본주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엑스트라 일을 했을 뿐이지만, 간혹 배우의 꿈을 안고 엑스트라 일부터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감독에게 인사도 열심히 하고 얼굴 알리기에 노력을 했다. 행인 1에 불과한 나보다는 좀 더 비중 있는 단역을 맡았다. 카페에서 주문을 받는 직원이라든지 대사가 있는 단역을 주로 맡았다.
사실 그들을 '뜬구름 잡는구나. 과연 배우로 성공할 수 있을까?'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젊은 나이에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한 그들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꿈을 위한 도전은 용기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