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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리 Jan 20. 2021

경의선 숲길이 내게 남긴 것

사람이 되어버린 어떤 공간에 대하여

나는 서울 연남동에 산다. 이 곳에서 독립해 혼자 산 지 4년이 되었다. 그 4년의 시간 안에서 나는 인생의 곡선들을 만났다. 공부도, 일도, 연애도, 심지어 건강까지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누구보다 강인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사실은 한없이 약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끝없는 심연에서 허우적대며 가만히 집에 있고 싶지도, 그렇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싶지도 않을 때 나는 종종 자전거를 타고 한강으로 내달리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무작정 경의선 숲길을 걷곤 했다. 한강과 경의선 숲길 두 공간 모두 내가 지극히 아끼는 곳이지만, 오늘은 경의선 숲길을 걷고 왔기 때문에 그에 대해 적기로 한다.


경의선 숲길을 함께 걸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수줍은 대화를 나누며 걸을 때도 있었고, 팔짱을 꽉 낀 채 통통 뛰어가며 걷거나, 술에 취해 실없이 웃으며 걷기도 했다. 그때는 습하고 뜨거운 여름밤이었거나, 적당히 바람이 불며 벚꽃이 떨어지는 봄 낮이었거나, 비가 쏟아지는 가을 저녁이었거나, 온몸이 시리도록 추운 겨울밤이었거나, 또는 그 외 다른 모든 순간들이었다. 옆에서 같이 걷던 사람들은 하룻밤 뜨거운 불장난이었거나, 깊이 사귀고 있던 연인이었으며, 오랜 친구들이거나 서울로 올라온 가족이기도 했다. 경의선 숲길은 내게 하나의 상징이자 자랑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내가 멀쩡한 동네에서 잘 버티고 있다는 상징 말이다. 또, 좋은 핑곗거리이기도 했는데,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 뒤에 (사실은 술을 마신 뒤) 상대방과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울 때 꽤나 낭만적인 추가 시간을 벌 수 있는 하나의 장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탁자 앞에서 오고 가던 피상적인 대화가 경의선 숲길 위를 걸으면 조금 더 진실해졌고, 그 잠깐의 산책은 상대가 나와 어떤 관계이든 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의선 숲길을 떠올리면 나는 그곳을 혼자 걷는 내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정말 많이도 걸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수 없이 나를 다독이고 때로는 다그쳤다. 하루하루를 말 그대로 버티던 날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잠시나마 현실에서 도망쳐 나온 뒤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기분이 조금 나아졌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그 날 가장 잘한 일이 되었다. 필요한 경우 하루에 몇 번을 다시 걷기도 했다. 


조금 전에 오랜만에 경의선 숲길을 다시 혼자 걸었다. 예전에 비하면 거의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어 마음이 가벼워진 지금, 들를 곳이 있어서 밖에 나왔다가 날씨가 좋아 걷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울컥 명치를 치고 올라왔다. 심장이 축축해져서 무겁게 뛰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 억지로 막아뒀던 상념들이 한꺼번에 다시 쏟아졌다. 경의선 숲길의 공기에는 어떤 기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곳을 걷자마자 내 안의 많은 한숨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어디 있었는지도 몰랐던 물들이 눈가에 차오를 수는 없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애초부터 우울한 사람이었을까? 아니, 외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외로움이 우울함으로 변하지 않도록 출렁거리는 삶에서 매일 균형을 잡는 것이 지금껏 내가 해왔던 것일까? 균형을 유지하며 마음이 흘러넘치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은가, 몸을 내던져 차라리 흠뻑 젖어버리는 것이 나은가? 또다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래, 바로 이 생각들이 문제다. 


상처투성이에 더럽던 내 20대 후반은 경의선 숲길로 투영된다. 그 길 끝에서 걷고 있는 수많은 내가 교차되어 보인다. 앞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그 순간들의 나는 변함없이 그곳에서 걷고 있을 것이다. 경의선 숲길은 그 시기에 방황하던 나 자체가 되어버렸다. 


내일 날이 밝아지면 다시 걸어보아야겠다. 



2021년 1월 20일 오후 10시 56분 내 방 침대 위에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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