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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Dec 28. 2020

내가 죽으면 혼수 한복을 입혀줘

1년간 손 안 댄 옷은 비워도 된다고요? 이건 그럴 수 없어요!


아내 "슬"의 이야기


허례허식 없는 결혼식을 꿈꿨고, 예비 신랑(현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던 터라 문제없이 결혼 준비가 진행됐다. 받을 것도 보낼 것도 없는, 내가 꿈꾸던 간소한 절차였다. 딱 한 가지, 한복을 빼면!


"한복은 맞췄으면 좋겠다고 하셔."


예비 신랑이 시어머니의 말씀을 전해왔다.


 여러 사람의 결혼식을 다니면서 다짐했다. 한복을 맞춘 어머니들이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걷는 모습은 참 아름다우며 그러므로 나의 결혼식의 포문을 열 어머니들께는 고운 한복 기꺼이 선물하자고. 그래서 양가 어머니의 한복은 맞춰드릴 생각이었기 때문에 신랑이 전해오는 말을 듣고는 별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거기에 우리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됐다. 결혼식이 끝나고도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예쁘고 실용적인 커플 정장이 얼마나 많은데, 난 그런 거 입고 하객인 듯 주인공인 듯 어우러져서 멋지게 인사하고 싶은데, 폐백을 한다 해도 폐백용 한복은 따로 있고 우린 심지어 폐백도 안 하는데?!

예정에 없던 요청과 강요 사이의 의견이 당황스러웠다.


 "어머니의 유일한 부탁이셔."와 "어머니들 한복은 맞출 거라니까?" 사이에서 답 없는 긴 충돌이 이어졌다. 결국 이 문제는 직접 시어머니께 말씀드려야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고 어느덧 한복을 맞추러 종로로 모두 모이는 디데이가 되었다.


 -가족들도 보기 때문에 길게 설명하다간 난처해지므로 요약하자면- 과정은 복잡했으나 결론은 심플하다. 현장에서 나는 신랑과의 눈싸움, 현란한 눈알 굴리기, 눈 부릅뜨기를 몇 차례 반복했으나 한복집을 나올 때쯤 내 손엔 현장에서 송금한 한복 값의 영수증이 쥐여있었다. 연회장을 돌며 잠깐 인사할 그 찰나를 위해 결국 한복을 맞춘 것이다. 기혼자들이 지나고 나면 제일 불필요했던 결혼식 준비 비용이라 침 튀기며 얘기하고 극구 만류하는 한복을. 그것도 인 당 백만 원이 넘는 것으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어머니들은 아름다웠으나 리는 정말 십여분 한복을 입고 연회장을 돌았다. 너무 허기져서 잘 들어가지도 않는 밥을 먹던 순간까지 포함하면 삼십여분 남짓을 말이다.


 그 후 일 년 간 한복은 꽤 큰 부피로 옷장의 한 공간을 차지했다. 그렇게 놀고 있는 한복을 보고 있자면 본전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팠다. 아까워서 결혼할 친구에게 입어보려냐, 며 빌려주려고 발악하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혼수 한복이 바깥바람을 쐰 횟수는 한 손에 꼽을 수 있다. 억울해서 입고 경복궁에라도 가야겠다고 매년 봄이면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고 지고 갈 자신이 없었고 입고 지하철이나 자차를 이용해 한 시간을 달릴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또 한복은 곱게 묵혀졌다.


 그럼 처분하면 되잖아,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버리기부터 중고판매 혹은 나눔 등 비우는 방법은 다양하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어떠한 방법도 선택할 수 없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하면서 안 입는 옷을 참 착실하게 나누고 비웠는데 한복은 비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경건한 행사에 함께 했다는 게 가격을 후려쳐서 후딱 팔아버리는 걸 용납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였고, 너무 짧은 시간만 입었더니 내 착용 사진이 친구의 착용 사진 보다도 적다는 안타까운 사연까지 더해게 두 번째 이유다.


 활용 방법을 찾자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의 연을 맺었을 때 입고 있었으니 부부의 연이 끊어질 때 입는 건 어떻겠나 싶었다. 이혼의 얘기가 아니다. 혼수 한복이 수의가 되면 어떨까 싶었다는 뜻이다. 죽는다고 평소에 만지지도 않던 원단의 것을 입느니 그래도 입어봤던, 서로에게 어울릴 색을 고심하며 골랐던 애정 어린 옷이 마지막에도 함께 하는 게 의미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엔 법의학자 유성호의 저서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가 한 몫했다. 그는 이 책의 어느 에피소드에서 '사족이지만, 직업상 장례식장에서 검안을 하면서 시신에 입힌 옷, 유교 전통에서의 삼베로 된 수의를 자주 보게 되는데, 살아생전 한 번도 안 입어본 옷을 왜 죽은 사람에게 입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마뜩잖았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덧붙여서 '그래서 지금 고등학생인 큰 아들에게 결혼할 때 집사람이 마련해준 예복을 입혀달라고 이야기했다.' 고 자신의 수의를 구체적으로 요청한 내용도 써놨다.


 나는 그 부분을 읽고 필사하 사진을 찍어 간직했다. 함께 알았으면 해서 술주정 마냥 몇 차례 남편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그래, 그거 저번에 얘기해줬잖아."


그 부분을 읽어 줄 때마다 하는 남편의 말을 흘려들으며 미니멀 라이프를 세뇌시켰듯 우리의 수의 프로젝트를 위해 조금씩 밑밥(?)을 깔았다. 그 덕분인지 수의를 한복으로 하자는 내 제안을 남편은 생각보다 쉽게 승낙했다.

 

 구체적인 장례 절차는 정하지 않았지만 수의는 정했으니 죽음에 대한 슬픔과 상실감에 응하게 되는, 비싼 원단을 권유하는 업체 상술에 아마 나의 가족들은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태운 옷은 하늘에서 입을 수 있다니까 살쪄도 티나지 않 편한 한복을 선택한 나는 천국에서의 먹방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테고. 새삼 친구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다. 너의 피로연 때 입어보라며 발악하고 입힌 그 한복이 사실은 내 수의였다고 고백하지 않아도 되므로.


 여전히 한복은 옷장에서 많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처음 입었던 그때처럼 다시 의미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이제 옷장을 열 때마다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볼 때마다 마음에 되새겨야겠다. 비교적 간소했던 결혼 절차처럼 우리의 장례식도 허례허식이 없기를, 그 시작이 저 한복이기를.




남편 "기"의 이야기


아이러니한데 나는 한복을 판매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돌잔치 한복도, 유치원 생일잔치 한복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둔 적도 입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앞으로의 우리 삶이 미니멀을 향하기로 했고 그 시작인 결혼 준비를 간소하길 희망했지만 한복 맞추는 날 나는 다서 그 생각에 위배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 날은 더운 여름의 토요일이었고 하필 비가 세차게 내렸다. 습해서 불쾌지수가 치솟는 날 우리 결혼 준비의 빅 이슈 중 하나인 한복을 맞추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일의 복선인가, 싶어 불안했고 아내와 함께 맞출 혼수가 내 소유의 첫 한복이 될 날이기도 했어서 조금 들떴다.


 몇 번의 충돌이 있던 한복 맞춤, 그럼에도 설렘이 담긴 그 날의 결과물은 -나 역시도 가족들이 보기 때문에 길게 설명하다간 난처해질 수 있으므로 요약하자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미니멀 라이프에서 복병과도 같은 존재가 됐다. 부피가 커서 옷장을 열 때마다 2개의 회색 한복 상자에 저절로 눈이 갔는데 그럴 때면 과거의 그 날이 생생하게 재연되어 어머니를 조금 더 강하게 설득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게 됐다. 


 우리가 입었던 한복은 주관적으로는 당연하거니와 객관적으로도 고급스럽고 곱다. 지인을 통해 최상위 클래스 -라고 밝힌- 한복을 구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방치의 원인이 됐다. 관리와 세탁을 위해서는 지정한 업장을 가야 하는 고귀한 몸인데 어떻게 쉽게 손이 가는 편한 옷이 될 수 있겠는가.


 폐백도 없는 결혼식 피로연에 짧게 등장한 이 비싼 한복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타인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우리의 감각적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을까, 결혼의 필수 과정도 아니었을 텐데 왜 그때는 우리만의 기준이 아니라 남이 밟아온 과정을 따르려 했을까, 이 모든 것을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올해 코로나로 집에 발이 묶여 있는 시간이 많았다. 매일 속보로 뜨는 확진자 수를 보며 우린 어느 때보다 많이 삶의 의미를 되짚었고 종종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가장 많은 개수가 남아있는 의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고 우리가 지향하는 미니멀 라이프에서 이도 저도 못한 채 남겨둔 한복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아보자고 토론을 시작했다.


 "비우고 싶어?", "비울 수 있어?" 하며 서로 간을 보다가, 부부가 된 첫 날을 위해 맞춰 입은 옷이니 마지막에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아내의 제안, '수의'를 받아들였다. 다만 수의로 활용하려거든 몇십 년을 또 방치해야 하니 부부를 위한 날을 기념할 어느 순간에도 착용했으면 좋겠다는 내 의견을 덧붙였다. 결혼 5주년, 10주년, 더 나아가 은혼식, 금혼식을 위한 기념 촬영에 이 한복이 함께하면 더 빛을 발할 것 같았다.


 5주년 단위로 꺼내면 앞으로 몇 번을 더 입게 될지 모르겠지만 옷이 가진 기능에 맞게 쓸모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 먼저 떠나게 되는 날, 우리의 처음을 맞이했던 그 한복을 입고 가서 기다리기로 한 약속도 지키고 싶다. 온전한 내 것의 한복 하나가 마지막을 위해 고이 놓여있다.


  ps. 결혼식을 준비하던 과거로 돌아간다면 하객분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한 복장으로 청바지에 캐주얼한 재킷을 선택하겠다. 동창회에 온 것처럼 모든 하객들과 편안한 셀카를 찍는다면 우리는 결혼식을 보다 행복한 날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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