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면 모음
나는 어려서부터 만화를 정말 좋아했고, 지금도 요일 별로 5개 이상의 웹툰을 구독하고 있고 한가한 주말에는 만화 카페에 가서 몇 시간씩 죽치고 있다 오곤 한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만화가 너무 많고, 만화마다 각각 재미, 감동, 웃음, 그림체, 스토리 등등 다양한 매력 포인트가 있는데, 그중 재미, 감동, 웃음, 그림체, 스토리가 모두 완벽한 만화가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라 생각한다.
나는 슬램덩크를 전권 소장하고 있고 매년 몇 회씩 정주행을 하곤 하는데, 어쩜 이렇게 질리지도 않고 매번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올해 2번째 정주행을 마치고 갑자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장면들에 대해 글을 끄적여보고 싶어 져서 이 글을 올려본다. 슬램덩크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각자만의 과거 이야기와 정말 찰지게 지은 한국어 이름을 가진 입체적인 캐릭터들이라는 점인데, 아무래도 나도 사람인지라 몇몇 편애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장면들은 주로 내가 편애하는 캐릭터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참고 바란다.
그럼 서론은 여기까지만 하고 바로 명장면 리스트로 넘어가겠다.
1. 능남전 막판
의외로 첫 번째 명장면을 권준호, 일명 안경 선배가 차지했는데, 능남전에서 경기 막판 중요한 3점 슛을 성공시키는 장면이다. 능남 감독이 3년간 열심히 해 온 안경 선배를 무시하고 서태웅 더블팀 하라고 지시했다가 결국 안경 선배의 클러치 3점을 맞고 경기에 패배하게 된다.
그 뒤를 이은 백호의 승부를 결정짓는 풋백 덩크!
이어지는 백호의 은퇴 연장 드립과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북산의 두 정신적 지주, 채치수와 권준호의 모습은 정말 뭉클하다.
2. 최고의 슈퍼에이스, 정우성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한 모습의 정우성은 정말 멋지다. 서태웅의 속공을 단독으로 막을 수 있다는 저 자신감, 그리고 전국 최고 수준의 선배들에게 믿어달라고 하니 바로 믿어주는 저 모습이 진짜 멋지다.
멋지게 수비에 성공한 뒤 북산 선수 5명을 모두 제치고 골까지 성공시키는 모습은 그야말로 화룡점정. 정말 말 그대로 슈퍼 에이스 그 자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정우성은 마지막 산왕전이 되어서야 처음 등장해서 그런지 몰라도, 팬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는 느낌인데, 나는 정우성 캐릭터를 참 좋아한다. 특유의 (실력이 겸비된) 거만함과, 가끔씩 보여주는 아직 철없고 정신줄 놓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다. 슬램덩크 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산왕이 북산에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우성을 이정환이나 윤대협 밑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정우성은 작가 피셜 작중 최강자이고, 산왕전에서 보여준 활약만으로도 단연 압도적이다.
특히 이정환, 윤대협과는 호각의 승부를 했던 서태웅을 진짜 비참할 정도로 털어버리는데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게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사실 서태웅은 산왕전에서 한 번도 단독으로 정우성을 수비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고, 공격에서도 여러 차례 블록, 스틸을 당하거나 무리한 슛을 쏘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패스 플레이 몇 개와 정우성의 개똥슛 모방 한 번으로 마성지한테 이미 정우성과 동급이라는 특급 칭찬을 받는데, 서태웅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이런 정우성을 서태웅과 동급이거나 아주 약간 우위일 뿐인 이정환이나 윤대협 밑으로 보는 사람은 정말 농알못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3. 불꽃남자 정대만과 채치수의 콤비 플레이
산왕전 후반 20점 차로 뒤졌을 때 드디어 안경 선배가 1학년 때부터 꿈꿔왔던 채치수와 정대만의 콤비 플레이가 나온다. 채치수의 몸을 사리지 않는 스크린이나 정대만의 깨끗한 슈팅도 멋지지만 대사 없이 그냥 주먹을 맞대는 장면에서 대사 수십 가지 이상의 의미와 감동이 전달되는데, 이를 지켜보는 안경 선배의 대사가 주옥같다.
4. 조재중을 능가하는 최고의 선수
개인적으로 조재중 에피소드를 참 좋아한다. 흰머리 호랑이라 불릴 정도로 엄한 지도자였던 안 선생님이 아끼던 제자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대학 농구계를 떠났지만, 그 후로도 조재중 같은 재능을 가진 최고의 선수를 키우기 위한 꿈을 접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백호와 태웅이라는 최고의 선수가 될 재목을 두 명이나 만나게 된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5. 산왕전 백호의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
소연이가 1권에서 처음 말한 것처럼 백호는 산왕전에서 드디어 북산 농구부의 구세주이자 없어선 안될 선수가 된다. 여태까지 내가 고른 명장면에 송태섭이 단 한 번도, 잠깐이라도 등장하지 않는 걸 눈치채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난 주요 인물 중 송태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기서 송태섭의 어이없는 실수로 인해 백호가 다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체력이 다 떨어져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정대만의 모습도 정말 멋지다).
6.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등 부상으로 인한 통증으로 인해 기절한 한 사이 몇 달간 짧았던 바스켓볼 커리어에서 즐거웠던 순간들을 추억하다가 벌떡 일어나 소연이에게 농구를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스포츠 만화 중 최고의 고백 장면이 아닐까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이 아다치 미츠루 감성을 좋아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H2/터치 감성보다 산왕전 고백 감성이 더 와닿는다. 비록 소연이에게 잘 보이려 시작한 농구였지만, 4개월 간 농구의 매력에 정말 푹 빠져 진짜 바스켓맨이 되어버린 백호, 과연 소연이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건지, 농구가 좋다고 이야기하는 건지 애매모호해서 더 좋다.
추가로 슛 2만번 연습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소연이와 백호군단 친구들... 사실 인생에서 백호군단 같이 의리 있고 나를 전적으로 응원해주는 친구 몇 명만 만들어도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난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저 "2만개다!" 장면을 참 좋아한다.
7. 영광의 시대 & 단호한 결의
개인적으로 산왕전 마지막 1분 내용은 만화 역사상 최고의 장면들이라 생각한다.
그 유명한 "영광의 시대" 대사. 소연이도, 백호 군단도, 안 선생님도 모두 백호를 걱정해 경기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백호를 말리지만, 오히려 가장 앙숙인 태웅이만이 백호의 마음을 가장 이해하고 백호가 교체로 들어올 수 있도록 파울을 해준다. 그나마 백호군단에서도 백호와 가장 친한 것으로 보이는 호열이만이 태웅이만이 백호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는 듯한데, 나는 이 장면이 태웅이와 백호가 비록 겉으로는 늘 투닥거리고 싸우기만 하는 앙숙으로 보여도 사실은 이미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친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명장면이라 생각한다. 마지막 패스에 대한 복선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두 번째 명언 "단호한 결의". 안 선생님이 산왕전을 앞두고 해남이 산왕한테 30점 차로 패배하는 비디오를 보여주며 산왕을 꺾으려면 앞으로 무슨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동요되지 않는 단호한 결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했었는데, 백호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다가 경기에 다시 들어가기 직전 안 선생님에게 뒤돌아 보며 드디어 단호한 결의라는 것이 생겼다고 한다. 평상시처럼 가벼운 말투나 장난스러운 얼굴이 아니고, 듬직한 얼굴로 "간신히"를 두 번이나 말한 모습에서 정말 어마어마한 진정성이 느껴진다.
8. 설명 따위는 필요 없는 만화 역사 상 최고의 명장면, "왼손은 거들뿐"
백호와 태웅의 처음이자 마지막 하이파이브
한 가지 궁금한 점은, 과연 이노우에 선생은 언제부터 마지막에 제목인 "슬램덩크"가 아닌 점프슛, 그리고 태웅이가 백호에게 마지막 패스를 한다는 마무리를 구상해왔을까? 나는 수천, 수만 번을 생각해봐도 이것보다 더 멋진 산왕전의 엔딩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역시 이래서 거장이 거장인 것일까? 그리고 비록 떡밥은 깔려있었지만, 산왕전 이후 굳이 지학이나 해남, 명정공업 등과 대결하는 장면을 과감히 생략하고 산왕전에서 스토리를 마무리한 것도 정말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완결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팬들 마음속에 산왕전의 여운이 깊게 남아있는 게 아닐까?
명장면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며 나의 생각을 하나 둘 적다 보니 어느덧 글이 이렇게 길어졌는데, 마지막으로 이노우에 선생이 예전에 일본 주요 신문에 올린 슬램덩크 1억 부 판매 달성 기념/감사 광고 그림으로 이 긴 글을 마무리 짓겠다. 그림체가 슬램덩크보단 다음 작품인 배가본드에 더 가까워서 조금 아쉽지만, 이노우에 특유의 감성 터지는 글귀가 너무 멋져서 도저히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서태웅 그림에 "농구와 모두에게, 고마워"라는 문구가 너무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