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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아빠 Oct 24. 2020

칠순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만들어준 선물

아버지는 평생을 현장에서 일하셨다. 육체노동이다 보니 집에 돌아오시면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신 후에는 뉴스를 보다가 주무시곤 하셨다. 아버지와 대화할 때면 앞뒤가 꽉 막힌 사람처럼 말도 잘 이해 못 하시고, 나랑 성격도 잘 맞지 않아서 자라면서 아버지와 시간을 많이 보내거나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어머니 말씀으로는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많이 귀여워했다고 자주 말씀해 주셨고, 나도 그와 관련된 기억이 하나 있다. 아버지가 직장 체육대회 겸 단합대회 때 나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서 데려갔었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어린 나에게 좋은 기억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머릿속에 남았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내가 결혼하고 아기를 낳으니 나의 마음가짐에도 변화가 생긴 듯하다. 아버지에게 지금까지 살갑게 대하지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나는 겉으로는 투덜투덜하면서도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가능하면 들어드리려고 한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이 내키지 않더라도 별 일 아니면 고분고분한다고 할까. 


최근에 우리 집에 많은 일이 있었다. 몇 달 전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을 하고, 아내도 병원 신세를 져야 해서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복직하자마자, 월차를 내는 게 부담스러워서, 아내가 입원하는 3일 중 하루만 쉬기로 직장에 이야기했는데, 부모님께서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자식 집에 오셔서 손녀를 돌봐주셨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아기가 가지고 노는 블록으로 뭔가를 공들여 만드시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노동일을 한 터라 손이 투박하고 뭉툭하며 상처도 많다. 그 손으로 손녀를 위해서 하나하나 블록을 끼워 맞추셨다. 만드는 과정을 볼 때는 도통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또, 뭔가 이상한 거 만들겠지. 아버지가 블록으로 뭘 만들겠어?’  

  

나도 블록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봤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보고 따라 만들 수 있으면 괜찮지만, 그런 모델이 없다면 더 힘들어진다. 머릿속으로 만들 것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떻게 만들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블록을 끼웠다 뺐다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서툰 손으로 무엇인가 만들어가는데 그 규모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커봐야 우리 아기 팔 길이 정도 되는 것이었고, 다양한 종류가 있는 블록을 제대로 활용도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이 블록으로 만들어 본 적도 없는데, 하나하나 잘 맞춰가는 것이다. 다양한 블록을 적재적소에 끼워가며, 블록 세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재료까지 직접 가져와서 척척 만들어 갔다.    


그런데 블록으로 만들어가는 것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보통 아이들과 친숙한 자동차, 나무, 집 등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위해 만든 크레인


아버지가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크레인이었다. 나는 크레인을 보자마자 '우와~'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웅장하고,  크레인의 특징을 잘 표현한 것이 쉽게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필시, 평생을 현장에서 일하시면서 경험의 세계가 노동 현장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에 크레인을 만드셨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아버지가 완성한 것을 보았을 땐 뭔가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려고 했다. 

  

아버지의 배움이 짧아서, 아버지가 작업복을 입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는 현장에서 청춘을 보내서, 보고 들은 것이 이것뿐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인생이 담긴 선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면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하는데, 딱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손녀에 대한 사랑.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 대가 없는 순수한 사랑이 이런 것일까.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만들어 준 선물인데, 우리 아기에게는 아까워서 못 쥐여주겠다. 당분간 나의 책상 앞에 두고 매일 아버지를 그리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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