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기사 실은 <워싱턴포스트>는 기사 날조에 대해 사과하고 진실 밝혀
2005년 6월 나를 포함해 월간중앙 기자들은 성명을 냈다. 발간을 앞두고 있던 7월호에 실으려 한 기사가 누락된 것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었다. ‘독자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기사로 말해야 할 기자들이 성명서를 써야 하는 현실에 분노와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해당 기사는 김운용 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의 자진 사퇴를 전제로 자크 로게 당시 IOC 위원장이 대한민국 청와대와 극비 협상을 했다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자크 로게-청와대-김운용 위험한 3각 빅딜). IOC 위원장은 이 협상을 성사시키려 청와대에 세 가지를 약속했다. 2014년 동계올림픽의 평창 유치, 태권도의 정식종목 유지, IOC 위원의 한국인 승계였다. 김운용은 앞서 2001년 치러진 IOC 위원장 선거에서 자크 로게와 경쟁해 차점자로 낙선했다. 한국은 그 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했고 태권도는 현재 올림픽 정식 종목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기사를 쓴 후배는 당시 삼청동에서 청와대 관계자와 만나 이 비밀 협상이 팩트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청와대는 이 기사에 대해 보도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국익이 걸린 일이라고 했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수긍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언론 종사자에게는 진실만한 국익이 없다. ‘언론의 포화(The artillery of the Press: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였던 고 제임스 레스턴의 저서)’는 진실을 감추려는 모든 세력을 향할 수밖에 없다. 권언유착에 맞섰던 20세기 진보 언론의 영웅 이지 스톤은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다.
월간중앙은 청와대의 비보도 요구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사 마감으로 정신없이 바쁜데 삼성그룹의 홍보 담당 임원이 찾아왔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일단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는 지나는 길에 대표를 만나기 위해 잠깐 들렀다고 말했다. 그가 다녀간 뒤 대표가 이 기사를 빼겠다고 ‘선언’했다. 청와대가 못 막은 기사를 삼성이 막은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전 6월호에 싣기로 했던 기사(‘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대통령 기망했나’)가 외부의 압력으로 빠진 일이 있었다. 청와대가, 훗날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종석 NSC 사무차장을 극비리에 조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선임 차장이었던 나는 후배들과 함께 대표에게 기사 누락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재발 방지 등 요구사항을 서면으로 전달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호에 게재하기로 한 특종 기사를 대표가 싣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자 성명을 통해 문제를 외부화하겠다고 말했다. 대표는 그래도 기사는 실을 수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성명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회사 측의 기사 누락에 항의해 기자 성명을 발표했다.
“권력과 거대 자본의 외압에 의해 ‘진실 보도’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점, 독자와 국민 여러분께 사죄합니다. 부당한 압력에 굴복한 <중앙일보> 및 <월간중앙> 관계자들은 이 사태와 관련해 응분의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합니다. 앞으로 어떠한 부당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 보도의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시사지 법인 총괄대표가 사의를 표했다. 중앙일보 발행인이 찾아와 만류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월간중앙 대표를 제외한 3개 시사지 대표들이 월간중앙 기자들과의 면담을 청했다. 이 면담 후 나는 총괄대표를 찾아가 사의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사실상 직무 정지 상태였던 월간중앙 대표의 복귀를 요구했다.
사태가 수습되자 월간중앙 대표는 나와 기자 한 사람을 방출했다. 얼마 후 다른 한 후배가 정부 쪽으로 이직을 했다. 어쩌다 그때 일을 되짚어볼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건 무엇이고 잃은 건 무엇인가?
1995년 편집국에서 시사지 법인으로 파견 나가기 전 나는 중앙일보 공정보도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었다. 공보위는 평기자들로 이루어진 지면 감시 기구이다. 각 부서 소속 공보위원들이 모여 공정보도 관점에서 주목할 기사들에 대해 토론한 후 성찰적 보고서를 만들어 편집국 내에 배포했다.
그해 가을 <중앙일보>는 전년도에 국내 언론 최초로 시도한 대학평가를 본격화했다. <조선일보>가 <중앙일보>에 선점 당한 것을 배 아파한다는 기획이다. 몇 년 후 한국외국어대에 출강할 때 일이다. 어느 날 강의하러 학교에 가니 교문에 ‘중앙일보 대학 평가 10위’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중앙일보> 대학평가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최초의 대학 종합평가 결과가 중앙일보 온라인판에 발표됐다. 종합 순위는 카이스트, 포항공대,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고려대 순이었다. 고려대보다 순위가 높게 나온 서강대 측이 이 기사로 고무됐다. 다음 날 신문엔 그러나 순위가 고려대, 서강대 순으로 바뀌어 실렸다. 서강대가 순위 변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교육팀장으로 있던 선배를 만나 경위에 대해 들어봤다. 그는 학과 평가 말고 대학 종합 순위는 논란의 소지가 있어 통상적 순위로 보도했다고 밝혔다. 통상적 순위라면 카이스트, 포항공대를 서울대보다 선순위에 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에 앞서 1995년 1월 <중앙일보>가 10회에 걸쳐 이찬삼 시카고 중앙일보 편집국장의 동토 잠행기를 연재했을 때다. 이 국장은 김정일 치하의 북한에 기자로서는 최초로 들어가 잠행 르포를 했다고 밝혔다. 이 기사로 그는 나도 회원인 한국언론학회가 주는 상을 받았다. 그러나 <월간조선>, <신동아>, <말>지 등이 그의 밀입북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찬삼 국장은 북한 잠행은 진실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북한 통행증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취재원 보호를 내세웠다. 공보위는 ‘중앙일보 전체의 문제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그 내용이 언론 전문지에 보도됐다. 이 보고서 건으로 나는 회사 임원, 편집국장 등이 대책회의를 하는 자리에 불려갔다. 회의 멤버 중 최고위직에 있던 선배가 “공보위 보고서에 이런 이야기를 쓴 건 해사행위”라며 나를 질책했다. 그는 나더러 이찬삼 기자 르포에 문제를 제기한 <월간조선>으로 보내주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 후 나는 경제 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로 파견 발령을 받았다. 현직 공보위 간사가 편집국 외 부서로 발령이 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에 앞서 나는 노조 위원장으로 있던 선배에게서 “조심하라”는 귀띔을 받았었다.
1980년 9월 28일 워싱턴포스트 1면엔 ‘지미의 세계(Jimmy's World)’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26세의 흑인 여성 재닛 쿠크가 쓴 이 르포 기사는 워싱턴 흑인 밀집 지역에 사는 소년 지미의 삶을 다뤘다.
“지미는 여덟 살, 3대째 헤로인 중독자다. 갈색 고수머리에 갈색 눈인 이 조숙한 소년의 가녀린 팔뚝엔 바늘자국이 무수하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헤로인 주사를 맞았다.”
이 기사는 전 세계 300개 이상의 신문에 실렸다. 미 합중국 수도인 워싱턴이 뒤집어졌다. 워싱턴 DC 최초의 흑인 시장이었던 매리언 베리가 나서 지미를 찾았다. 경찰국장도 가세했다. 이들은 지미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듬해 쿠크는 ‘기자들의 노벨상’으로도 불리는 퓰리처상을 받는다. 쿠크가 상을 받은 다음 날 그가 다닌 바사대 입학 담당관과 그의 경력에 관한 기사를 준비하던 AP의 편집인이 <워싱턴포스트>에 전화를 걸어왔다. 쿠크의 경력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앞서 워터게이트 보도를 진두지휘했던 벤 브래들리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은 기자 출신의 옴부즈맨 윌리엄 그린에게 쿠크의 기사에 대한 진상 조사를 맡겼다. 퓰리처상을 받은 지 이틀 만에 쿠크는 이 기사가 날조된 것이라고 밝힌 후 사표를 던졌다. 퓰리처상도 반납했다. 64년의 퓰리처상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린은 <워싱턴포스트>가 1면에서 시작해 총 4개 면에 걸쳐 실은 진상조사 보고서의 결론를 이렇게 맺었다.
“기자가 편집자에게 기사의 취재원을 공개할 수 없다면 그 기사는 실려서는 안 된다. 이 원칙 때문에 의미 있는 뉴스가 실리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쿠크에 대해 이렇게 꼬집었다.
“쿠크가 퓰리처상을 받은 것도 부당하지만,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것도 부당하다.”
워싱턴의 중소 신문이었던 <워싱턴포스트>를 일류 신문으로 성장시킨 브래들리는 이 기사 조작 사건을 자신의 회고록인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에서 “내 생애 최악의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러나 닉슨을 반면교사로 삼아 위기의 순간에 최선의 방어를 했다. 은폐하지 않고 진실을 밝힌 것이다.
<중앙일보>는 이찬삼 기자 기사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훗날 방송통신위원장을 지낸 어느 언론학 교수와 마주앉았을 때 나는 언론학회가 이찬삼 기자에게 준 상을 취소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언론학회는 이찬삼 기자에게 준 상의 효력을 정지시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