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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Sep 25. 2020

22. 시니어는 원로가 아니다

시니어는 연장자일 뿐 ... 원로다운 원로를 본 게 언제인가? 

 오래 전 어느 식당에 갔을 때의 일이다. 옆 테이블의 노인 두 사람이 마주앉아 갑론을박을 하는데 인터넷 검색 한 번 하면 평정될 다툼이었다. 얼마 전 지인들과의 저녁 모임에선 철새 정치인의 표상이라고 할 이인제의 출신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기억이 서로 달라 결국 종결자 네이버에게 판정을 받았다. 

 “한양에 안 가 본 사람이 갔다 온 사람을 이긴다”는 옛말이 있다. 한양 출신의 판정관이 없던 고을의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리 임금이 살아도 그렇지 경복궁이 그렇게 클 리 없다”고 하면 한양 못 가 본 다수가 고개를 주억거렸을 것이다. 이 도령 따라 한양에 다녀온 방자는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엔 시비를 하다가도 “신문에 그렇게 났어” 하면 판이 정리됐다. 신문이 유일한 플랫폼이던 시절의 일이다. 신문들이 네이버에 기사를 헐값에 벌크로 넘긴 후 네이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해당 기사가 어느 신문에 났는지는 기자들만 관심이 있다.   

 얼마 전부터 핸드폰이 "오전 10시입니다" 식으로 매시 시보를 했다. 새벽에 “오전 2시입니다” 소리에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끄는 방법을 몰랐다. 나보다 기계에 밝은 아내에게 물었지만 해결이 안 됐다. 우리 집의 기술이사였던, 독립한 딸과의 톡방에 “기술이사 직무대행인 엄마도 모른다”고 한 줄 올렸다. “폰을 직접 봐야 알 거 같다”던 딸이 ‘갤럭시 정각 알림 해제 이렇게 해봐요’란 네이버 블로그 화면을 캡처해 톡방에 올렸다. 이렇게 덧붙였다.  

“지성인의 기본 예의 : 네이버·유튜브에서 검색해 보고 안 나오면 물어 본다. ㅋㅋㅋ 현대 한국에서 모르는 건 죄 아니지만 네이버·유튜브 검색도 안 해보는 것은 죄다. 그들이 자녀보다 똑똑하고 친절할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다운 충고이다. 

딸내미는 "네이버와 유튜브가 조언자로서 자녀보다 똑똑할뿐더러 더 친절하다"고 충고했다. 


 나는 사실 네이버를 백과사전으로만 썼지 문제 해결을 위한 집단지성의 보고로 인식하지 못했다. 유튜버이기도 한 딸은 “60대들이여, 네이버와 유튜브를 가까이 하라”는 가르침으로 지적질을 마무리했다.   

 주변에 시니어 유튜버들이 더러 있다. 코로나19로 강의가 멈춘 한 유학파 선배는 강의를 쉬는 동안 유튜브에 탐닉한 끝에 ‘BTS와 코비드19’란 주제의 강의 콘텐츠를 개발했다. 유튜브 하는 전직 대법관과 인터뷰한 일도 있다. 

 농협 공채 출신으로 강원도 정무부지사를 지낸 조관일 창의경영연구소 대표는 지금까지 50여 권의 자기계발서를 냈다. 그는 ‘조관일 TV’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자신이 쓴 자기계발서를 영상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캐치 프레이즈가 ‘자기계발이 필요한 모두를 위한 채널’이다. 구독자 수는 15만 명에 육박한다.  

 고희를 넘긴 그의 당면 목표는 자기계발 분야 최고의 유튜버가 되는 것이다. 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50여 권의 저서를 유튜브 강의로 만들면 20년 간 강의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85세에 독특한 노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뭘 하며 살든 세 끼 밥이야 먹겠지만 사람은 살아가는 목표가 있어야 돼요. 나의 의지로 태어난 세상은 아니지만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나의 역사를 써야죠.”

 지난해 만화책 <아름다운 시대 라벨르 에뽀끄>를 펴낸 신일용 만화가는 삼성 출신으로 효성그룹 계열사 갤럭시아커뮤니케이션즈 대표를 지냈다. 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인생 2막을 아마추어 만화가로 살겠다”고 말했다. 베이비부머는 혜택 받은 세대로서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그는 젊은 세대를 자기 자신만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은퇴 후엔 한겨울 나목이 보여주는 벌거벗은 힘, 벌거벗은 자의 아름다움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벌거벗은 힘은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떡갈나무’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대 삶을 살아라 젊었든 늙었든, 저기 저 떡갈나무 같이. 마침내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면 보라, 나무가 서 있는 줄기와 가지의 벌거벗은 힘(naked strength)을.” 

 베이비부머는 시니어이다. 이 시대 시니어는 그저 연장자일 뿐이다. 지혜로운 원로가 아니다. 패션전문자료사전은 시니어를 생활연령 기준 40~50세 넘은 어르신이라고 풀이한다. 우리 사회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는 데 나름 공헌했지만 현역 시절 세운 공은 이미 빛이 바랬다.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은 경험은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다. 그래서 생긴 박탈감이 광화문 광장에서 분출되는지도 모른다. 원로다운 원로를 본 게 언제인가? ‘녹색평론’을 만들어 지난 30년 간 “생태학적 위기를 불러온 자본주의, 산업주의 논리를 완전히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종철 선생도 가셨다.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나라는 성장을 향해 폭주하는 기관차였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꺾이기 전에도 성장은 더 이상 적실성 있는 대안이 아니었다. 세컨드 라이프엔 개인의 차원에서도 성장이 더 이상 목표가 될 수 없다. 인생 2막은 성장을 통해서는 더 이상 행복해 지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는 구순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오늘의 할 일’이 없으면 불안해 한다. 앞만 보고 달려온 산업화 세대가 공유하는 성향일 것이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지낸 아버지에게 나는 과학책을 읽으시라고 권했다. 내용이 잘 입력이 안 되면 어떤가?

 성공적인 노화(successful aging)를 위해서는 독서만큼 좋은 취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나이 듦의 이로움>을 번역한 최원일 광주과학기술원(GIST)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들은 다수가 연간 책 한 권도 읽지 않는다. 우리와 대조적으로 미국 노인들은 대부분 취미가 독서라고 한다. 대학생들보다 2~3배 책을 많이 읽는다. 그래서 70대 노인이 대학생보다 작가 이름을 더 많이 안다고 한다.

 노화에 대해 연구하는 최 교수는 나와의 인터뷰 때 “책을 많이 읽으면 언어 능력, 인지적 능력이 발달하는데 나이 들어 책을 읽으면 동년배의 독서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 격차가 더 크다”고 말했다.

“책을 통해 얻는 간접 경험의 가치는 두말할 나위 없지만, 노인이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 인물과 상호작용하면서 본인의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평생 종이 매체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나는 가벼운 활자 중독 증세가 있다. 책을 집어 들면 보통 책 뒷표지의 정가까지 읽는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일을 하기 위해 내 일에 필요한 만큼만 책을 읽는다. 종이책과 거리가 먼 기자 지망생 제자들에게도 나는 발췌독을 권한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대학 선배는 1980년대 대학원 시절 책 못 읽어 스트레스를 받는 나에게 말했다. 

“요즘 누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니? 독서는 발췌독이지.”

 당시 대학원생들은 학교 앞 복사집에 원서를 맡겨 해적판 원서를 만들었다. 표지는 보통 하늘색이었다. 나의 은사 최정호 교수는 원전으로부터 지식을 얻는 건 대학원생의 특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책 욕심에 해적판 원서를 만들어 놓고 읽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발췌독을 하라는 선배의 충고에 시름을 덜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반퇴(절반의 은퇴)했지만 별무취미인 나에게 언젠가 아내가 은퇴하면 뭘 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평생 읽지 못한 책을 읽을 거라고 했다. 시력이 협조하겠느냐고 아내가 반문했다. 오래 전 수정체를 인공물로 대체하는 백내장 수술을 한 덕에 독서엔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다. 어쩌다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육백만 불의 사나이’라고 우긴다. 1970년대에 방영된 미드 ‘육백만 불의 사나이’엔 왼쪽 눈 등을 잃은 후 사이보그 시술 끝에 재탄생한 바이오닉 인간이 등장한다. 육백만 불은 시술 비용이다. 리 메이저스가 연기한 이 OSI(과학정보국) 요원의 눈은 20배 줌이 가능하고 열 감지 센서 기능도 있다. 밤에도 잘 볼 수 있다. 

 아내와 함께 삼성의료원에 백내장 수술을 받으러 가던 날 실은 저조했었다. ‘마흔이 안 돼 노인성 질환을 앓다니….’ 갈 때까지 인공 수정체로 교환한다는 것도 몰랐다. 의사가 어느 거리의 물체를 나안으로 보겠느냐고 물었다. 이날 인공 수정체로 갈아 끼운 덕에 나는 환갑을 넘기고도 나안으로 책을 볼 수 있다. 안 좋아 보이는 일에도 이렇게 좋은 구석이 있다.  

 나는 완전히 은퇴해 아내와 도서관으로 출근할 꿈을 꾼다. 요즘처럼 하늘이 높으면 제멋대로 퇴근해 빌린 도서관 책을 끼고 동네 공원이나 카페를 찾을 것이다. 의무감 없는 독서는 또 얼마나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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