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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 Apr 10. 2022

야근을 뒤로하고 마주한 리사이틀

잠깐 던져놓으면 행복해지던걸!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좋아하게 된 피아노 연주 감상은 어찌어찌 이번 쇼팽 콩쿠르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시차 덕에 쇼팽 콩쿠르 live는 대부분 새벽에 시작되었고, 졸음을 참아가며 조성진 다음을 잇는 우승자는 누구일까라는 마음으로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느 다른 피아노 덕후들과는 달리, 아직은 내 감상평을 멋들어지게 표현할 수 없다. 그저 저 연주가 느낌이 오네, 라는 정도로 누군가를 응원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마음이 가장 갔던 피아니스트가 바로 이혁 피아니스트였다. 언젠가 이혁 피아니스트가 리사이틀을 연다면, 바로 가야지. 라는 마음을 먹던 찰나 리사이틀이 빠르게 잡히게 되었고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미리 예매를 해두었다. 핸드폰 액정을 통해서나 들을 수 있었던 그의 연주를,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마주하게 되어 기쁠 뿐이었다.

 그러나 리사이틀 일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내 업무는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취소할 마음을 먹을 정도로 일은 너무 많았고, 감정을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일에 치여 있었다. 리사이틀 당일 날도 이미 마음이 조여왔다. 어떻게 해도 시간 안에 업무를 끝낼 수 없을 것 같았고, 이미 리사이틀을 가는 것을 단념하던 찰나였다. 그 순간 내가 가고 싶은 리사이틀도 못 가면 돈을 버는 의미가 무엇 있나 싶어 그냥 그대로 노트북을 챙겨 사무실 밖을 나왔다. 주변에 있던 동료들의 의아해하던 눈길을 뒤로하고 황급히 작별 인사를 고하며 사무실을 나왔다.  차마 노트북을 사무실에 두고 올 순 없었고 양심상 집에서 마무리는 하려고 챙겨는 나왔다. 가는 내내 발걸음이 무겁긴 했지만 이미 일은 저지르고 난 뒤였다. 어찌어찌 시간 계산도 잘못했는지, 아슬아슬하게 콘서트 홀에 도착해 표 바꾸랴, 프로그램 북 사랴 이리저리 뛰어다니니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상태로 착석하였다. 털썩 의자에 앉은 순간까지도 떨쳐놓고 온 업무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앙코르가 3부라구요? 이런 리사이틀은 처음이지 뭐에요.


 사실 이 날의 프로그램들 중 낯선 곡들도 다수 있었다. 1부는 거의 처음 듣는 곡들이었고, 2부부터가 내가 조금은 들어보았던 곡들이었다. 어떻게 저런 작은 체구에서 섬세하면서도 강단 넘치게 연주할 수 있을까? 놀라웠고 새로운 신예 피아니스트 발견에 뿌듯한 시간들이었다. 앙코르가 시작되면서부터 쇼팽 콩쿠르 때 쳤던 곡들은 사탕 한 알, 한 알 꺼내듯 연주해주었다. 앙코르 중 한 곡으로 영웅 폴로네이즈를 치는 순간 내 몸에서 소름이 쫙- 끼쳤다. 아, 내가 오늘 이 리사이틀을 취소하지 못할 수밖에 없던 이유였구나. 내가 여태까지 야근했던 모든 순간들이 용서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찰나였지만) 음악은 그때의 모든 공간, 냄새, 추억들로 기억된다고 하는데 이혁의 영폴은 마치 나에게 '그렇게 취소하고 싶다더니, 다 떨쳐놓고 온 보람이 있지?' 라며 나를 달래준 느낌이었다. 11시가 다 돼가는 저녁 택시를 타는 순간까지도 너무 행복했다.



 물론 리사이틀을 보고 돌아와 새벽 2시까지 야근을 하긴 하였으나, 떨쳐놓지 않고 사무실에서 아등바등했음 어쩔까 아직도 생각하면 아찔하다. 새벽 2시에 노트북을 끄는 순간에도, 예술을 향유하고 있음에 감사하다. 그동안 배웠던 악기를 배웠으나 현실적 이유로 놓고 지냈던 사람들, 아니면 악기를 배우고 싶은데 망설였던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면 붙잡고 말해주고 싶다. 악기를 다시 연주해보시라고.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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