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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Jul 14. 2023

백령도 표류기 4

나흘째 날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한 점 구름도 옅은 안개도 없이 쾌청했다. 이런 날씨를 군 복무 시절 ‘seven mile clear’라고 불렀고. 모든 일정이 계획대로 움직인다는 신호였다. 그동안 발목을 잡았던 날씨가 드디어 출항을 허락한 듯 보였다. 얼른 씻고 나가서 냉장창고 앞 평상에 내놓았을 하얀 비닐봉지를 들고 버스에 오르면 이곳을 떠나게 되는 것이었다. 문자 도착 알림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은 왜 이리 틀리지 않는 걸까.

    

‘4/7(인천행) 07:00 코리아 프린세스호는 해상의 기상악화로 운항이 통제되었습니다. 예매하신 표는 4/8(인천행)07:00 코리아 프린세스호로 자동 순연처리 됩니다. 이용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려고속훼리’‘    

 

  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대로 누어버렸다. 가깝게 들리던 인기척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구 하나 말을 걸지도 푸념을 해대지도 않는 숙소는 적막 속에 휩싸였다. 문자 하나가 단 몇 초 만에 우리 모두를 굳게 만들어 버렸다. 예상치도 못하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 그저 하늘의 처분만 기다리는 하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머릿속 깊이 파고들었다.

  어제는 안개 때문이라지만 오늘은 무엇 때문일까? 동기 단톡방에 사흘째 못 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번 여행에 동참하지 못했지만, 관심을 보인 기상장교 출신 친구가 서해 해상에 부는 심한 바람 때문에 파고가 4m 이상이라면서 출항통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뱃길 기상 상황을 표시한 지도도 단톡방에 게시했다. 우리 처지를 위로 하는 친구들의 글도 연이어 올라왔다. 백령도에 갇힌 우리를 재밌는 관찰 예능 프로그램 보듯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루, 이틀 날짜가 늘어 날수록 단톡방 글도 점점 많아졌다.

  가족 단톡방에 운항통제 내용을 알리자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날을 거르지 않고 저녁 무렵에 전화로 안부를 묻곤 했다. 이번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는지 이른 아침에 전화한 것이었다. 며칠째 백령도에 갇혀 있는 내가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학교에 가기 전이라며 전화를 건네받은 손녀도 건강하게 잘 보내고 오라며 나를 위로했다.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아내가 보인 짤막한 톡과는 전혀 다른 뭉클함이 밀려왔다. 문득 생각해 보니 남의 새끼가 나를 챙기고 있었다. 내 새끼인 두 아들은 여기 있는 내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것, 사내들이란 원래 그런 종자라는 것이 모두 증명된 셈이었다. 

  이곳에 이렇게 갇혀 있는데, 왜 아무런 말이 없냐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시비를 걸었다. 마누라 잔소리 안 들어서 좋을 텐데 왜 투정이냐며 빈정댔다. 혹 내일 나오더라도 자신은 집에 없으니 알아서 하라면서, 영등포에서 아침 7시 열차를 타고 1박 2일 포항 여행을 간다는 것이었다. 내일 가나 모레 가나, 집에 혼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친구들과 노닥거리는 것이 더 나을듯싶었다. 아내의 전화가 오히려 나가지 못해 안달이 났던 마음을 가라앉혀 버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인기척이 나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8시 30분에 출항하는 배가 뜬다면 오늘 오후에 나갈 수도 있다는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백령도 들어올 때 탔던 코리아 프라이드호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인천과 백령도에서 각각 승객을 태우고 오가는 항로인데, 자리를 전부 채워 운항해야 돈이 되지 않겠는가. 오후에 날씨가 좋아진다고 해도 가두리에 갇힌 물고기 신세인 승객을 위해 반도 차지 않는 배를 과연 띄울까.

  이런 의심을 하면서도 인천에서 배가 뜨길 바랐다. TV를 켜 놓은 방안에서 두어 시간을 뒹굴었다. 인천항 출발, 백령도 행 배 운항이 취소되었다는 인천항 여객선 정보가 확인된 후에도 아침 먹으러 가자는 회장단의 안내도, 방마다 다니며 새로운 상황이나 일정을 전달하던 전장군 모습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지자 파도처럼 밀려온 실망감 탓일 거다.

  이대로 뒹굴고 있을 순 없었다. 아침을 거르지 않는 생활 습관 때문에 배가 고팠다. 방에서 나와 숙소 앞마당으로 내려갔다. 들어오는 배 안에서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던 친구가 보였다.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하자며 편의점 가는 길로 잡아끌었다. 편의점 안에는 이미 친구 서너 명이 무언가를 챙겨 먹고 있었다. 인천에서 상품이 들어오지 않아 조금 지나면 먹거리가 다 떨어진다며 보이는 대로 챙겨 먹으라고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몇 개 남지 않은 빵 한 개와 흰 우유를 집어 들었다. 배를 채울 만한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진열대에는 듬성듬성 물건이 비어 있었다. 배가 사흘씩이나 들어오지 않은 탓에 인기 있는 상품은 대부분 동이 났다. 먹는 것부터 소일거리까지 각자도생 상황에 우리는 내몰렸다. 

  허기를 달래고 나자 친구는 커피 한잔하러 별 다방으로 가자며 앞장섰다. 오고 가는 차 안에서 별 다방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 유명한 곳이 내 눈엔 왜 띄지 않았을까. 한산한 길을 따라 백령병원 앞까지 걸어갔다. 둘째 날 전장군과 들른 이름이 알려진 프랜차이즈 빵집과 함께 있는 커피집이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넓은 홀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시간을 보내기 좋은 창가에 자리 잡았다. 속도 모르는 사람은 두 사람이 다정하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볼 것이었다. 

  한가하면 쓸데없는 생각이 앞선다고 하지 않던가. 내일도 못 나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낸 날이 언제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할 일이 없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었다. 커피 한 모금을 넘기자 전화벨이 울렸다. 오늘 오후에 실사를 가도 되는지 묻는 전화였다. 아직도 백령도에 있다는 말에 예상했다는 듯 다음 주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것이었다. 서해 뱃길이 끊겼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친구의 제주도 살이 준비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기상장교 출신인 그는 이곳에 온 이래 기상에 관한 이야기나 예보를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에 있는 다른 친구가 기상 상황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강릉에서 근무해서 서해 기상은 몰라”

  대답은 명쾌했다. 난 더 질문할 것도 들을 말도 없었다. 백령도 여행에서 들은 기발한 명언으로 오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친구도 나도 말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우리 둘만 소외된 것처럼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향했다. 각자의 방식대로 부활절을 맞아 성당이나 교회에 가고, 일부는 숙소에서 술과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회장단은 마음을 추슬렀는지 첫날 점심을 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바로 두무진으로 가서 산책한 다음, 저녁도 그곳에서 해결하고 돌아오는 것이 오늘 일정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와서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 된 두무진은 네 번째 방문인 셈이었다. 4자가 무려 네 번이나 겹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4월 4일에 이곳에 와서 같은 식당에서 네 번 식사하고, 두무진에 네 번 가는 것이었다. 거기다 우린 13명이고, 금요일이었다. 동서양에서 안 좋다는 숫자가 모두 모이는 두무진에 다시 가는 것이었다. 

  택시비 정도로 우리를 태우고 간다는 빨강 까나리 버스에 올랐다. 두무진으로 가는 길은 비 내릴 때 풍경이나, 안개가 낀 모습과 전혀 달랐다. 파란 하늘과 녹색 산 야가 연인 사이처럼 어울려 보였다. 바다 건너 북한 땅도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자연을 표현할 수 있는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모습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눈으로만 보고 느끼기에는 너무 아까운 풍경이 나를 가로 막고 서있었다. 내 앞에 비경이 펼쳐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 몸의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젖혔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콧속을 파고드는 상쾌한 공기, 발바닥에 전해지는 단단한 질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모두가 경이로웠다. 풍파에 깎여 속살이 훤하게 드러난 거대한 기암괴석 사이로 들어갔다. 옅은 속치마에 가려져 있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사람, 바위, 바다, 하늘이 모두 하나로 어울렸다. 사진이 내 느낌의 반의반도 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셔터를 눌러 댔다. 지금까지 찍은 양보다 서너 배는 더 될듯했다.

  하늘은 두무진의 찬란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우리를 사흘이나 붙잡았던 것일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말이 맞았다. 두무진은 우리를 위해 누구도 들이지 않았다. 우리 13명에게만 자신이 숨겨온 모습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옛날 왕도 이런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비 오는 날도 안개 낀 날도 볼 만했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두무진은 신이 빚어놓은 절경으로 백령도를 상징하는 곳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얼추 4km 해안을 따라 늘어선 50m 높이의  절경은 십억 년 전 모래가 굳어 만들어졌다. 선대암, 장군바위, 형제바위, 코끼리바위 등 기암괴석이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서있다. 백령도를 찾은 사람 중에서 날씨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두무진을 모두 보고, 마음에 담은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것이었다. 첫날엔 유람선을 타고 비에 젖은 두무진을, 둘째 날엔 안개가 낀 해변 산책로를 따라 속살 보이기 부끄러워 몸을 가리는 여인 같은 안개에 덮인 두무진을 보았다.

  어제 막걸리를 먹은 식당에 이른 저녁이 차려졌다. 장산곶이 빤히 보였다. 전장군이 왔던 집이라서 예약한 것일까, 아니면 문을 연 집이 이 집뿐이었을까. 간단한 회와 매운탕이 저녁 메뉴였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돌아와 TV를 보며 벽에 기대고 있었다. 다른 호실에 있는 친구가 달걀을 들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달걀을 삶으러 왔다고 하면서 회장단 방에 친구들이 모여 있으니 그리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방안에 둘러앉아 주전부리와 와인 한잔하면서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방에 들어 왔던 친구가 거기서도 달걀을 삶고 있었다. 술안주로 달걀을 삶는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편의점에 남아 있는 먹거리가 달걀과 사과뿐이어서 내일 배 타러 갈 때 아침 요깃거리로 준비하는 것이었다. 소풍 갈 때 꼭 챙겨간 것 중 하나가 삶은 달걀이 아니었던가. 달걀을 삶아 준비하는 친구의 마음과 정성이 하늘에 닿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의 조건은 동양화의 여백처럼 호젓한 곳이어야 했다. 찾는 사람이 많아 번잡하고 수선한 곳에 가면, 풍경이 아무리 멋지더라도 사람 뒤통수만 보고 따라가는 내 몸은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힘이 빠져 늘 피곤했다. 내가 가끔 섬에 가는 이유가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풍경뿐 아니라 동행한 사람들의 참모습을 보고, 나를 생각할 시간을 갖고자 함이었다. 여행지에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세상사는 지혜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백령도 여행을 결정한 것도 예전에 미처 보지 못한 절경도 보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같이 먹고, 자며 듣는 이야기에서 새로운 글감을 찾고자 한 욕심도 컸다.

  백령도는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십억 년이란 시간과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이 알 수 없는 뭉클함으로 밀려왔다. 서해 섬은 대부분 두어 시간이면 닿지만, 백령도는 네 시간을 가야 했다. 휴전선이 가깝게 있음에도 긴장감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긴장감과는 거리가 먼 진한 한가로움이 안개처럼 섬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달리는 차도 급하게 걷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하루에 두 번 인천에서 들어 오는 배가 없다면, 서해에 혼자 떠 있는 호젓한 섬일 뿐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마신 술과 친구의 따뜻한 마음에 취해 나흘째 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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