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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벌새날다 Jul 09. 2020

엄마가 들려주는, 나폴리탄 괴담

얘들아, 엄마가 늘 말했지. 우리 집에는 엄마 아빠의 규칙이 있으니 너희들이 엄마 아빠의 딸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요새 밤에 자주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잠 설칠 일들이 많아서 우리 집의 규칙을 몇 가지 더 너희들에게 알려줘야 할 필요성이 생겼어. 만약에 이 일들을 지키지 않아서 생기는 좋지 않은 일들의 책임은 모두 너희에게 있다는 걸 알아 둬.

1.

모두가 잠든 밤에 현관에 처음 보는 신발이 있다면 절대로 신어보지 마.

아빠야 원래 자기 신발을 세 켤레건 네 켤레건 현관에 빼 두는 사람이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단다. 새로 산 구두나 샌들은 옷장 안에 숨겨놨다가 모두의 시선이 물러졌을 때에야 꺼내서 “작년에 산 건데 처음 보는 것처럼 왜그래~” 라며 이야길 하는 편이지. 그런데 처음 보는 신발이 현관에 있다면 그건 우리 집 신발이 아니야. 혹시 신은 여자아이를 꾀어 계속 춤을 추게 만들고, 결국은 도끼로 발목을 찍어내게 만드는 <빨간 구두> 이야기를 아니? 얼마 전에 이 아파트에서 초등학생이 사라졌다더라.

2.

모두가 잠든 밤에 세탁기가 도는 소리가 난다면 절대로 세탁실을 들여다보지 마.

밤에는 세탁기나 건조기를 돌리지 않는 것이 엄마의 당연한 철칙이니, 세탁기가 돌 리가 없지. 그런데 세탁기가 돌고 있다면 소리가 들리더라도 절대로 봐서는 안 돼. 그 안에서 돌고 있는 뭐랑 눈이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잖니.

3.

모두가 잠든 밤에 도마에 칼질을 하는 소리가 들리고, “얘들아~ 와서 반찬 간 좀 봐” 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고 잠들어야 해.
낮에도 잘 안 만드는 반찬, 밤에 만들 리가 없잖아. 엄마 알지?

4.

모두가 잠든 밤에 자다가 목이 말라서 나왔는데 소파에 머리 긴 여자가 TV를 향해 앉아 있다면 “엄마!” 라고 부르면서 다가가서는 안 돼. 엄마는 밤에는 팩을 하기 위해 머리를 틀어올리고 있으니까 그 여자는 엄마가 아니야. 그 머리 긴 여자가 고개를 천천히 돌리려 한다면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질끈 감아. 그 여자는 고개를 360도 돌려서 다시 TV쪽으로 고개를 돌릴 테니까.

5.

모두가 잠든 밤에 초인종이 울리고 “택배입니다” 소리가 나면 그것이 아무리 기다리던 장난감이라도 현관으로 뛰어나가지 말렴. 요새 모든 택배는 비대면 택배고 문 앞에 놓고 가니까. 만약에 문을 연다면 너는 택배 상자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받아들게 되겠지.

6.

모두가 잠든 밤에 커피머신의 진동 소리가 난다면 곁에 있는 동생의 침대에 기어들어가서 둘이 꼭 껴안고 이불을 덮어쓰렴. 우리 집 커피머신은 오래 전에 고장이 나서 엄마는 한참 전부터 드립 커피를 마시고 있단다. 그게 뭘 가는 소리인지는 글쎄, 나도 모르지.

7.

모두가 잠든 밤에 동생이 갑자기 일어나 중얼거리며 방을 서성인다면 절대 깨워서는 안 돼. 엄마의 동생도 몽유병 환자였단다. 갑자기 깨웠다가는 충격을 받고 놀랄 수 있거든. 실눈을 뜨고 지켜보되, 절대로 동생의 말에 대답해주거나 맞장구를 쳐서는 안 돼. 그러면 내일 밤 너희 둘은 몽롱한 채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란다.

8.

모두가 잠든 밤에 엄마의 핸드폰이 울리며 액정에 “김시완” 이라는 외삼촌 이름이 뜬다면 절대 받아서는 안 돼.
삼촌은 엄마에게 전화를 하지 않아. 기껏해야 카톡을 하지. 너희 둘은 둘 다 딸이라 모르겠지만 엄마와 엄마의 엄마 아들의 사이는 그런 거란다.

9.

모두가 잠든 밤에 거실에서 엄마와 아빠가 감미로운 음악에 맞춰서 얼싸안고 춤을 추고 있다면, 절대 그들에게 말을 걸거나 아는 척해서는 안 돼.
연애할 때도 엄마랑 아빠는 그런 적이 없거든. 그 사람들은 어떻게 보일지라도 엄마 아빠가 아니란다.

10.
모두가 잠든 밤에 놀이방에서 딸각이는 소리가 들린다면, 무서워하지 말고 조용히 문을 열어 보렴. 너희가 아직 어린아이인 동안은, 가끔 너희의 장난감들도 긴장을 풀고 자신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단다. 버즈와 우디, 보핍만이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은 아니야. 가끔은 이 세상의 장난감들도 자신을 사랑하는 어린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물론 다음날 아침 너희들은 “어제는 정말 재미있는 꿈을 꾸었어” 라고 엄마에게 이야기해줄 테지만 말이야.

11.
모두가 잠든 밤에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면, 나와서 엄마를 달래려 하거나 눈물을 닦아주려 하지 않아도 된단다. 너희는 너희의 단잠을 자렴.
엄마가 너희보다 더 어렸을 때 엄마의 엄마 울음소리에 깨었던 그 어떤 밤을 엄마는 아직도 기억한단다. 그리고 그 밤의 무력했던 감정까지도 기억한단다.
어른에게도 울고 싶은 날이 있단다. 혼자 지새우고 싶은 밤이 있단다.
그러니 깊은 밤 엄마의 눈물에는 무심한 채, 그저 꿈이었나 여기며 달콤한 잠을 더 청하렴.

12.
모두가 잠든 밤은 모두가 잠들어야 한단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똑같이 깨던 두 아이를 키우던 엄마에게, 모두가 잠든 밤은 비로소 4년만에 찾아온 엄마만의 시간이란다. 그러니, 그 밤을 온전히 보낼 수 있도록,
이 규칙을 잘 지켜주겠니. 사랑하는 아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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