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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야 May 30. 2024

'등신'이라는 말에 담긴 애정과 분노에 반응하기

괜찮지 않을 때 자신을 돌보는 연습

"괜찮으세요?"라는 말에 따라 나오는 다음 말은

"아, 네. 괜찮아요."이다. 상대가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안부를 살피는 상대를 향해 괜찮다는 신호를 줘야 안도하게 되는 마음이 있는 같다. 마치 문제해결의 첫 단계를 건너가는 느낌이랄까?

문제는 내 안부를 먼저 둘러보지 않고 습관적으로 '괜찮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먼저 나를 돌보기]에 대한 연습을 수도 없이 한 후에도 반사적으로 나오는 '괜찮아'라는 말의 초보적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몇 달,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한 동네에 사촌동생도 함께 살아 우리는 네 명이서 같이 수영을 배우러 다녔다. 그 날도 스포츠센터 버스에서 내린 후, 신호등없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동생들이 먼저 버스 앞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넜고 반대차선의 모든 차가 서 있었다. 동생들과 큰 간격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그대로 따라 횡단보도를 건넜다. 스포츠센터 버스 앞을 지나자마자 옆 차선에서 출발한 택시와 박았다.


 순간이었지만 몸이 살짝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얼떨떨하고 혼란스러운 느낌.

택시 기사는 차에서 내려 괜찮은지 물었다. 나는 "괜찮아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블랙박스와 CCTV 등이 지금처럼 갖춰져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택시 기사는 대강의 상태를 확인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던 것 같다. 택시기사는 "애들이 다 건너갔는지 알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니가 갑자기 탁 나와서 이래됐네. 달리던 차가 아니라서 괜찮을꺼다."하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동생은 "등신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뭐가 괜찮노?"라는 화와 걱정이 섞인 말을 뱉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 턱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후에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로는 동생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택시기사는 그대로 토꼈을(?) 것이라 했다. 동생의 말 한마디 덕분에 우리는 그 택시를 타고 우리집으로 갔고 택시기사가 직접 상황을 부모님께 설명하고 사고해결까지 할 수 있었다.


찢어진 턱을 꿰매고 흉터가 생겼지만 내게 더 오래 남은 것은 "등신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뭐가 괜찮노?"라는 동생의 말이다. 괜찮지 않던 상황에서 괜찮다 말하는 누나를 보며 느낀 답답함과 화와 애정(거기에 애정이 담겼을 거라고는 그 때의 동생과 나도 몰랐었겠지만), 자신을 먼저 보살펴야 한다는 깨달음, 어리숙하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등신'이라는 말에 담겨있다.

 그 말은 살아가며 [괜찮지 않을 때 괜찮은 척하고 있는 나를 느낄 때]마다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등신'처럼 행동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대학 친구는 30대가 된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넌 이기주의는 아닌데, 개인주의야. 남들이 해서 해야한다가 아니고 자기 생각에 따라 선택하는 개인주의라고 해야하나? 학교 다닐 때는 그게 어렵고 이상했는데 그게 쫌 좋아보인다고 해야하나? 사실 그게 쉽지 않잖아."


동생에게 '등신'소리를 들었던 그 때는 몸이 아픈 것보다 '동생이 감히 누나에게 등신이라 하다니!'하고 더 약이 올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그 말은 조금씩 스스로를 돌보게 하는 스위치가 된 것 같다. 그 때부터 자기 자신은 스스로 돌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니 말이다. 28년 전, '괜찮아'라는 말이 자동반사되던 나는 여전히 '괜찮아'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때로 정말 괜찮지 않은 일 앞에서는 '괜찮아?'라는 말에 '아니!'라고 말하며 있는 40대가 되었다. 

<출처: 미리캔버스>

내 아이들에게도, 우리반 아이들에게도 한결같이 해주는 말.

[괜찮지 않을 때는 안 괜찮다고 말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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