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위 임원의 보직 해임 소식
< Intro >
"그" 를 처음 만났던 건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인
입사 4년 차가 막 넘어가던 시기의 늦가을,
그러니까 정확히 2007년 11월이었습니다.
물론, 이메일이나 전화로 소통했던 적은
그전에도 있었지만, 직접 만나 같은 조직에서
근무하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회사 조직에는 매우 커다란 변화가 있었기에
지방 사업장에 근무하던 인원을 일부만 남기고
조직을 모두 서울 본사 산하(傘下)로 합치는,
말하자면 내부의 M&A 같은 조직 개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한 원래 본사에 근무했던 인원보다
오히려, "그" 를 비롯한 지방사업장에 있던 인원들이
마치 예전부터 이곳 본사에 계속 있었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굴러 들어온, 지방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박혀 있던, 원래 본사에 있던 사람들보다
목소리가 더 크고 기(氣)가 더 센 듯했거든요.
이건 뭐죠? 사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感知)되었는데...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
그전까지 이 회사에선,
학연(學緣)이나 지연(地緣) 같은
연고주의(緣故主義)는 사실상 금기(禁忌)였는데요.
그들이 오고나서부터는
정치권에서나 나오던 TK 혹은 PK 같은 용어가
전혀 낯설지 않게 등장하면서
그들만의 카르텔(Kartell),
누구누구 라인(Line),
그리고 어느 부서 출신 등등
이런 게 진급이나 보직임명, 인사이동 등
궁극적으로는 직장 내에서의 출세(出世)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조직 내에서 투명성(透明性)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
국제 시세 변동으로 원자재가(價)가 인하(引下)되어
납품단가가 조정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석연치 않은 사유로 협력사의 납품단가를
그대로 둔, (이건 납품단가 인상과 같은 효과입니다.)
당시 "그" 의 라인이었던, 前 담당자분께
"이거 왜 그대로 두셨죠?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니, 몇 초간 침묵이 흐르더군요.
이윽고 그 선배가 말하기를,
"너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같이 술 한잔 할까?"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했는데요.
분명히, 그 선배와 저만 만나기로 했던 거 같은데,
저녁식사 장소인 식당에 도착하니,
웬걸, 그 협력업체의 영업 담당 직원들이 미리
고기를 구워놓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고기가 잘 익었네요. 같이 드시죠."
"저희가 양주도 몇 병 준비했습니다."
"..................................."
그런 상황에서 저는 그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저랑만 단 둘이 보시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그랬더니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야, 너희들 잠시 나가서 담배나 한 대씩 피우고 와."
그래서 이후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분과 둘만 있긴 했는데,
저는 그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도덕적 해이(解弛),
즉,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는
그때부터 서서히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하생략)
2.
연말에 회사는 송년회(送年會) 철입니다.
그 시기에는 조직 내에서도
이런저런 부류의 사람들끼리
송년회를 자주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시는 술은,
거의 매번 왁자지껄하고 값비싼 술이었고
하도급(下都給) 협력사(協力社)의
공식적인(?) 찬조(贊助)가 있거나,
혹은 거래업체의 담당자가 우리와 합석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이 많다는 핑계로 야근하면서
그들의 제안을 몇 번이고 거부했었는데,
당시 술 취한 상사들의 연락이 빗발쳤고...
"야, 너만 깨끗하고 너만 잘났냐?" 뭐 이런 류의
비아냥거림과 따돌림을 견디기 힘들어
어느 날 큰 맘을 먹고 그들이 안내한 곳으로
퇴근 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안내한 곳은 뱅뱅사거리 뒤편
휘황찬란한 불빛의 유흥가(遊興街)였는데요,
지하에 있던, 간판이 없는 어떤 업소에 들어가니
절반은 아는 얼굴(사내 직원과 협력사 직원)이었는데,
절반은 얼굴을 모르는 젊은 아가씨들이더라고요.
하아... 업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저를 안내해 준,
얼굴을 거의 다 뜯어고친 그 여성분을 봤을 때,
그리고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눈에 확 들어온,
와이셔츠 단추를 모두 풀어헤친, 혹은 그보다 더했던
직장선배들의 모습을 봤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이란...
저는 잠깐동안 맨 정신으로 앉아 있다가
살짝 도망쳐 나왔는데, 그때 저를 잡았던
그 조폭(組暴) 같았던 TK 선배의 그 눈초리,
거기에 "우리 조직에 너 같은 놈 필요 없다." 라며
꼬부라진 혀를 놀리면서 소리 지르던 PK 선배의 모습,
게다가 저의 그런 모습을 처량(凄涼)하게 바라보던,
협력사 영업담당 중역(重役)의 모습.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 탓에 몸은 얼어붙었지만,
당시 충격을 상당히 많이 받은 나머지,
제 등에서는 살짝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밖으로 나가자마자 거짓말처럼 모범택시가 와서
저는 그거라도 잡아타고 기사님께 행선지를 불렀는데,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리면서
택시비 하라며 빳빳한 지폐 몇 장이 들어왔고,
저는 그때 이 조직을 탈출해야겠다는 마음을
아주 굳게 먹었습니다.
(이하생략)
3.
하지만 소속 조직을 나가는 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 는 탄탄대로를 달리며,
결국 조직장(長)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려운
정신적인 고통을 겨우 참으며,
조직장 모르게 인사(人事) 팀과 면담하여
타조직으로 발령 나는 것이 거의 확정되었을 무렵,
어떻게 "그" 는 그 정보를 알았는지
무작정 저를 본인의 집 앞으로 불러내더라고요.
그때 저는 강남 대치동의 고급 일식집 룸에서
"그" 에게 두어 시간 정도 면담을 당했는데,
그날도 잠시 식당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그 고급 일식집의, 살짝 문이 열린 다른 룸에서,
특정 협력사의 영업팀장과 중역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방 먼 곳에 근무하고 있고,
서울에 올라온들 행동반경은 우리 회사 근방일 텐데
그런데 그들이 그 시간에 다른 데도 아닌,
그 동네의 고급 일식집에 있다?
그렇다면 그건, 우연(偶然) 치고는
너무 작위적(作爲的)인 것 같았습니다.
(이하생략)
4.
"그" 는 거래처에 출장을 갈 땐
먼 곳이더라도 KTX를 타지 않고
대부분 자차(自車)를 이용했는데,
운전은 매번 저 같은 직원들의 몫이었습니다.
게다가 내려갈 때도 새벽같이 갔는데
올라올 때도 하루를 넘긴 새벽에 오더라고요.
왜냐고요? "그" 는 꼭 술을 마셔야 했거든요.
비싼 곳에서 비싼 음식과 비싼 술을요.
지방 산골짜기의 흑염소, 산양(山羊), 한우 등등
몸에 좋다고 하는 건 모두 다 거래처에서
"그" 에게 접대(接待)하더라고요.
저는 그때 "그" 와 몇 번
겸상(兼床)을 하기도 했었지만,
별로 내키지가 않아서인지,
그 자리가 계속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그" 는 그럴 때마다,
"야, 너는 내 덕에 이런 거 먹어보는 거다?"
"너 따위가 언제 이런 걸 먹어보겠냐? 너 출세했다!"
이런 말을 계속 해댔습니다.
그리고 "그" 와 같이 갔던 해외출장.
회사 총무팀에선 분명히
이코노미 클래스의 항공권을 2장 제공했는데,
불행 중 다행히도,
그는 당연하듯 어디에선가
비즈니스 클래스의 항공권을 1장 구해오더라고요.
뭐, 어디에서 제공해 줬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저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왜냐고요?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그" 와 같이 옆자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
정말 너무나도 힘든 고역(苦役)이었거든요.
(이하생략)
5.
이후 저는 그룹 감사실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감사실은 업무개선(業務改善)도 담당하지만
무엇보다 투명하지 못한 자들을 거르는 조직이라
사실 직급이 낮은 제가
업무를 제대로 하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하나 일을 배워가던 무렵,
그때 감사실의 선배들 중 마치 형사(刑事) 같았던
소위 말하는 몇몇 "칼잡이" 분들이
"그" 를 타깃으로 수사(搜査)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기명채권(無記名債券)이라는 단어를
접했던 것도,
차명계좌(借名計座)라는 단어를
정치권의 뉴스가 아닌 직장에서 듣는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을(乙)의 입장인 거래처와 협력업체 등에서
많은 무시(無視)와 멸시(蔑視)를 당한 일부 직원 중
누군가는 애꿎은 저에게 대놓고 불평을 했고,
그리고 또 어떤 누군가는 투서(投書)를 보냈지만,
그러나 확실한 물증(物證)을 제공해 주는
용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면, 혹시라도 모를 보복(報復)을 당하는 순간,
그 업계에선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다고
다들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그러다 보니, "그" 는 윗선까지 쭉쭉 올라갔고,
사내 정치권에서는 절대 무시하지 못할
사실상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주변엔 이미
상당한 충성심을 가진 심복(心腹)들이 있었고
또 그 라인을 타기 위한 직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밀어주기" 등을 통해
매출이 급성장 중인 몇몇 거래처로부터
정치자금을 조달받기가 용이했었겠지요.
그래서 "그" 는 이제 누군가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살아있는 권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약점(?)을 알고 있던
저를 비롯한 당시 감사실의 직원들은 모두,
"사후(死後)에 지옥의 불구덩이에나 빠져라!" 라고
"그" 를 향해 끝없는 저주(詛呪)를 퍼부었지만,
변하는 건 없었으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이하생략)
6.
최근 "그" 가 계열회사로 전출(轉出)된 뒤에도
그쪽 조직에서 계속 잘 나가고 있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씁쓸한 마음이 들었었는데,
얼마 전 "그" 가 개인비위(個人非違)로 인해
보직해임(補職解任)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 드디어! 저를 비롯한, 감사실 선배들의
숙원사업(宿願事業)이 이뤄졌네요.
나중에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실은 이번에 그가 타깃(Target)은 아니었는데,
다른 누군가를 표적수사(標的搜査)로 털다(?) 보니
예상 밖의 상황이 발생하여
급기야는 "판도라의 상자" 가 열렸고
그러다 보니 범법자(犯法者)가
줄줄이 사탕으로 속출(續出)하게 되어
그를 검거(檢擧)하고 형(刑)을 선고(宣告)하는 게
술술 잘 풀려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정의(正義)는 살아있는 걸까요?
그 소식을 듣고 저는
처음엔 너무나도 뛸 듯이 기뻤지만
한편으론 지난 시절,
특히 직장생활 초년차 때 겪었던
힘들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기억을 스치듯 지나가면서
마음 한편이 아려왔습니다.
제 회사생활을 아주 힘들게 만들었던
"그" 와의 얽힌 기억,
제가 이 글에 적은 건
빙산(氷山)의 일각(一角) 일뿐입니다.
< Outro >
저는 기업 간의 거래(去來)를 담당하는 직원으로,
"갑"과 "을"의 관계에 있어서의 도덕성(道德性)은
스스로 체득(體得)해서 배웠습니다.
이 바닥 어느 누구도 저에게 도덕성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더군요.
그리고 저는, 사람이 배우고 배우지 않고는
학력(學歷)이나 학벌(學閥)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도덕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졸(高卒) 임에도
뛰어난 도덕성을 갖춘 직원이 있는 반면,
명문대학(明文大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덜 된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또 의문인 것은
비단 직장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치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니, 오히려 정치판이 먼저고
그에 따라 직장에서의 사내정치도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맞는 표현이겠죠.
범죄 혐의가 있어서 재판이 진행 중이었던 후보자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도 아이러니(irony)이고,
또 전직(前職) 대통령이 탄핵(彈劾)되었는데,
전직 대통령이 소속되었던 정당(政黨)에서는
아직까지도 그의 영향력이
매우 큰 상황이라는 것도 아이러니입니다.
한편, 586 운동권 출신의 총리 후보자는
재혼(再婚)을 하면서 축의금(祝儀金)을
정중히 사양(辭讓)하였으나,
청문회 진행 중 현금흐름에 대한 의혹이 생기니
급기야 사회통념(社會通念)을 넘지 않는,
억대(億臺)의 축의금과 출판기념회 수익을 통해
자택(自宅)의 장롱에 무려 현금 6억 원이 있다는 말을
아주 쉽게 내뱉더군요.
그리고 또 그렇게 운운(云云)하는
그놈의 국민정서(國民情緖).
그런데 또 반대편 야당(野黨)의 원내대표에는
여전히 親 전직 대통령 성향의 국회의원이 선출되는
이런 우습고 우스운 세상에서 결국,
비리(非理)와 비위(非違)는 계속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위 임원의 해임에 따라 절대권력의 시대는
곧 끝날 거라고 쉽게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의 사조직(私組織)은
아직 사내(社內)에 건재(健在)하게 남아 있기에,
정치권력의 완전한 몰락(沒落)까지는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발치에서 그걸 그저,
가만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
2019년, 해외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제가 즐겨보던 드라마 "회사 가기 싫어" 에서는,
상사의 지시가 부당해도
'네' 라고 대답하는 직장인이
무려 70.3% 나 된다고 하더군요. (※ 아래 사진 참조)
세상은 점점 더 발전해서
IT 기술은 진보하고 이젠 AI 까지 등장했지만,
조직(組織)과 인사(人事),
그리고 인간관계(人間關係)는
아직 멀고 먼 미래에나 조금씩
개선(改善)될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덧붙임)
글에 적은 내용 중 허구(虛構)는 전혀 없습니다.
일부만이라도 픽션(fiction)이라면 참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는 게 오히려 굉장히 슬프네요.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어디에 말도 못 하고 있던
마음속 응어리(?)를
이렇게라도 풀어서 쓸 수 있게 되어
정서적(情緖的)으로 조금이나마
위안(慰安)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직장생활을 그만두는 때까지 저는,
부끄럽지 않게 일을 하고 싶습니다.
비록 제가 많은 직원들에게 존경(尊敬)을 받는,
그런 존재(存在)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몇 직원들의 롤 모델(Role Model)로서,
(저도 전혀 몰랐는데, 그렇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떳떳한
그런 직원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미천(微賤)한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讀者)께서도
조용히, 마음속으로라도
저에게 많은 응원(應援)과 관심(關心)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