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업무는 하찮은 일인지라...
흔히들 직장이란 곳은 계급사회라고 하지만, 때로는 계급과 관계없는 갑을관계(甲乙關係)가 같은 직장 내에서 버젓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상급(上級) 부서 같은 곳이 있기 마련인데요, 그런 상급부서의 경우에는 말단직원일지라도 협조 거부권 같은 것이 있어서 특정 부서에서 야심 차게 기안한 것들을 기각시킬 수도 있습니다. 일례로, 재무(財務) 관련 부서나 경영분석(經營分析) 관련 부서 같은 곳이 일종의 상급부서인데요. 그런데 심지어는 같은 조직 내에서도 그런 부서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역사와 전통이 있는 어떤 조직 내의 창단 부서라든가 최근에 신설됐다 하더라도 윗선에서 필요로 하는 부서 혹은 조직 인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부서는 아무래도 그 조직 내에서 영향력이 높다고 봐야 하는데요. 제가 속한 곳에도 인력관리의 기본단위인 부문(Division) 내에 총 4개의 부서(Department)가 있는데, 1개 부서(편의상 A 부(部))는 부문이 생길 때부터 즉, 태초(太初)부터 존재했던 조직이라 부문 내에서 그 영향력이 막강하고 2개 부서(편의상 B, C 부(部))는 부문의 과반이 넘는 인원이 수행하는 업무로 사실상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조직입니다. 반면, 제가 속한 부서(편의상 D 부(部))의 경우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조직으로, 절반 정도는 A 부(部)에서 건너온 인원이고, 나머지 인원은 대다수가 외부(타 부문, 타사 등)에서 영입한 인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소속된 부서는 뭔가 근본이 없는 낌새가 나지요. 물론, 각 부서 내의 모든 인원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A 부(部)에도 당연히 외부 영입인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에서 왔다 하더라도 조직의 힘이 막강하기에 뭔가 근본이 있어 보이는 그런 이상한 효과가 분명히 있습니다. 반면, 저 같은 인원은 나름 근본 있는 공채(公採) 출신이지만 소속이 소속인지라 근본이 없는 그런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부서 내에서도 A 부(部)에서 건너온 인원들은 근본이 있는 사람들인지라, 알게 모르게 뭔가 더 대접을 받고 있는 상황인 거죠. 그래서 여기까지 읽어보시면 대충 짐작을 하시겠지만, 부문장(長)은 언제나 A 부(部)에서 배출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A 부(部)는 사실상 성골(聖骨) 귀족이고(D 부의 A 부 출신인원 포함), B 부(部)와 C 부(部)는 진골(眞骨) 귀족 느낌? 그리고 제가 속한 D 부(部)의 떨거지(?) 인원은 굳이 따지자면 6두품(六頭品) 혹은 그 이하(五頭品, 四頭品)겠죠. 예예, 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신분상의 차별(差別)도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죠.
한편, 저는 개선(改善) 업무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오피스물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봐온 조직들 중 제가 수행하는 업무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조직을 꼽자면 웹툰 미생(未生)에서의 영업3팀을 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조직은 정해진 루틴한 업무가 없는, 좋게 말하면 필요악(必要惡)의 조직이고 나쁘게 말하면 잉여(剩餘) 조직인데요. 그래서 뭔가 큰 일을 하면 대박이 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작은 일을 하거나 혹은 뭔가를 잘 못 하면 계륵(鷄肋) 취급을 받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제 업무도 그렇고, 제가 주도하는 TF(TaskForce) 성격의 소(小) 그룹도 조직 개편 때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물론, 만약 어쩌다 대형사고를 발견해서 잘 정리를 하면 엄청난 실적이 나올 수도 있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되는 건 모두에게 부담입니다. 게다가 뭘 파내거나 캐내지 않으면 사실상 아무도 모르는 거다 보니, "너만 조용히 있으면 된다.", "시끄럽게 하지 말아라."는 얘기를 건너 건너서 자주 듣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엔 저에게 대놓고 뭐라 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그나마 요새는 그렇게까지 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 자체를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게 모두에게 편한 거다 보니, 굳이 뭘 들먹이는 거에 대해 주변의 반응이 좋지 않죠. 특히, 뭔가를 잘 정리해서 위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조차도 주변에서는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본인들의 치부(恥部)가 들춰졌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럼 이런 일을 왜 제가 맡게 되었을까요? 사실 저도 주재원에서 귀임한 이후부터는 이런 성격의 일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조직에서의 니즈(Needs)도 많이 사그라들었고, 또한 누구든 그리고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을 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현실은... 제가 떠나니까 아무도 이 업무를 하려 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 조직에서는 몇 년째 이 업무를 하지 않고 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째 방치를 해두면 그 업무에 대한 니즈는 필연적으로 다시 생기는 법이죠. 하지만 저도 주재원에서 귀임한 이후에는 다른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이런 성격의 업무가 저에게 배정이 되었고, 저는 이제 급기야는 다시 이 업무만 전문적으로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급하게 찾는, 시급하고 중요한 업무는 저에게 오지 않았고, 뭔가 시간을 두고 Data를 하나하나 분석하고 파 들어가야 뭔가 실마리가 잡히는 그런 어려운 업무만 저에게 오게 되었습니다. 저도 사실 사람인지라 윗분들께 몇 번이나 면담을 신청해서 저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는데요. 돌아오는 건, "이런 성격의 업무는 너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다른 직원 누굴 시키냐?" 같은 다소 황당한 대답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업무는 제가 이 조직을 탈출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무슨 업보(業報)와도 같은 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꾹 참고... 뭔가를 다시 파 들어가는 걸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그 와중에 부서장은 저에게 몇 가지 요청사항을 전달했었는데요. 같이 일하는 어린 직원들은 절대 야근(夜勤)을 시키지 말고 일찍 보내라. 주말근무? 이것도 당연히 안 된다. 걔들은 자녀도 너무 어려 아이들에게 손이 많이 갈 테고 또 아직 미혼인 직원들도 많으니 그런 직원들은 퇴근 후에 데이트도 해야 하고 어쩌고... 뭐 그런 것들이었죠. 그래서 결국 저는 혼자 늦게까지 남아 어두워진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다 일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잦아졌는데요. 그러다 근무시간이 자꾸 주 48시간을 초과하니까 급기야는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고, 하지만 뭔가 조치되는 것도 없이 어떤 때에는 주 55시간을 초과하는 일도 생겼는데... 하지만 어떤 누구도 그에 대한 해결방안은 제시해 주지 않았습니다.
지난여름, 저는 미국 등 미주(美州) 지역 주재원들을 대상으로 3시간짜리 영상 교육을 해야 했었는데요. 저 하나만 희생하면 참석하는 몇십 명의 주재원들이 편한 상황이기에, 교육 시작 시간을 금요일 23시로 잡았습니다. 3시간 교육이었으니까 익일(益日) 2시에 마치고 퇴근하는 거였죠.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주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경우에는 연장근무도 물론 보장을 해줘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무래도 저녁식사였는데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러나 부서 내에서 저의 식사를 챙겨준 직원은 부서장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습니다. 금요일엔 정시퇴근 혹은 더 일찍 퇴근하는 게 대다수 직원들의 관례이다 보니, 퇴근 시간 무렵엔 제가 다른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서... 오후에 진행했던 교육을 마치고 나오니 19시경이었는데, 그 시간에 부서에 남아있는 직원은 아무도 없더라고요. 뭐 그렇죠... 사실 기대한 것도 없었으니 실망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교육팀에서 저에게 저녁식사를 하라고 법인카드를 준다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게 왜 그렇게 창피하던지... 그래서 그때 저는 그냥 괜스레 "아, 우리 부서에서 법인카드 받았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거짓말을 남긴 채 사무실 건물을 빠져나와 가까운 식당에서 혼자 곰탕을 사 먹었습니다. 새벽까지 일을 해야 하니까 "특"으로, 그리고 "일반" 곰탕이 아닌 "한우" 곰탕으로요. 그렇게 쓸쓸히 개인 돈으로 식사를 하고 나올 무렵, 거짓말 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7월 중순이었으니... 한창 비가 많이 올 시기였죠. 그래서 혼자 쓸쓸하게 먹은 곰탕이 뱃속에서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급하게 뛰어서 사무실 건물로 재빨리 들어갔네요. 그리고 얼마 후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시간으로 오전 9시 정도 됐을 때인데, 거의 모든 주재원들이 저에게 한 마디씩 물어 보더라고요. 저녁식사는 하셨는지, 그리고 교육 끝나고 어떻게 퇴근하는지 등등... 저도 주재원으로 4년을 해외에서 보냈지만, 그렇게 외국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저를 챙겨주는 마당에 제가 속한 조직이나 부서 내부에서는 이렇게 나 몰라라 하고 있던 모습이 참으로 아이러니(irony) 그 자체였고, 그래서 저는 그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흔한 말로 직장 내 "왕따"여서 혹은 "은따"여서 그랬던 걸까요. 그런데, 비로소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직장에서의 업무에도 경중(輕重)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매우 중요한 일이 있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또한 그런 중요한 업무를 하는 조직이나 인원이 있고 또 그렇지 않은 조직이나 인원도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홀로 열심히 교육을 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일이니 일단 최선을 다하자는 자세로요. 이윽고 교육을 마친 뒤 새벽 시간 퇴근을 위해 택시 호출 앱으로 택시를 잡으려는데 웬걸, 그날따라 좀처럼 택시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아마 새벽 2시 반 무렵이었을 건데, 심한 폭우가 내리던 상황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사무실이 위치한 강남 테헤란로 같은 데에서는 원(遠) 거리 탑승자만 중요하고, 비교적 근(近) 거리 탑승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직장 내에서도, 그리고 택시 앱에서도 아주 중요한 VIP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래서 무시해도 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저는 그때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러다 새벽 4시 무렵 겨우 잡은 택시에선 기사님께서 이제 운행을 종료하고 집으로 가려는데 집과 비슷한 방향의 손님이 보여 콜을 눌렀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하차하기 전, 폭우 속에서도 와주신 기사님께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드렸는데, 오히려 기사님께서 저에게 이 동네로 콜을 불러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내내 이어진, 주재원들의 메일. 늦은 시간에도 열정적으로 강의를 해줘서 고맙다는 메시지와 함께 저를 우수 사내강사로 추천을 해주는 센스, 그리고 꼼꼼하게 작성해 준, 강의 설문 중 주관식 문항의 답변들. 가까운 곳에선 가볍게(輕) 생각하는, 아무것도 아닌 업무가, 오히려 먼 곳에선 무겁게(重) 생각하는, 중요한 업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회사에 큰 이슈가 터져서 지난 2주 간 몇몇 직원들이 주중에도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야근.... 뭐... 저는 너무 자주 하는지라 별생각 없이 있었는데, 막상 밤늦게까지 그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이니까 좀 불편하긴 하더라고요. 특히, 다음과 같은 것들이 더욱 불편했는데요. 그게 뭐냐면, 그 업무를 하는 직원과 부서장이 저녁 17시에 맞춰 자기들끼리 우르르 몰려나가는 거였습니다. 보니까 그들끼리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오는 것 같더라고요. 구내식당이 점심에만 운영하고 저녁엔 '한강' 라면 같은 것들만 판매하니 제대로 끼니를 때우려면 밖에 나가서 사 먹고 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저의 경우, 야간에는 주로 혼자 일을 하다 보니, 22시 이전에 일이 끝날 것 같으면 저녁을 잘 먹지 않았고 그보다 일이 길어질 것 같으면 책상 서랍에 넣어놓은 간식거리를 먹거나 아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말도 없이 그들만 쏙 나갔다니... 사실 저는 그들이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부서장을 찾아왔는데 잠시 남아있다 퇴근을 하려던 여직원이 그러더라고요. "어, 부서장님 지금 식사하러 가셨는데요?"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저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일째 그런 상황이 계속되었고 저도 당연히 3일째 계속 저녁식사를 하지 못한 채 야근을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들과는 서로 다른 업무를 하다 보니 그들과는 따로 대화를 하진 않았는데요. 3일째가 되니 그제야 부서장이 저에게 물어보더라고요. 언제까지 일하다 갈 거냐고. 그래서 뭐 금방 가겠다고는 했는데, 서로 불편한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서 그냥 대충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찰나, 그때 마침 후배직원이 저에게 김밥 두 줄을 사다 주었습니다. 제가 부탁을 한 게 아니어서 그랬는지 굳이... 부서장님께서 사주셨다는 말을 덧붙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옆팀 직원 중 밥을 못 먹고 일하는 직원을 불러 회의실에서 김밥 한 줄씩을 나눠 먹었습니다. 그렇게 다소 불편한 시간이 흘러 다음 날이 되었고, 그제야 저녁 시간이 되니 그날 처음으로 저녁식사 같이 할 거냐고 부서장이 저에게 묻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냥 곧 마무리하고 퇴근할 거라서 안 한다고는 했는데, 속으로 이게 또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이제야 묻는 건 또 뭐냐, 굳이 같이 가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가게 되더라도 식사 자리에서 당신들이 하는 중요한 일 얘기만 늘어놓을 건데, 그렇게 되면 저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것 같고 해서... 안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그들끼리 저녁식사를 하러 갔는데 이번에는 아예 돌아오는 길에 김밥 한 줄을 사서 저에게 또 갖다 주더라고요. 그래서 불편했지만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는 퇴근하는 길 다른 층의 회의실에 들어가서 김밥을 우걱우걱 입에다가 쑤셔 넣었습니다. 사실 제가 받은 건 일반 김밥이 아니라 계란말이 김밥이었는데, 아 이건 뭐 차갑게 식은 계란이 들어있는 데다 한 알이 너무나도 커서 먹기조차 불편하고 맛도 더럽게(?) 없는 그런 김밥이었죠. 그렇게 김밥을 해치우고 돌아오는 길, 저는 문득 무언가가 궁금해졌습니다. 어차피 지금 터진 이슈가 정리되면 아무도 야근을 하지 않을 것이고, 또 저 혼자만 남을 것인데 그때에도 "제가 김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지가" 요. 물론 저희 집에는 '김밥'보다 더 맛있는 '집밥'이 늦은 시간에도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야근한다고 제가 굳이 사무실에서 김밥을 먹을 이유는 없지요. 그렇지만 뭔가 참 억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왜냐고요? 다음 날 팀 서무를 보는 직원이 저에게 그들이 먹고 온 저녁식사의 법인카드 영수증을 저에게 보여눴는데,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처리하려 했던 영수증엔... 첫날, 국밥집 인당 2만 원짜리... 둘째 날, 중국집, 요리를 포함했는지 인당 2만 5천 원... 셋째 날, 돈가스집, 인당 1만 8천 원... 이렇게 찍혀 있었습니다. 반면 제가 먹은 것으로 보이는 영수증엔... 김밥 2줄 9천 원과 음료 2천 원, 도합 1만 천 원이 찍혀 있더라고요. 역시 중요한 일을 하는 직원은 국밥 "특"을, 혹은 탕수육과 잡채밥을, 혹은 등심 돈가스를 먹는 반면, 저 같은 "쩌리"는 고작 김밥 한두 줄만 먹어도 되는 거죠. 물론 제가 그들을 따라나섰다면 마지막 날에는 등심 돈가스를 얻어먹었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면서... 아, 이렇게 대접도 받지 못하고 차별만 당하면서 계속 야근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제 머릿속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거기에다 그들이 써서 제출한 것으로 보이는 택시비 영수증까지 보게 됐을 때의 당혹감. "아, 나도 비 오는 새벽에 내 돈으로 택시 타고 집에 갔는데..."라고 생각하며 그 영수증을 보니, 하차 시각이 23시 경이더라고요. "그 시간이면 대중교통도 끊기지 않은 시간일 텐데..."라는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최근 지하철 막차를 타기 위해 야근하다가 헐레벌떡 지하철 역으로 뛰어갔던 시각은 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 "누구누구는 야근하고 집에 편안하게 택시 타고 23시경 도착하고... 아, 나는 야근하다 말고 맨 정신에, 술에 취한,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지하철 막차를 타고 퇴근하는구나..."라는 생각에 머리가 멍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날 저녁, 이게 얼마만인지... 야근이고 뭐고 모르겠고, 대충 업무를 마무리하고 그냥 칼퇴근을 했더니 정상적인 퇴근 시간엔 지하철에 승객이 정말 무지하게 많더군요. 그날 저는 퇴근길 지옥철(地獄鐵)에서 심하게 끼인다(?)는 게 어떤 건지를 뼈저리게 경험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퇴근길이 아주 가벼웠습니다. 야근이고 뭐고, 업무고 뭐고... 이렇게 먹는 걸로도 차별하는 조직이라면, 그냥 그 꼴 안 보고 말지, 내가 왜 그런 불편한 상황을 겪어야 하는지 한참을 생각하다 굉장히 이른 시간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태권도 학원에 가기 위해 도복을 차려입은 둘째 아이가 그 시간에 들어온 저를 보며 깜짝 놀라더라고요. "아빠, 회사에서 괜찮은 거 맞아요?"라는 물음과 함께 왠지 뭔가 근심 어린 시선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 집을 나섰고, 저는 한 시간여 후에 돌아온 아이가 깨워서 겨우 소파에서 일어났습니다. 사실 마음은 많이 불편했지만, 저녁이 있는 삶은 정말 좋더라고요. 그렇게 잠깐 잠을 자고 일어나도 저녁 일곱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직장에서 업무의 경중(輕重)에 따라 야근할 때 저녁식사 메뉴가 결정된다면, 저는 그냥 담당업무의 가벼움(輕)을 인정하고 컵라면이나 먹어야겠습니다. 먹는 거 가지고 사람 차별하는 게 가장 나쁜 거라는데, 그렇지만 또 제가 하는 업무는 하찮은 일인지라... 그들에게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비 오는 금요일 저녁. 최근 저의 상황을 잘 알고 이해해 주시는 前 부서장님께서 제 어깨에 손을 얹더니 저를 근처 전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서 막걸리에 각종 모둠전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 前 부서장님께서는 그래도 저를 응원하는 직원들이 아직 많이 있다는 희망적인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업무가 하찮은 업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직원분들은 언제든 제가 지금처럼 계속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 또한 언급하셨고요. 그리고 그다음 주 업무 시간에 갑작스레 제가 올해의 사내강사로 선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욱이 그 소식은 부문장에게도 그리고 또 부서장에게도 메일로 공람되었는데요. 그랬더니 갑자기 부서장이 전 부서원들에게 메일을 돌리더라고요. 개별적으로 축하해 주시고 어쩌고 하는 그 메일. 하지만 저는 메일을 받자마자 바로 그 메일을 삭제할 뻔했습니다. 이건 마치 라면만 먹고 뛴 임춘애 선수 같은 허탈감이랄까. 뭐 그런 감정이 들었던 거 같은데요. 아무튼 제가 속한 조직에선 존재감이 전혀 없는데 제가 속한 조직 밖에서는 가끔 이런 포상 추천이 들어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저는 더 큰 소외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불편함도 느꼈고요. 하지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조직 내에서의 제 위치는... 단지 제가 하는 업무의 특성 탓인지 아니면 제가 갖고 있는 꼬장꼬장한 성격 탓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내부적으로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몰락할 수도 있고, 또 세상은 바뀌고 정권도 바뀌니까 그때까지만 좀 더 버티면 나중엔 좀 더 자리를 잘 잡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제가 무슨 한직(閑職)으로 쫓겨난 것도 아니고 제가 수행 중인 업무에 대한 니즈도 계속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쓰고 문득 창밖을 보니 창밖의 달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습니다. 추석 연휴 첫날부터 무려 닷새간 내리던 비가 그친 연휴 막바지에 드디어 기분 좋은 파란 가을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 첫날이라 그런지 밤공기도 무척이나 시원하네요. 게다가 이번 추석 연휴가 특별히 길어 비교적 여유 있게, 이런 글도 주저리주저리 막 쓸 수 있어 좋습니다. 물론, 연휴가 끝나고 회사에 복귀하면 이 글은 당장 지우고 싶을 테지만, 어차피 글이 너무 길어 저의 독자들조차 이 글은 끝까지 읽어보진 않을 터이니 일단은 그냥 놔두고, 나중에 회사 생활이 또다시 너무너무 힘들어질 때 그때 다시 살짝 열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름달이 뜬 한가위 주간, 달에게 푸념하듯 혹은 뭔가에 홀리듯 쓴 다소 슬픈, 그러나 차가운 현실을 인지하며 쓴 자기 고백 성격의 글입니다. 제가 하는 업무는 늘 하찮은 일인지라...
(사진) 웹툰 "미생(未生)"에서, 원인터내셔널 철강팀의
고스펙 엘리트 신입사원 장백기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