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화를 낼 수 없어 그냥 참고 또 참지요.
금요일 저녁, 늦게까지 혼자 지키고 있던 사무실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겨우 빠져나왔는데요. 그런데 막상 사무실 밖으로 나오니 늦가을 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가 이틀간 지속된 테헤란로엔 얇은 긴팔티를 입거나 심지어 반소매티를 입은 직장인들이 겉옷을 들고 평안한 얼굴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그저 가벼워만 보였는데요. 요사이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엔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기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 저는 이 심경을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감정을 최대한 억눌러서 글을 써보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사실, 같이 일하는 직원을 빼가는 건 저에게 너무 자주 발생했던 일이고 그때마다 한숨이 동반되긴 했었지만, 그런데 이번 건은 충격이 많이 컸습니다. 왜냐면 불과 3주 전에 부서장과 단 둘이 가졌던 술자리에서, 부서장은 저에게 분명히 그 직원은 저와 계속 같이 일을 하게 해 준다고 저에게 몇 번씩이나 말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도 저는 그 말을 반(半)만 믿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게 이렇게 빨리 현실화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조(前兆) 증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목요일 밤, 꿈자리가 매우 뒤숭숭했었는데요. 마치 이런 일을 예측이나 한 듯, 거짓말처럼 그날 그렇게 출근 직전에 예지몽(豫知夢) 같은 꿈을 꾸었네요.
원래는 그날 그 직원과 부서장과의 면담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직원이 면담하는 것으로 예정된 시간에 갑자기 부서장이 그 직원을 부르더군요. 그때 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예감처럼, 면담은 꽤 오랜 시간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면담 직후 저는 같이 일하는 그 직원을 불러 면담 내용을 간략하게 물어봤는데요. 결론적으론 조만간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양을 반으로 줄이고, 다른 업무를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그걸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고 했고요. 그런데 사실 그런 장면은 우리가 전에도 자주 얘기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플랜 B 같은 걸로 매번 생각해 오던 거였죠.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일을 그렇게 쉽게 나눠서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저는 말을 했었고, 결국은 좀 더 이슈가 되는 일, 그러니까 위에서 찾는 급한 일을 더 많이 하게 될 거라고 얘기를 했었습니다. 즉, 부서장이 더 중요하게 하는 일을 더 시급하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었죠. 그래서 그렇게 되면 지금 저와 같이 하고 있는 업무는 현실적으로 병행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쪽 일을 온전히 맡아서 하는 게 좋겠다고 저는 그렇게 미리 말을 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흘러가는 방향을 억지로 틀지 않는 이상은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부서장이 퇴근하기 전 그를 붙잡아 이번엔 제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직원이 불편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제가 부서장과의 면담 결과를 억지로 물어봐서 내용을 제가 알게 되었다고 먼저 말을 꺼냈고요. 근데 뭐 이건 진짜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러자 부서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쩌고 저쩌고... 급한 일을 하는 직원들이 다섯 명이었는데, 한 명은 개인적인 문제로 이미 이탈해 있고, 여직원은 휴직 예정이고 그럼 세 명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는 당장 급한 불은 껐으니 그중 유능한 직원을 반만 쓰는 건 부서장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결정해야 했던 것이라고. 그리고 그건 그 직원도 동의를 한 거라고. 뭐 그런 식으로 대충 얼버무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되물었습니다. "그럼 부서장님께서 '양념반 후라이드반' 같은 메뉴처럼 정확하게 일을 반반(半半)으로 잘라서 통제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론,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을 익히 잘 알면서도, 저는 일부러 그렇게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랬더니 예상했던 대로 부서장은 대답을 잘 못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사실상 선빵(?)을 날렸습니다. 그럼 그냥 저 친구를 온전히 저쪽 업무에 투입하시는 게 좋겠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으면서요.
그러자 부서장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저에게 이렇게 물어보네요. "그럼 언제부터 쓸 수 있을까?"라고요. 그렇죠. 뭐 그렇습니다. 그 얘기가 제 입에서 직접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런 질문이 나오더라고요. 사실, 누군가의 이탈과 여직원의 휴직은 모두 예견이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부서장이 저에게 계속 저를 떠보는 얘길 자주 했었는데요. 그래서 대부분의 이슈가, 저쪽 애들 많이 힘들어한다... 뭐 그런 얘기였죠. 하지만 저는 그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쟤네들은 야근하면 지들끼리 나가서 한우국밥을 특으로 시켜 먹고 오던데요? 같은 치사한 질문 따위는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 말이 입 밖에 튀어나올 정도로 기분이 많이 상하더라고요. "야, 어제 내가 걔네들하고 술 한잔 했는데, 정말 너무 죽겠다는 거야. 사람 필요하다고. 근데 그걸 너한테는 직접 말을 못 한 거 같고 해서 내가 그냥 반반(半半) 정도로 적당히 그들과 협의를 했는데, 그래도 네가 대인배(大人輩)처럼 아예 인원을 빼준다고 하니까 내가 너무 고맙네."라는 말과 함께.
사실, 뭐 답은 정해져 있었죠. 그냥 네가 희생하라는 거였습니다. 어차피 끝까지 버텼어도 오래 못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저도, 또 그 직원도 굉장히 힘든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Top-Down 오더(Order)를 받아 즉시 뭔가 성과를 내야 하는 다수(多數)의 입장에서는, Bottom-Up 제안(Suggestion)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가 바로 나오진 않는 소수(少數)의 업무가 얼마나 하찮았겠습니까. 그리고, 특정 인원, 그것도 본인들이 원하는 인원을 부서장을 통해 데려오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죠. 너무나도 중요한 업무를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들은, 당장 쳐낼 업무만 일단 처리하면 되는데도 하루 이틀 야근하는 게 대단히 큰 일이었고, 반면에 하찮은 업무를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저는, 업무량이 많아 한 달 넘게 묵묵히 야근을 해도 몇 시에 퇴근했고 일이 얼마나 남았는지 조차 그들에겐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요. 특히, 기존에 제가 SOS를 치면, "아, 그 일은 너무 'Unique'해서 저희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너무나도 자신 있게 대답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저는 더러운 기득권(그들은 이 조직의 성골 계층이니)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표현 대로라면, 'Universal'하고 'Important'한 그런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근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가 수행하는 일에 대한 설명을, 굳이 영문 형용사를 가져와 표현해야 했을까요. 심지어 그 형편없던 영어 발음으로요. 그리고 만약 굳이 영어로 표현한다면, 제 업무는 'Unique'(독특한, 고유한)가 아니라 'Special'(특별한)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Peculiar'(특이한, 좋은 느낌은 아님)나 'Particular'(특색 있는, 보통과는 좀 다른 느낌) 보다는 그래도 'Unique'(긍정적인 느낌)가 낫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중에서는 'Special'(좋다는 의미)이 가장 좋은 의미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인원 차출이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했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에 대한 예고편일 수도 있겠죠. 저 역시도 연말 인사 시즌에 어딘가로 갈 수 있는 상황이니... 그런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니, 많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걸 제가 어찌 막을 수도 없었으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사실 그날 오전에 자료를 무려 열여섯 개나 보내주지 않은 직원과 구내식당에서 한판 크게 붙었습니다. 이 직원은 부서 내 하위조직인 파트의 장(長)을 맡고 있었는데요. 본인의 파트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또 본인이 데리고 있는 직원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일단 제 자리에 와서 무작정, "오해가 쌓인 거 같은데 좀 푸시죠."라고만 말을 하더니, 좋지 않은 말이 나가자 "회의실로 가시죠."라고 하면서 저를 회의실로 떠밀더라고요. 근데, 그때 회의실은 누가 사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회의실 예약도 하지 않고 그냥 어디 밀폐된 공간에서 그냥 대충 조용히 얘기해 보자는, 그런 준비 없는 생각으로 저에게 온 거였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저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어떤 자료를 어떻게 제출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아직 업무 파악이 안 된 관계로...", 그리고 "좀만 더 기다리시면..." 혹은 "아시잖아요? 우리 애들(?) 지금 상태 안 좋은 거..." 뭐 이런 같잖은 말들로 상황을 덮으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다른 말 없이 "무엇보다 우선 업무 파악부터 제대로 하시고, 필요하면 정식으로 회의를 요청하세요."라고 말한 뒤 자리를 떴습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대인배"(大人輩)는 아니지만, 그래도 또 "소인배"(小人輩)는 아닌, "중인배"(中人輩) (*주 1) 정도는 되어야 했으니까 제가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놓고 화를 낼 수 없으니 그냥 또 참고 참았지요.
회사에서 직원들은 대다수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단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막상 공격을 당하면 바로 상대방을 물어뜯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다른 건 다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출세(出世)와 자리보전(保全) 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남이 뭘 하든, 무슨 성과를 내든 일단 깔아 누르거나 무시하고 봅니다. 하지만 절대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면서 맹목적으로 순종하고, 뭔가 만만하거나 힘없어 보이는 자들에겐 하이에나 같은 본성을 드러내는 사람들. 그래서 도덕성이나 비즈니스 매너 같은 건 이미 걷어차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러다 보니 위에서 원하는, 우상향(右上向)의 매출과 영업이익 그래프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그려 넣은 자들이 일 잘하는 거고,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해서 윗사람들의 환심을 산 뒤 막상 결과가 저 멀리 가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표를 달성했다고 보고하는 자들이 일 잘하는 겁니다. 또한, Data 분석 시 본인들에게 유리한 값들만 표본으로 추려 모집단(母集團)을 잘못 추정하는 사이비 리서치 업자나 혹은 저수지에 한쪽에 풀어놓은, 잡기 쉬운 물고기들만 잡아 올렸는데, 마치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엄청난 대어(大漁)를 낚은 것처럼 행동하는 야바위 낚시꾼 같은 직장인들이 이른바 "광팔이"를 통한 "실적 부풀리기"로 인사고과(人事考課) 시즌에 버젓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선 멀쩡한 인원 빼가기나 협업하지 않는 비매너는, 그렇게까지 욕을 먹을 행동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그렇게 인사평가 시즌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조직 개편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는 또 어디로 가게 될는지, "중인배"(中人輩) 직장인으로서 주말에도 고민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통계가 조작됐다는 의혹이 감사원을 통해 제기되었지만(2023년), 조작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검찰의 발표(2025년, 대전지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2025년 11월 7일) 검찰은 특정 사건에 대한 항소를 이례적으로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정권에 의해 감사원도 검찰도 감사(監事)와 수사(搜査)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고 있는 그런 상황이라면, 저희 같은 기업에서는 그런 현상이 훨씬 더 심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한 방향만 바라보는 저 같은 사람은, 아무리 날카로운 칼날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엔 그 칼날이 무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칼잡이는 정권이 바뀌면 바로 숙청(肅淸)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저 역시도 이번 인사 시즌엔 어떤 충격적인 요법(療法)으로 또 공격을 받겠지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또다시 하나 둘 떠나갑니다. 차라리 그냥 "얘 좀 빼간다."라고 직접 말하면 더 나았을까요? 어떤 방향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유도(誘導)당하면서 사람을 빼앗기는, 저 같은 힘없는 직장인의 기분은 그렇게 썩 좋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말 오후인데, 주말 같지 않은 건 단지 제 기분 탓일까요? 그냥 직원 한 명이 빠져나갈 뿐인데, 마치 제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것 같은, 큰 충격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또 이렇게 매번 쓸 때마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런 직장 스토리는 진짜 더 이상은 쓰고 싶지 않네요. 하지만 그래도 주말이니까 잠시라도 숨을 고르고 나서 다음 주를 맞아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심각한 위기(危機) 같은 이상한 변화도, 한편으론 저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을까요?
(참고) 출처는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Change'(변화)와 'Chance'(기회)는 문자 하나 차이네요.
(*주 1)
"중인배"(中人輩)는 사전에 나오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제가 또 "대인배"(大人輩)가 아니다 보니까, 그런데 또 그렇다고 "소인배"(小人輩)는 아니겠지 싶어서 임의로 만들어낸 단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