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레인 Jan 28. 2021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하다.

아픈 기억을 꺼내보다

갑자기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녀석이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 받은 상처의 기억이 떠올라서 뭔가에 홀린 듯이 자판을 두들기게 되었다.




녀석을 초등학교에 보내려니 걱정이 참 많았다. 글을 겨우 깨쳤고 더하기 빼기를 할 수 있었지만 산만했고 낯을 많이 가렸다.


우리는 지방 중소도시에 살았고 녀석이 입학한 초등학교는 시 외곽에 있는 한 학년에 학급이 하나뿐인 작은 초등학교였다. 한 반에 학생수가 적어야 선생님이 더 신경을 써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장고 끝에 결정하였다.


입학식을 하고 교실에 들어가니 녀석이 긴장하는 게 역력히 느껴졌다. 젊은 여자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으로 배정되었다. 선생님은 자기소개를 하고 아이들에게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하는 거예요" 하셨다. 나는 녀석이 자기 이름을 잘 듣고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선생님은 녀석의 이름을 맨 처음 불렀다. 녀석은 선생님이 방금 이름을 듣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대답을 하는 거라는 설명이 있은 후 바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잘 대답을 했다. 번호순으로 한다면 중간쯤일 녀석의 이름을, 선생님은 집중에 어려움이 있으리라 예상하셔서 맨 처음에 불러주신 거였다. 나의 걱정과 불안은 녀석의 초등학교 등교 첫날에 선생님이 보여주신 세심하고 사려 깊은 모습에 많이 누그러졌다.


1년 내내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로 선생님은 배려 깊고 따뜻하셨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녀석은 정말 선생님 복을 타고났지 싶다. 하지만 나에게는 상처로 남아있고 녀석에게도 힘들었을 시기도 있었다. 녀석은 1학년 때 알림장도 잘 써왔고 받아쓰기에도 문제가 없었다. 1학년에는 서성거리고 집중이 안 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학교 공부를 못 따라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잊지 못할 상처


2학년이 되고 나이가 좀 있으신 교무부장 선생님께서 담임선생님이 되셨다. 교무부장을 맡고 있어서 행정업무가 많았던 선생님은 녀석을 챙길 여유가 없으신 것 같았다. 잘 써오던 알림장도 어느 날부터인가 비어 있었다. 선생님은 전화를 하셔서는 녀석이 알림장을 안 쓴다고 하셨다. 나는 친구를 괴롭힌다거나 때리는 것이 아닌 이상 학교에서 발생하는 일은 선생님이 지도하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알림장을 안 써오는 이유가 녀석에게 있음을 알리고자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녀석은 알림장 쓰기를 비롯해 1학년 때 가능했던 일들이 2학년이 된 후에는 어려워졌다.


2학년 말이 되어 나는 담임선생님께 에둘러 녀석이 손이 많이 가는 편이니 교무주임과 같은 바쁘신 선생님이 아닌 평교사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으로 배치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노력해 보겠다고 했지만 3학년에도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교무부장 선생님이 다시 담임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녀석의 학교생활은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그러던 중 학교 참관수업이 돌아왔고 나는 학교에 갔다. 수업시간에 녀석은 가만히 있을 뿐 수업에 참여하지도 활동지에 활동기록을 하지도 않았다. 선생님은 한 시간의 수업 동안 한 번도 녀석을 지도하지 않았다. 참관수업이 끝나고 담임선생님은 녀석과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녀석은 안전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날 선생님께 녀석은 집중이 어렵지만 '이렇게 해보자' 정도의 개입만 해도 수업을 따라갈 수 있는데 선생님께서 시간 내내 한 번도 지도를 안 해주시더라는 섭섭함을 내비치었다. 선생님은 교직생활에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고 교사로서 자존심이 상했다고 말하였다. 선생님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그 이후 나는 학교에 방문하지도 선생님과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녀석은 받아쓰기도 사칙연산도 다 할 수 있고 글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수업 중에 한두 번만 환기를 시켜 주시면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데. 보통 아이들도 수업 중에 한눈을 팔기도 하고 선생님이  집중하도록 지도하기 마련이다.  장애유무를 떠나서 하물며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데! 선생님이 장애가 있으니  안전하게 학교만 다니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게 아프고 화나고 그리고 슬펐다.


그 선생님과 더 아픈 일도 있다. 반 엄마들 모임이 잘 운영되어  한 달에 한번 모임을 했었다. 3학년 2학기가 훌쩍 지났을 무렵 모임에 갔더니 같은 반 엄마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다. 2학기 반장을 뽑는데, 선생님이 반장 하고 싶은 사람 손들라고 하니 녀석이 손을 들었다고 했다. 선생님께서 'ㅇㅇ 아 ㅇㅇ이는 아니야'라고 하셨단다. 녀석은 멋쩍게 손을 내렸고 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준 엄마의 아이가 집에 돌아와서 '엄마, 왜 ㅇㅇ이는 반장 하면 안 되는 거야?'하고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마음이 아플까 망설이다 전한다고 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녀석의 마음이 어땠을까 상상해 보니 미칠 것 같았다. 내 자식의 일이라 아팠고 개인의 아픔을 넘어서서 교무부장을 할 정도로 경력 있는 선생님의 대처가 그 지경이라는 게 너무 낙담이 되었다. 앞으로 녀석이 모든 정규 학교 과정을 마칠 때까지 이런 일이 반복될까 두려웠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나는 안되는데


모임을 마치고 집에 와서 녀석에게 물었다.

"ㅇㅇ이 학교에서 반장 뽑을 때 손 들었었어?"

"응,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나는 되는데... 잘못한 거야."

녀석의 대답을 들으니 가슴이 툭하고 내려앉고 눈물이 핑 돌았다. 애써 눈물을 참고 녀석에게

"아니야. ㅇㅇ이 잘못한 거 아니야. ㅇㅇ이도 반장 할 수 있어. 엄마는 ㅇㅇ이가 자신 있게 손들어서 너무 행복하다. 앞으로도 엄마는 ㅇㅇ이가 하고 싶은 건 손들어서 표현하면 좋겠어"

녀석은 결연하게 "아니야. 그러면 안돼."라고 했다.

그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 수도 반응할 수도 없었다.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선생님과 참관수업 이후로 대화를 하지 않은 데다 반장 그 사건이 있은지 2달 이상 지난 시점에 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변명하면서 나는 항의를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아이는 계속 학교에 다녀야 하고 선생님이 혹시 더 무심하게 대할까 걱정이 되었다. 솔직히 가장 큰 이유는 학교를 찾아가서 항의를 하다가 선생님이 적반하장으로 나와서 더한 상처를 받을까 두려웠다.


그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일로 인해 녀석이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이나 발표를 하고 싶어도 손을 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숫기도 없는 녀석이 큰 용기를 낸 일이 자신이 하면 안 되는 일을 한 것으로 뇌리에 박혀버린 것 같았다. 원망스러웠다.




녀석은 4학년이 되었다. 4학년부터는 교육과정이 어려워지는데 걱정이 되었다. 4학년 담임선생님은 초임 발령은 받은 젊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간 받은 상처로 학교 선생님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난 후 일주일 즈음 지났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ㅇㅇ이가 알림장 쓰는 시간에 아예 알림장을 안 쓰네요"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1학년 때는 잘 써왔는데 2학년 때부터 안 쓰기 시작해서 이제까지 이런 상황이라고 대답했다. 지원이의 수업태도와 학교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연락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대답은 내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방과 후에 녀석이 학원을 다니는지 물으시고는 1주일에 두 번 정도 한 시간씩 시간을 내어준다면 녀석에게 알림장 쓰기, 일기 쓰기 지도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흔쾌히 시간을 만들었고 4학년 때가 녀석의 초등 학창 시절 중 녀석이 가장 공부를 잘한 해가 되었다.


2학기에 학교상담을 갔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렸다. 그 당시에도 지난해의 담임선생님이 근무를 하고 있었기에 말하기가 조심스러웠지만 녀석의 머릿속에 박힌 그 기억을 바꿔주고 싶었다. 나는 간략하게 그때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고 녀석에게 아주 작더라도 반 친구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책임을 맡겨주시기를 부탁드렸다. 녀석이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고 부탁드렸다. 선생님은 사연을 듣고 매우 미안해하시면서 녀석에게 수업이 다 끝나면 청소상태를 점검하는 일을 하게 해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4학년을 마치고 6학년쯤이 되었을 때 녀석은 장애학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서 색소폰을 배웠다. 기쁘게도 연주회에 참여하게 되어 동생과 함께 합주를 하였다.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우연히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뵙게 되어 연주회를 하게 되었다고 자랑삼아 말씀드렸다. 며칠 후  따로 연락 주셔서  장소랑 시기를 물어보시고는 꽃다발과 선물을 준비해서 연주회에 와주셨다. 선생님의 배려와 지지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아직도 가끔 연락을 드리곤 하는데 결혼을 하셔서 예쁜 공주님을 키우고 계신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하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한다는 말이 있다. 상처가 많이 옅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아물지는 않은 것 같다. 아직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고 화도 난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학급에 있으면 선생님께서 힘드실 거란 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녀석이 반장 하고 싶다고 손들었을 때 부반장을 시켜 주시거나 선거를 통해 선출을 하거나 하는 방법은 있었을 것인데,  '너는 할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다.


선생님이 평소에 장애아는 학습 지도의 대상이 아니고 문제없이 학교에서 안전하게 지내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그렇게 대응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한다. 교육자라면 '너는 아니야'는 최소한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권, 차별 없는 세상을 알려줘야 할 선생님인데 말이다.


녀석은 변함없이 그 녀석 자체이다. 3학년 때도 4학년 때도 녀석은 한결같았다. 선생님이 어떻게 아이를 바라보느냐가 달라졌을 뿐이다.    선생님께 녀석의 가능성을 믿고 노력해 주신 선생님들과 함께 녀석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꼭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생님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길 바라본다. 선생님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중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셨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머피의 법칙인가 싶은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