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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물함 Oct 06. 2020

저 너머 고사인쿤드에는 누이가 살고 있는데

네팔 이주노동자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네팔 이주노동자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뻐라짓 뽀무 외 34명, 2020, 삶창)


1.


친구야,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여기는 재스민과 천일홍들이 애정을 뿌리며 웃지 않는다
새들도 평화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여기는 사람들이
기계의 거친 소음과 함께 깨어난다

하루 종일 기계와 함께 기계의 속도로 움직인다
장마철에 젖은 산처럼
몸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땀에 젖어
스스로 목욕을 해도
이 쉼터에서는 시원하지 않구나

사람이 만든 기계와
기계가 만든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다가
저녁에는 자신이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구나
친구야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여기는 사람이 기계를 작동시키지 않고
기계가 사람을 작동시킨다
─서로즈 서르버하라, 〈기계〉 중에서

2015년, 어머니와 함께 네팔로 여행을 떠났다.

포터나 가이드를 고용하지 않고, 우리 힘만으로 네팔의 레킹 코스를 다 걸어보자고 떠난 여행이었다.


그렇게 오른 첫 번째 코스가 해발 4,380m의 고사인쿤드를 경유하는 랑탕 국립공원 코스였다.

네팔의 히말라야 하면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가 유명한데, 이 랑탕 국립공원 코스 역시 제법 알려져 있어 한국의 트레커들은 이 세 코스를 합쳐 네팔의 3대 트레킹 코스라 부른다.

이 여행의 목적은 이 3대 코스를 모조리 돌아보는 것이었다.


앞서거나 뒤따라 걸어가며 서로를 찍었던 것이 지금은 가장 소중한 추억 중 하나로 남았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처음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두 번째 목적지였던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코스를 등정하고 재정비를 위해 카트만두로 돌아가던 버스 위에서 끔찍한 대지진을 만났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은 도로를 찾아 갈팡질팡 떠돈 버스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우리를 카트만두 시내에 내려놓았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지반 채로 넘어져 택시 상판을 찌그러뜨리고 있는 가로등이었다.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예약 없이 찾아간 숙소 앞에는 수많은 네팔인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그들 중 한 분에게 말을 걸자 번역기에 입력한 두 단어만을 몇 번이고 반복해 외쳤다. 테러블 어스퀘이크, 테러블 어스퀘이크……

그곳을 떠난 우리는 빈 숙소를 찾아 한참을 헤매야만 했다.


그때는 이미 한 달간 이어진 트레킹으로 지칠대로 지쳐 있던 터였지만, 서로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간신히 한 한인 숙소에 짐을 풀게 된 우리는, 대규모 정전이 일어난 도시의 어둠 속에서 촛불 하나 켜놓은 채 지친 속내를 앞다퉈 털어놓았다. 어차피 정상적으로 여행을 이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다른 한인 여행객이 어디선가 가져온 만두로 간신히 허기를 채워 넣고, 숙소에 1대 있는 TV로 뉴스를 보면서 판단한 것이었다.

정부에서 국적기를 파견하는 대로 돌아가자고 마음을 굳혔다. 여러 달을 다짐하고 준비해온 여행이었지만, 귀국을 결심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곳곳에 금이 간 낡은 건물에 몸을 뉘여놓고도, 깨어 있을 때면 애써 여행의 긍정적인 순간들을 회상했다.

그러고나면 한동안은 참 운이 좋은 여행이었다고 서로를 달래줄 수 있었다.


지도 한 장과 약간의 여비만을 들고 랑탕과 안나푸르나를 무사히 넘을 수 있었던 건 많은 네팔인들의 친절이 우리를 지도가 보여주지 않는 길들로 이끌어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친절을 베풀었던 건 단순히 우리에게 돈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 중 결코 적지 않은 수의 남자들이 과거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삶에 제법 여유가 있어 보였던 한 중년은 한국에서 포크레인을 운전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집도 사고 결혼도 했다던 그의 식당에서 근사하고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별 생각 없던 나와 달리 어머니는 그 순간이 몹시 부끄러웠다고 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기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


우리를 반갑고 기쁘게 맞이했던 그의 기억 속에도 분명히 서러운 순간들이 맺혀 있을 것이다.

네팔의 산맥 깊은 곳에서 산장을 운영하는 그에게 포크레인을 몰았던 과거는 썩 어울리지 않았을 터다.

그가 우리를 대해줬던 따뜻함의 무게만큼 우리는 그의 삶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한 채 받기만 하다 네팔을 떠나게 된 과거가

지금은 네팔 사람들을 향한 애틋함과 그리움이 되었다.




2.


손자야
꿈을 안고 내 나라에 왔구나
꿈을 이루기는 어렵단다
도전의 쓰나미를 견뎌야 하고
운명의 태풍을 견뎌야 하지
가시를 밟고 불을 삼키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단다
그리고 모든 아픔에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단다
내가 그런 사람의 징표란다
나를 보고 배우렴

매번 할머니 삶의 발자취에서
공감의 힘을 얻고
생명의 싹을 틔워요
모든 저녁이 내게는
새벽의 표상처럼 느껴져요
이정아 할머니를 만나고
투쟁의 창*을 마시면서
나도 내 나라를 짊어지고 있어요
─ 거닌드러 비버스, 〈이정아 할머니〉 중에서

*네팔의 전통술. 우리나라의 막걸리와 비슷한 발효주이다.

계속해서 가게에 진열할 수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아내(좌)와 허리춤에 쿠크리 나이프를 꽂은 채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남편(우)


Never End Peace And Love.


네팔인들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사진 옆에는 의례히 이 문구가 낙서되어 있다.

그들의 나라(Nepal)를 그들이 소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과 경의를 담은 문구다.

나는 이 말에 담긴, 네팔인들이 갈구하는 평화와 사랑의 의미를 한 남매에게서 보았다.


랑탕에서 맞이하는 거대한 자연의 관문, 고사인쿤드를 넘기기 전 날의 일이다.

그날 오전에 들른 작은 마을에는 노점에 온갖 악세서리를 두고 장사하는 부부가 있었다.

수공예품에 매력을 느낀 어머니가 머리끈을 고르고 있을 때 남편 허리춤에 찬 나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구르카 용병들이 사용한다는 쿠크리 나이프였다.


남자는 머리끈을 계산한 어머니와 내게 다가와 산장 주소가 적힌 명함을 건넸다.

그가 말하길 고사인쿤드 입구에 있는 마을에는 누이가 산다고 한다.

그 누이를 몇 달째 보지 못했다고 한다. 누이는 요리를 잘하니 만족스러운 선택이 될 거라고도 했다.

꼭 산장에 묵지 않아도 괜찮으니 자기가 건강히 지낸다고 전해달라며 내게 신신당부 부탁했다.


어머니도 머리끈이 참 마음에 들었던 건지, 나이프를 허리에 찬 그의 모습이 그렇게 근사했는지,

그 산장으로 가보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명함에 소개된 산장을 찾아가면서도 못내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몇 개월간 얼굴을 못 봤다던 그 사내의 말이 진짜일까 의심했다. 이런 게 여행객을 꾀어내는 상술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었을 테니까.


그 산장은 남자가 누이라고 소개했던 여성이 혼자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소식을 전해주자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반가워하고, 소식을 전해준 우리에게 동생의 모습이 건강해 보였느냐며, 그 말을 전해줬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고마워했다.

그녀가 반가워하는 모습만 봐도 남매의 사이가 얼마나 애틋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는 그 남자의 누이가 맞았고, 그들은 몇 개월째 얼굴도 못 보고 지냈다는 것도 분명해 보였다.


산장에서 나온 요리는 맛있었다. 하기사, 나라도 내 누나를 치켜세우려 없는 칭찬까지 보탤 것 같지는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품고 있던 의문을 구체적으로 얘기했다.

걸어서 한나절이면 도착할 거리에 살고 있는 남매가, 저렇게 서로를 애틋히 여기면서도 어째서 몇 개월째 얼굴도 못 보고 지낸 걸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그건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비행기든 차든 몇 시간이면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도 굳이 명절이 아니면 찾아가지 않게 된다고, 나중에는 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일찍부터 몸을 동여매고 밖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밤새 계속 눈이 내렸다. 산장 바깥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준비한 지도만 봐선 어디가 길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숙박비를 지불하고 산장을 나서려는데, 창밖을 바라보는 누이의 옆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정갈히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눈에 반사된 미미한 햇살을 받아 가볍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에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은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신앙으로 기도하는 대상이 이 산을 오르는 내게 힘을 불어넣어주는 존재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꼈다.


나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산장을 나섰다.

바깥은 온통 새하얗고 고요했다. 눈은 완전히 멎어 있었고 시야도 깨끗했다.

그 날씨 덕에 사방천지가 눈밭이었어도 어렵지 않게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날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순조롭게 고사인쿤드를 돌파했고

그날 경험한 일을 오랫동안 회상했다.


매일 밤 눈이 쌓여 길의 흔적이 사라져버리는 세상에서는 정교한 지도 한 조각이 아닌 사소한 기후의 변화 하나가 운명을 가른다.


언젠가 뇌파를 읽어내서 기억의 한 장면을 사진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이 생긴다면

내가 꼭 인쇄하여 그 물성을 잡아보고 싶은 인생의 한 장면은 바로 그녀의 옆 얼굴이 될 것이다.

이어진 여행길에서 달라이 라마가 합장하는 사진을 볼 때마다, 나무 벽에 낙서된 Never End Peace And Love라는 문장을 볼 때마다, 그날 내가 받은 경애와 평화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네팔에서 마주친, 아이들의 평화가 담긴 일상

늘 그곳에 평화와 사랑이 있었다.




3.


어머니는 네팔에서 돌아온 뒤로도 종종 네팔에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한 한국인 일행이 고용했던 포터 청년, 치링이 어떻게 지낼지 궁금해 했다.


치링은 나와 동갑이었다. 어머니는 산악화도 아닌 평범한 운동화 하나를 신고 포터 일을 하던 그를 안쓰럽게 여겨 아이젠이라도 사 쓰라며 고용자들 몰래 그에게 백 달러를 쥐여주기도 했다.


나는 종종 고사인쿤드에서 만났던 그 누이의 옆 얼굴을 떠올렸다.

살면서 예기치 못했던 행운을 만나거나 경이로운 순간을 겪을 때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있던 그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그러고나선 어머니와 뻔한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때 고사인쿤드에서 만났던 누이를 기억하느냐고. 그러면 어머니는 그걸 어떻게 잊겠느냐며 금방 애틋한 반응을 보이신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습관적으로 네팔 대지진 경과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던 차에 고사인쿤드 인근의 마을이 눈사태로 매몰되어 기백 명이 실종 상태라는 기사를 보았다.

나는 그 뒤로 네팔 대지진에 대해 검색하는 것을 멈췄다.

그들의 소식이 미친듯이 궁금했지만, 그와 비슷하게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상충했다.


어쩌면 그 지진이 계기가 되어 서로의 생사를 찾아 헤맨 남매는 기적적인 재회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생업을 묶고 있는 삶의 짐도 잊고 재회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살아만 있다면, 그들은 자신의 생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생의 의지를 붙잡고 지친 노동의 현장으로 자신의 몸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그 불송이가 꺼지지 않게, 그들이 줬던 경애만큼의 애정을 그들의 삶에 돌려주고 싶다.

네팔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들이 생을 받아내는 자세가 기록된 이 책에 이토록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이유다.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쓴 시를 모은 책,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2020, 삶창)

파란 하늘 캔버스를

빙그르르 돌면서

수천 마일 저 멀리

천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들의 무리!


새들은

경계도 없고

나라도 없고

종교도 없다

외연도 없고

에고도 없고

몽상도 없다

다만 무리와 함께 자유롭게 날거나

무리를 떠나 천상으로 날아오른다


이렇듯!

언제쯤 날아오를 수 있을까?

천상을 향한 새들의 비상처럼……

─ 뻐라짓 뽀무, 〈새 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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