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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맑음 Dec 13. 2020

나는 파란색 펜이 싫었다.

학창시절 있었던 필기강박 이야기


 학창시절 필기 강박이 있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판서를 한다. 하얀, 노란, 파란 분필을 사용해 색깔별로 판서를 한다. 학생들은 따라 적었다. 그 때는 인강(인터넷강의)이 한창 붐을 일으켰을 때다. 인강 선생님들은 특히 판서를 예술적으로 했다. 글자도 반듯반듯하게, 선도 반듯하게 자로 잰 듯 그렸다. 원을 그릴 때도 카메라만 응시하고 그리는데 컴퍼스를 사용한 것 보다 예쁜 원이 그려졌다. 수험생들은 보며 희열을 느꼈다. 

 선생님들은 중요한 것들을 노란 분필로 썼다. 학생들은 노란 분필로 쓴 것들을 빨간색 펜으로 따라 쓴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선생님이 분필 색을 바꾸는 순간 여기저기에서 딱,따닥, 볼펜 색 바꾸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선생님이 평소에 쓰지 않는 빨간 분필을 쓰는 순간이 왔다. 학생들이 당황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노란 분필을 빨간 펜으로 대체하여 썼는데, 빨간 분필을 쓰면 어떡하란 말인가. 여기저기에서 공책을 찢는 소리가 난다. 그 다음부터 학생들은 새로운 규칙을 적용한다. 노란분필로 판서하는 부분은 파란색 볼펜을 쓰고, 빨간 분필로 판서하는 부분은 빨간색 볼펜을 쓰면 되겠지. 그러나 다음 시간엔 파란색 분필을 사용하는 선생님들까지 등장한다. 그러면 그날 하굣길에서 다들 초록색 펜을 사기 시작한다. 



 나는 예술적인 판서를 보고 감탄하며 집중해서 필기를 따라하고, 자습시간에 한번 더 보기 좋게 필기를 했다. 그러고 나면 외우는 시간에 문제가 발생했다. 오늘 배운 것의 중요한 부분은 파란 펜으로 적은 부분일 텐데 파란색으로 쓴 부분이 너무 많았다. 선생님들은 조는 학생들이 있으면 잠에서 깨우기 위해 일부러 이건 중요하다-고 말하고, 그럼 학생들은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파란 펜으로 바꿔 필기한다. 선생님이 노란분필로 쓴 부분과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분, 별표를 친 부분, 시험에 나온다고 말 한 부분들이 하나 되어 모든 필기노트의 글들이 파란색이 된다. 저녁이 되면 암담했다. 

 비효율적인 공부의 끝이 아닐 수가 없다. 이게 필기를 위해 강의를 듣는 건지, 공부를 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 필기를 다 하고 나서도 파란색으로 적힌, 중요한 부분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걸 언제 다 외우지. 차례나 제목을 제외하고는 거의 파란 펜으로 적힌 부분만 남았다. 다른 볼펜들에 비해 파란 펜만 빨리 닳아서 몇 번이고 다시 샀다. 어느 순간부터 파란볼펜으로 적힌 부분들이 너무 싫어졌다. 

 조삼모사 격으로, 나는 파란색이 싫어져서 하늘색 볼펜을 샀다. 보라색도 사고, 원하는 색으로 필기를 하며 나름 재밌게 필기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재밌게 ‘필기’를 했다는 점이다. 재밌게 공부하진 않았다. 그 때는 나의 필기노트를 보면 우와, 하고 말해주는 친구들 덕에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른다. 


파란색 펜을 버리고 한 필기들. 굳이 파란색을 버리고 하늘색과 보라색을 사용했다.


 쭉 돌이켜보니 내가 만든 강박인지, 만들어진 강박인지 모르겠다. 사실 색깔을 맞추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싶지만, 그건 시간이 지난 지금이야 할 수 있는 생각이고 그땐 너무 중요했다. 다들 색을 정해서 필기를 하곤 하니 나도 더 그랬나 싶다. 나만 색을 안 맞춰 필기하면 성적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 이제는 파란색 볼펜을 봐도 아무 생각이 없지만, 예전에는 필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파란색으로 쓰인 글자만 봐도 ‘못생겼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다. 검은색 필기든 빨간색 글이든 다 중요했을 텐데, 검은색으로 적힌 글자들은 특히 천대받았던 것 같다. 검은색으로 적혀 있다고 몰라도 된다는 뜻은 아닌데. 



취업준비 할 때 인강을 보며 한 필기들. 엉망진창이다.


 5~6년이 지난 후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이것저것 강의를 보며 공부를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필기를 하고 공부를 하려고 연습장을 봤다. 검정색 펜 하나로 마구 필기가 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필기 된 연습장을 쳐다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필기 강박이 사라졌네, 뭐 나만 알아 볼 수 있으면 됐지, 생각했다. 


강박은 없어진 것 같지만 그 와중에 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 보면 여전히 공부를 재밌게 하진 못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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