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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성장 Oct 01. 2024

엄마가 사라지다 / 01 아흔한 살 엄마, 아이가 되다

하루 시작의 일과로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은 중학교 3학년 딸아이의 등교입니다. 사춘기가 심해 중학교 1. 2학년 때의 출결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학교에 가기 싫은 아이를 등교시키는 것은 전쟁입니다. 기분 상하지 않게 살살 달래서 일단 집에서 출발시켜야 합니다. 아이의 등교 준비를 마치고 엄마의 기침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지만 새벽잠이 없는 엄마는 늘 아이보다 일찍 일어나십니다. 

“애는 아직 안 일어났냐? 학교에 자꾸 안 가면 어쩌려고 그래. 빨리 애 깨워서 보내라. 지금 시간이 몇 시냐.”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 엄마는 텔레비전 보면서 좀 쉬고 있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할 건데…. 엄마의 말에 나는 기분이 살짝 상합니다. 

일어나기도 전에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게 된 딸아이는 인상을 팍 쓰고 이불을 집어 던집니다. 아이는 ADHD와 반항성 행동 장애를 진단받아 7년이 넘게 약을 먹고 있습니다.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나는 되도록 아이를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엄마는 아이가 아프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성질을 부리는 손녀를 보며 그저 속상할 뿐입니다.

“내가 무슨 싫은 소리를 했다고 성질을 내냐. 할머니가 손녀딸 걱정돼서 한 말을 가지고….”

팔다리가 부러진 것도, 어디가 아파서 누워있는 것도 아니라 이해하기 힘듭니다. 아픈 곳이 직접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말을 해도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성질부리는 아이를 혼내지 않고 내버려 둔다고 너도 똑같다며. 너를 닮아 애 성질도 못됐다고 합니다. 참을성 없는 아이는 자기 일에 할머니는 상관하지 말라며 현관문을 부서지도록 닫고 나가버립니다. 

“엄마. 제발 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꾸 옆에서 잔소리 좀 하지 마! 내가 애 엄마인데 애한테 나쁘게 하겠어?”

“내가 무슨 해로운 소리 했나. 걱정되어서 챙기라고 한 거지……, 할머니가 한소리 했다고 저러고 나가는 게 잘했다는 거냐?”     

나는 식사를 하고 나면 설거지를 바로 하지 않습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한참을 쉰 후 마무리합니다. 엄마는 늘 그런 내가 못마땅합니다.

“밥을 먹으면 바로 개운하게 치워야지. 싱크대에 계속 담가놓고 앉아서 놀고 있냐. 어이구!”

“엄마. 사람마다 다 다른 거지. 내가 알아서 할게. 신경 쓰지 마.”

온 신경이 나에게 모여 있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불안한 인생을 산 엄마는 항상 무엇에 쫓기는지 엄마 기준으로 나를 대할 때마다 숨이 막힙니다. 

“엄마 제발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 지금 당장 설거지 안 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잖아?”

내 목소리가 커지면 엄마는 옛날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나는 너를 그렇게 안 키웠다.”     

20년 전. 엄마는 칠순을 앞두고 뇌졸중을 앓았습니다. 가뜩이나 투박한 말투에 발음이 잘 안 되니 더 크고 세게 발음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아픈 엄마를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금은 친절하게 말할 수 없는지 속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학교에 갈 수 없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집 딸이라는 이유로 배움의 길이 완전히 막혀버렸지요. 사내로 태어난 남동생들은 학교에 다녔지만, 엄마는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일해야만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혼하고 몇 달 되지 않아 남편도 잃었습니다. 남편도 없는 집에서 시부모님과 사는 며느리. 어떤 심정인지 생각할 엄두조차 없는 고단한 엄마의 삶이었습니다. 엄마는 어떤 말로 상대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조차 생각할 겨를도 없는 치열한 세월을 살아냈습니다.


누구보다 손녀딸을 귀하게 키워주었습니다. 예민한 아이. 잠들지 않고 한두 시간에 한 번씩 칭얼대는 아이를 나와 엄마가 번갈아 가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손녀는 소화기관이 약해서 구토를 자주 하였고 옷과 이불 빨래를 매일 하기 일쑤였지요. 내가 육아휴직이 끝나고 출근하기 시작했을 때도 혼자 집안일과 아이를 돌보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눈에서 사랑이 뚝뚝 떨어질 만큼. 누구보다 손녀를 사랑하고 예뻐해 주셨습니다. 퇴근해서 돌아오는 버스 정류장에 손녀를 포대기에 둘러업고 마중을 나온 엄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엄마를 만난 건 세 살 때입니다. 20년 차이가 나는 할아버지의 식모로 서울에 왔을 때였다고 합니다.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그때의 모습. 생소하지만 지금 내 나이의 젊은 엄마가 있습니다. 나와 인연이 되어 가슴으로 낳은 부모를 자처했지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과도 이렇게 부딪히고 싸우면 밉고 속상하기 마련인데 엄마는 그 세월을 어떻게 지내 왔을까요.

내가 사춘기 때, 모진 말로 엄마를 다그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렇게 살 거면 나를 왜 데려다 키웠어?”

“엄마가 돼서 이런 것도 안 해주고. 자격이 없어!”

아이의 말이라도 상처받는다는 것을 엄마가 되고서야 알았습니다. 성질난다고 마구 던진 말에 마음에 큰 구멍이 난다는 것을요.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어?”

“부모가 돼서 이런 것도 안 해주고. 낳는다고 다 부모인 줄 알아?”

부메랑이 되어 날아오는 모진 말들이 어쩌면 당연한 업보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걸 주고도 늘 미안해하는 엄마였습니다. 내가 요리를 못하고, 청소나 빨래, 정리 등 집안일에 둔한 이유는 지금껏 엄마가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는 증거입니다. 학교 다닐 때, 실내화를 빨아보았던 기억이 두서너 번밖에 없습니다.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시절, 손빨래로 내 옷을 빨아주고 얼음장 같은 찬물에 설거지할 때도 군소리 한번 없었던 엄마였습니다. 본인은 찬물을 쓰더라도 연탄불에 뜨거운 물을 끓여 세숫물을 준비해주던 엄마입니다.

“이제는 내가 너한테 도움을 주고 싶어도 기운이 없어서 못 해.”

본인의 몸이 노쇠한 것이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엄마 앞에 나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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