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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성장 Oct 01. 2024

우리 엄마는요 / 01 천사 같은 엄마

엄마와 내가 만난 건 엄마 나이 마흔일곱. 내가 두 돌 지나서였습니다. 조산소에 버려진 아이를 부유한 가정에서 입양했지만, 2년 반이 지나 파양되었습니다. 갈 곳 없는 나를 키워줄 사람을 수소문하던 끝에 엄마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당시 엄마는 6.25 전쟁으로 남편을 여의고 재혼했지만, 실패하고 서울로 올라와 식모살이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데려온 아줌마는 주인집 할아버지를 남편으로 잘못 알고 엄마에게 나를 맡겼습니다.

지금 내 나이가 마흔일곱입니다. 그때의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데려다 키운다고 했을까요? 오십을 앞둔 나이. 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엄마에게도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딸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온갖 걱정과 불안을 떠안고 사는 나로서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가 엄마였다면 엄마 같은 선택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엄마를 만난 세 살 때부터 스물아홉 살까지 고약한 잠버릇이 있었습니다. 엄마의 치맛자락이나 옷을 잡거나 혹은 엄마 신체의 일부가 나와 닿아야만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엄마는 내가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옴짝달싹하지 못했습니다. 자다가 엄마가 움직이거나 사라지면 잠에서 깨어 엄마를 찾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불안감이 높았고 엄마가 ‘나를 두고 도망갈까?’ 예민한 상태를 지속하다 보니 생긴 버릇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잘 때는 엄마와 꼭 붙어서 자야만 했고, 친척 집에 가서 오지 않을 때는 잠이 오지 않아 밤새거나 아파서 병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엄마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집을 잘 비우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물에 말은 밥과 간장만 먹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게 먹는 걸 좋아하지 않고 입이 짧았다고 했습니다. 밥을 먹지 않는 아이가 걱정스러워 엄마는 보양식이며 국이며 영양제도 꾸준히 먹였지요. 유난히도 키가 작아서 초등학교 때 내내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난쟁이 똥자루’라고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다행히도 중학교에 입학한 후, 두 번째 줄에 앉게 되었는데, 그것은 모두 엄마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없는 살림에 당시 유명한 영양제인 원기소와 초등학교 내내 꾸준히 먹었던 우유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어쩐 일인지 엄마는 식모살이하면서도 생활비와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나를 키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쪼개어 파출부를 다녔고 부업을 했습니다. 귀걸이 포장. 지우개 포장. 붕어빵 봉투 붙이기. 인형 눈붙이기, 옷 포장하기 등등 여러 가지를 했지요. 나는 철이 안 들어 엄마의 부업을 좋아했습니다. 엄마랑 시간도 같이 보내고 특히나 못쓰게 부서진 지우개가 생겨서 너무 좋았습니다. 상품으로 못 쓰는 지우개를 가져다가 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친구들에게 환심을 사기도 했습니다.      

엄마의 모진 식모살이는 폭언과 폭행의 일상이었습니다. 급여는 둘째치고 반찬값이며 살림에 들어가는 모든 돈을 하루하루 타서 생활했습니다. 나는 할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며 자랐지만, 아빠의 정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먹는 밥과 반찬, 옷과 신발, 내가 자는 장소까지 모두 엄마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나로 인해 할아버지에게 가벼운 욕으로 시작되어 폭행으로 끝나게 되는 수많은 상황은 큰 돌덩이처럼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내 처지를 잘 몰라 아빠에게 대들고, 그로 인해 엄마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나로서는 내 존재의 가치가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습니다.

엄마의 고통을 보면서 나도 힘들었습니다. 

“나는 너만 아니면 어디서든 내 밥벌이는 하고 산다. 어디로 도망가고 싶어도 너 때문에 못 간다!”

엄마가 지칠 때 했던 말에 ‘나만 없어지면’ 엄마가 행복해질 거라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친부모를 찾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일입니다. 

친구들이 가진 예쁜 학용품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나에게 예쁜 필통이나 공책 등 문구류를 사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친구 집에 있던 기차 모양 연필깎이가 너무 부러웠습니다. 나는 교회나 학교에서 선물 받은 공책과 연필 이외에 예쁜 학용품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없는 살림에 비싼 돈을 주고 학용품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였지요. 친구의 푹신푹신한 분홍색 필통을 보고는 갖고 싶다는 욕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학교에 우유 대금으로 내라고 주었던 돈으로 예쁜 필통과 연필을 사고 남은 돈으로 간식을 사 먹었습니다. 이후, 엄마는 우유 대금을 미납했다고 학교 선생님께 연락받았고, 나는 거짓말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습니다. 

하루는 친구를 따라 피아노학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멋지게 건반을 치는 친구가 부러워 학원을 보내 달라고 엄마에게 졸랐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가게 해달라고요. 며칠을 울고불고 매달려도 우리의 형편은 학원엔 절대 갈 수 없었습니다.

옷을 살 여력이 없어 동네 언니들에게 옷을 물려받아 입었습니다. 당시에는 많이들 그렇게 살았습니다. 가슴둘레가 꽤 있던 나는 언니들의 옷을 많이 물려 입었습니다. 하루는 남자애들이 나를 힐끔거리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렸습니다. 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옷이 커서 소매 사이로 가슴 속살이 보인다며 여자친구들이 조심하라고 말해주어 알게 되었지요. 그때 처음 수치심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할머니 엄마였습니다. 친구들의 젊은 엄마가 섬세하게 친구를 챙기는 모습을 보며 너무 부러웠습니다. 차라리 나를 보육원으로 보내지, 왜 이렇게 힘들게 키우는지 가난한 엄마를 원망했지요. 돌아보면 너무나 철없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신 혼자도 힘들었을 텐데 나까지 챙기느라 얼마나 고단했을지 그 마음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다시 버린다고 해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을, 나는 막연히나마 알았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그렇게 힘들었을 겁니다. 지나온 시절을 돌아보며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의 입장을 헤아려보지 못한 채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했습니다. 미안하고 죄스럽습니다. 어떤 언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그 마음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내 인생 47년.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단연코 천사 같은 우리 엄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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