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중심에 세운다는 것은
휴가지에서는 완벽한 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많은 조건들이 충족합니다.
바탕화면 같은 아름다운 풍경
넘칠 만큼의 햇빛
고급 인테리어 자재들에서 풍겨오는 쾌적함
조금씩만 먹어도 다 먹지 못할 만큼의 맛있는 음식
이국적인 풍경에서 느껴지는 해방감
가족이 함께하는 안정감
문 열고 나가면 온몸으로 만끽 가능한 자연
그 좋은 순간들 속에서 더 완벽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있습니다.
놀고먹는 휴가가 지나도 불은 몸을 만들지 않기 위한 헬스장에서의 새벽운동
호텔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만끽했다는 만족감을 주는 액티비티 활동
2시간여의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한 앞선 4시간여의 키즈클럽
룸서비스로 시킨 코코넛주스
바닷바람을 느낄 수 있지만 금세 몸이 끈적해지면 얼른 에어컨 공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테라스
시원하지만 춥지 않은 온도, 기침이 나오지 않는 미풍의 바람, 피부가 보송 거리는 습도
뷰를 가리지 않는 의자방향
적당히 감상에 젖게 하는 잔잔한 음악과 적당한 볼륨
그 어렵고 어려운 순간을 만들어내 건물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지켜봅니다.
완벽하리만큼 좋습니다.
저 예쁜 구름이 지나가면 또 그 뒤에 조금 더 무거워 보이는 또 예쁜 구름이 지나갑니다.
어릴 때는 저 구름에 폭 파묻히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비행기를 타고 가까이에서 보니 뿌연 안개 같아 파묻힐 순 없겠군 하고 생각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완벽한 순간이라 생각하니
그 순간이 지나가는 시간들이 아쉽습니다. 조바심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근데 또 생각해 보면 이 완벽한 순간이 익숙해지면 또 완벽한 순간이 아니게 됩니다.
반복과 익숙함이 주는 무료함에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나설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그 완벽한 순간의 조건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가장 피곤한 순간이라 여겨졌던 키즈클럽에서의 4시간은
사실 저의 창작혼을 불태운 시간이었습니다. 아이와 미술활동을 하며 제가 더 빠져들었고 한동안 하지 못했던 디자인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는 느낌조차 들었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나는 아이의 보호자지만 아이에게 종속된 것은 아니기에 아이의 페이스를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주제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따라가되 아이 수준에 맞춰 나의 작품 퀄리티를 낮추지도 않았고 내가 원치 않는 것에 대해서는 싫다는 의사표시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평소 시계만 들여다보며 한두 시간이면 진을 빼고 나오는 키즈클럽에서 나도 모르게 장시간을 머물렀습니다.
평소라면 버리거나 아이가 주고 싶어 하는 키즈클럽의 다른 아이들에게 주고 왔을 작품도 품 안에 소중하게 안고 나왔습니다.
아 재밌었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참 좋은 순간이었습니다.
나를 중심에 세웠을 뿐인데 여행에서의 가장 힘든 순간이었던 시간들이 참 좋은 시간이 됩니다.
얼마 전 친구가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역시 나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것 같아.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그 말이 요즘에 자주 상기가 됩니다.
그 말 역시 관계의 중심에 자신을 세웠기에 했던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중심에 둔다는 것
상대가 나를 좋아하던 싫어하던
내게 잘해줬든지 못해줬든지
부모자식이든
연인이든
부부든
30년 지기든
이유 없이 좋을 수도 이유 없이 싫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상대방도 그럴 수 있다는 것
그 어떤 부채감에 그 어떤 고마움에 그 어떤 미움에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는 것
나의 모든 순간에 내가 중심에 있겠다는 것
매일 되뇌고
매일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해 온
숱한 사람들이 말해온
나로 살아가는 것
나를 잃지 않는 것
나를 중심에 세우는 것
또 금방 중심에서 벗어나는 순간들이 찾아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나를 중심에 세워봅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완벽한 순간을 위해 나열한 저 순간들이 저에게는 모두 참 좋은 순간들입니다.
저 중 하나의 조건이라도 존재한다면 나는 참 좋은 순간일 거고 변화하는 내게 맞는 또 다른 완벽한 순간들을 금세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