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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엽 Jul 22. 2020

근대 사진 속, 마천루와 노동자

철과 사진의 역사

대서양을 사이에 둔 영국과 프랑의 천문학자는 한 발명품에 들떠 있었다. 영국의 천문학자 존 허셜(1792-1871)과 프랑스 아라고(1786-1853)는 서신 왕래를 통해 카메라 옵스큐라로 만들어진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 발명품은 자신들의 전공인 천문학을 비롯해 장차 과학계의 혁신을 가져 오리라 확신했다. 이에 아라고는 멋진 연설문을 써서 의회에 나가 호소했다. “우리가 이 사진이라는 별명 특허를 사들여 만방에 공표합시다.” 프랑스 정부는 이에 발명자 니옙스(1765-1833)와 다게르(1787-1851)에게 평생 연금을 주고 이 특허를 사들여 조건 없이 만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그 기술을 공개했다. 덕분에 프랑스는 세계 최초로 사진을 발명한 국가가 됐고, 인류는 기술 사용료 없이 사진을 만들 수 있게 된다. 

특히 천문학자들이 사진에 열광한 것은 특별한 사연이 있다. 망원경을 통해 먼 별빛을 관찰하는 그들에게 사진은 스펙트럼을 기록할 수 있는 특별한 매체였다. 이미 빛이 스펙트럼을 갖는 다는 것과 그 선스펙트럼에는 원소의 비밀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결과 전 우주에는 수소와 헬륨이 대부분이고 자연계에 존재하는 92개의 원소 중 유독 원자번호 26의 Fe 철이 가장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허셜과 아라고와 같은 천문학자들이 사진에 매료된 것은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특히 존 허셜은 사진을 이용하는 뿐 아니라 스스로가 발명을 한다. 지금도 사용되는 청사진이다. 청사진은 기존의 은이 아닌 철을 사용한 사진이다. 청사진은 철염과 적혈염이 반응하여 프러시안블루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이용해 어떤 사물을 복제하는데 쓴다. 지금도 초등학교 화학 시간에 가끔 나뭇잎이나 가위 등을 올려놓고 햇빛에 노출시켜 만드는 청사진이 등장한다. 청사진이 발명된 것이 1842년이었다.    


철을 이용해 만든 최초의 사진집


천문학자 존 허셜에게는 안나 앳킨스(1799-1871)라는 동료 식물학자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영국에서 유명한 화학자이자 동물학자였던 존 조지 칠드런(1777-1852)이다. 앳킨스는 수많은 식물 표본을 수집해 보관하고 있었는데 마침 존 허셜이 철염을 이용한 청사진을 발명했다는 이야기에 솔깃했다. 당시는 식물 표본을 손으로 그릴 때였다. 그녀는 허셜에게 청사진을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인 1843년 앳킨스는 청사진을 이용해 해조류의 모습을 기록한 '영국의 해조류(Photographs of British Algae)'를 발간했다. 일부 학자에 따라 이 책을 세계 최초의 사진집으로 보고 있으며, 안나 앳킨스는 최초의 여성 사진가로 평가받고 있다. 당연히 이 사진집은 단순히 연구의 기록이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철이 최초의 사진집을 만드는데 공헌한 것이다. 이렇게 근대는 사진과 철이 함께했다. 철은 세상을 만들고 사진은 그것을 기록했다. 

근대 문학의 백미라 할 <목로주점>을 쓴 에밀 졸라(1840-1902)도 이런 철과 사진에 대한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아마도 강철로 만든 구조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파리의 에펠탑일 것이다.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1892-1987)가 파동 방정식을 탄생시킨 연구실이 있었던 이 탑은 사실 건설 초기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 흉물스러워서 졸라는 ‘에펠탑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의 탄원서’를 주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실 에밀 졸라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에펠탑 위에서 거리를 찍은 사진은 <사진의 역사>에도 실렸다. 아마추어로서는 대단한 영광인 셈인데, "요즘은 새로운 취미에 빠져있는 통에, 사진에 아주 미쳐있지요"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하여간 에펠탑의 그 에펠은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강철 구조물을 만드는데, 그것이 지금 뉴욕 앞바다에 서있는 자유의 여신상이다.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가 만들어 기증한 것이 1886년이다. 아마도 당시 미국인들은 이 경이롭고 거대한 강철 여신을 보고는 놀랐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맨해튼에 마천루가 올라가기 전이었으니. 

이 무렵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던 리버티 섬 옆, 전 세계 이민자들이 몰려들던 미국 이민국이 앨리스 섬에 있었다. 그야말로 이탈리아, 아르메니아, 러시아 등등 전세계 이민자들이 몰려들던 합숙소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한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그 초라해 보이는 이민자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루이스 하인(1874-1940).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대학과 대중들에게 사회 개혁을 열강하던 젊은 지식인이었다. 


강철의 노동자를 찍다


당시 뉴욕은 그야말로 노동의 지옥이었다. 노조도 노동법도 노동시간의 제약도 최소 임금도 없었다. 특히나 하인에게 아동들의 노동하는 모습은 끔직했다. 그래서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는 아이들,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들, 산재로 불구가 된 아이들의 연작 사진을 만들어 노동권을 요구하는 단체들과 함께 국회에 청원했다. 결국 1938년 16세 미만 아동의 노동이 금지된다. 이런 그가 1935년 당시로 가장 많은 강철을 사용한 초고층 빌딩의 건설 현장 기록사진에 도전한다. 바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다. 

지금은 사라진 세계무역센터가 세워지던 1970년대 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1930년 제너럴모터스의 존 제이콥 래스콥(1879-1950)가 발주한 이 빌딩은 설계에서 시공 완료까지 단 18개월이 걸렸고, 1년 45일만에 꼭대기 층까지 올렸다. 고딕 양식의 이 건축물이 이렇게 초고속으로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강철의 힘이기도 했다. “날이면 날마다 층에서 층으로 강철 노동 현장을 추적했다. 삼각대를 갖춘 뷰 카메라를, 때로는 4X5인치의 그라플렉스를 어깨에 걸친 채, 노동자들과 함께 대갈못을 두드려 달구는 용철로 위에 샌드위치를 구어 요리하기도 했고, 아찔한 고층 대들보 위를 걸어 다니기도 했다.” 사진 역사가 보먼트 뉴홀( 1908-1993)은 이렇게 당시를 묘사하고 있다. 

근대의 유산인 사진을 현대적이 기록도구로 재발견한 가장 선구적인 인물이었던 루이스 하인의 길을 따라 수많은 후배 사진가들이 강철로 이루어진 우리 사회를 기록해 나갔다. 직접 그를 사사한 폴 스트랜드(1890-1976)는 강철로 만든 기계에 집중했고, 공황의 시대를 기록한 워커 에반스(1903-1975)는 그 강철 오브제 속에 예술을 심었다. 훗날 이러한 전통에 마지막 대가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노동의 본질을 추적한 세바스치앙 살가두(1944- )가 아닐까 한다. 그는 20세기 말, 막 지려하는 강철 중공업의 희망을 찾듯 제철소, 조선소, 자동차 공장을 찾아 철과 노동자들을 사진에 담았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치타공의 폐선소는 마치 철의 무덤 같다. 아니 철은 끝없이 재생과 부활을 하니 타오르는 잿더미의 불사조라 할까? 

하긴 뭐 세상 무엇이 관계되지 않을까? 저 먼 우주의 거대 항성이 붕괴하며 뿜어낸 철들은 이 지구에 내려앉아 인간에 의해 호미가 되고 쟁기가 되어 농업을 일으켰고, 칼이 되어 제국을 만들었으며, 끌과 망치가 되어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기도 했다. 사진도 알고 보면 카메라가 되기도 했고, 삼각대가 되기도 하며 인류가 만든 강철의 문명 도시를 기록해왔다. 몸에 안전 장비 하나 없이, 저 거대한 강철들을 엮어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낸 위대한 인간의 생애와 이를 기록한 하인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뭉클해진다. “이렇게 장관을 이루는 루이스 하인의 사진은 멜로드라마도 아니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찍은 것도 아니다. 위험천만한 작업에 대한 대담하고 솔찍한 시선의 기록이다.” 마천루의 강철 노동자들를 탁월하면서도 애정 어리게 찍어낸 하인에게 바친 보먼트 뉴홀의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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