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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엽 Aug 21. 2020

월지인을 찾아서

하서회랑에서 베그람까지 6천 킬로미터

둔황의 밍사산에 오르면 두려움을 느낀다. 저 황홀하게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사물이 신기루처럼 보일라치면 내 마음 속 심연에 깔려 있는 미지에 대한 공포감이 떠오른다. 중국 간쑤성 서부 주취안지구 하서회랑 서쪽 끝, 당허강 유역 사막지대에 있는 이 산은 중국과 실크로드를 잇는 관문이자 고대 동서 교역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노마드들의 목표이자 교차점이었다. 중원의 한인, 페르시아인, 투르크인, 인도인 등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거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이곳에 모여들었다. 나는 정주하고자 하는 인간과 그 곳을 떠나 끊임없이 떠돌고자 하는 인간 사이에는 큰 인식적인 차가 있다고 생각했다. 들뢰즈는 "'방목하다'라는 말의 목축적 의미는 나중에서야 토지의 배당을 함축하게 된다. 호메로스 시대의 사회는 방목장의 울타리나 소유지 개념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당시 사회의 관건은 땅을 짐승들에게 분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짐승들 자체를 분배하고 짐승들을 숲이나 산등성이 등의 한정되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에 배분하는 데 있다. 노모스는 우선 점유의 장소를 지칭하지만 그 장소는 가령 마을 주변의 평야처럼 명확한 경계가 없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노마드'라는 주제 역시 탄생한다"고 했다. 이 인식의 경계에 사막이 놓여져 있다. 이 둔황의 밍사산이라는 사막은 서쪽의 당허강 협곡 출구에서 시작되어 동쪽의 막고굴에서 끝나며, 동서의 길이 40㎞, 남북의 너비 20여㎞이다. 이 작지 않은 사막의 언저리에 물이 솟고 오아시스가 만들어졌다.


전쟁에 대하여

청명한 가을 하늘이면 사람들은 천고마비를 떠올린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구나. 그러면 우리는 또 독서를 떠올린다. 하지만 예전 중원에 살던 농민들은 "이제 흉노의 말이 살쪘으니 우리 추수한 것을 빼앗으려 쳐들어오겠구나"라 했다. 고대 실크로드의 전쟁은 땅을 빼앗는 목적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그곳에서 일하는 인간을 탈취하는 것이 목표였다. 노동력의 확보인 것이다. 특히나 유목이 대표 산업인 흉노도 중국인 노예를 활용해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기도 했다. 약탈 경제는 이것 모두가 문제가 생겼을 때 행하는 전쟁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란저우를 지나 간쑤성의 하서회랑 초입의 도시 우웨이는 흉노의 거주지였다. 이곳을 한나라의 무제가 접수한 후 장예, 주취안, 둔황과 더불어 황허의 서쪽, 하서 사군이라 했다. 비로써 중국의 판도에 들어 온 것이다. 특히나 중원에서 가까운 우웨이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유목민과 정주민이 일대 공방전을 벌이며 초원이냐 농지냐를 두고 싸운 것이다. 초기 흉노의 막강한 기마군단에 밀리던 한나라는 결국 페르가나의 천마를 얻어 자신들도 기마병을 키워 흉노를 몰아낼 수 있었다. 늘 전쟁이 일어나는 접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마음 졸이고, 공포는 일상이 되었을 것이다. 흉노의 선우와 중원의 황제 사이에서 갈등하고 눈치 봤을 것이다. 삶은 고단해지고 일하기 역시 싫었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 한동안 우웨이는 공백상태로 남게 된다. 지금도 고비 사막의 언저리에서 바람에 쓸려 무너져 내리는 저 성채마냥 전쟁은 인간을 황폐하게 한다. 전쟁이 생산력을 향상시키던 시절은 오래전에 끝났다. 전쟁보다 평화가 더 생산성을 높여준다. 그런데도 인류가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은폐된 약탈이거나 정권의 안정을 위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다 마찬가지이다.


난민의 트라우마

중국의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살고 있는 위구르인들에게 그곳은 고향은 아니다. 이들의 본거지는 몽골 초원과 중앙아시아까지 이어져 있는 초원이었다. 투르크계 유목민인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745년 동돌궐제국을 무너뜨리고 위구르제국을 건설한 후부터였다. 중국과 늘 패권을 다퉜던 흉노나 돌궐과 달리 무척이나 중화사상을 흠모하여 755년 일어난 당나라의 '안사의 난'에 구원병을 파병하여 이씨 황실을 구하기도 했다. 유목민이면서도 문화를 사랑했던 위구르인들은 마니교를 받아들이고 소그드문자를 이용해 위구르문자를 만들었다. 초원 유목민으로서는 최초로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약 100년간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위구르제국도 다시 초원에 나타난 야만의 키르키즈 군대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들은 난민이 되어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특히 이들이 모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곳이 타림분지의 투르판이었다. 투르판은 실크로드의 요충으로 서역과 중국 사이에 위치해 중개무역과 농업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독립된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곳으로 요나라의 황실의 일원이었던 야율대석이 지나갔다. 금나라에게 침탈당하고 소수의 철기병을 이끌며 서쪽으로 가던 야율대석은 위구르인들에게 선대의 약속이니 당신들의 초원 땅을 되찾아 주겠다 했다. 하지만 위구르왕은 겸손히 사양하며 "이제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오래라 초원을 잊었노라"고 했다. 그는 야율대석에게 후하게 대접하고 군자금까지 무상원조했다. 이후 야율대석은 서쪽으로 가서 서요를 건국하니 유럽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카라키타이' 또는 동방의 '요한 왕'이라 했다. 투르판의 고창고성은 이제 그 옛날 영화는 간 데 없고 쓸쓸이 바람만이 지나가는 폐허가 되었다. 위구르는 몽골의 칭기즈칸에 의해 다시 난민이 되었고 이 후 청나라에 의해 복속되어 이제 중국의 일부가 되었다. 어찌보면 이들의 난민신세는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전쟁과 난민의 트라우마는 천년을 간다.


사막화의 진짜 주범은?

초원이라 불리는 몽골이나 중앙아시아를 다니다보면 황무지와 같은 사막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초원은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 시베리아의 타이가 숲 정도에서 그 푸르른 풍경을 볼 수 있다. 1만 년 전 최후의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는 무척이나 물이 풍부한 대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던 지구가 지금은 사막화 시대를 살고 있다. 사막화는 누구의 탓일까? 원래 지구의 순환법칙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사납게 변해버린 인간의 이기적인 에너지 낭비 탓인지, 그도 아니면 초근목피까지 먹어치우는 염소 때문인지. 우리는 쉽게 사막과 초원의 경계에서 양과 염소를 치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을 떠올린다. 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도 남지 않아 사막이 확대되고 있다고. 그래서 최근 중국 정부는 유목민을 초원에서 소개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끝까지 남아있겠다고 버티는 사람들에게는 가축의 수를 제한한다. 여러모로 이들에게 사막화의 혐의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다리야 강변에서 사막화의 진짜 주범을 만났다. 그건 지구적으로 돌아다니는 거대 자본이었다. 파미르에서 기원해 중앙아시아의 카라쿰과 키질쿰 사막을 지나 아랄해로 흘러들어가는 아무다리야, 시르다리야 강은 말랐다. 수천년간 유목민들의 젓줄이었던 강이 말라버린 것이다. 소련시절 지역 간 무역을 활성화한다는 목표로 이 지역에 떨어진 특산물이 목화였다. 강물을 이리저리 빼서 목화농장을 거대하게 키웠다. 덕분에 식량은 수입해야 했고 사막은 점점 확대됐다. 소련의 해체 후 목화가 인기를 잃자 이번에는 초원과 사막 언저리에 케시미어를 생산할 수 있는 양과 염소가 가득 찼다. 사막은 더욱 확대됐다. 기후변화는 우리 인류가 자연에 대해 대규모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서장이다. 하지만 이 공포는 불가항력적인 공포가 아니라 죄책감을 동반한 공포이다. 인간이, 특히 자본이 이 기후변화를 야기했을지 모른다는 범죄자의 그 것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공범을 자꾸 만들려 하고 있다. 그리고는 공범 중에서도 가장 힘없고 약한 유목민들을 주범으로 낙인찍으려 한다. 그들의 하루 에너지 소비량은 일등 에너지 낭비국 미국인에 비해 1천분에 1도 안 된다. 그들은 오늘도 가축의 고기와 젓을 먹고 가축의 똥으로 난방하고 가축의 기름으로 불을 밝힌다. 그들은 낭비하는 것이 별로 없다.


미스터리의 유목민, 월지

우즈베키스탄의 아무다리야 강변에서 흐르는 푸른 물길을 보면 내가 과연 중앙아시아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푸른 물줄기를 이용해 곳곳에 자두와 복숭아 과수원이 늘어서 있고, 밀밭은 황금물결로 굽이치고 하얀 눈송이 같은 목화밭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농경이 발달하고 문명이 싹텄던 곳이다. 흔히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인더스와 황하 문명을 4대 문명이라 하지만 사실 이곳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아-시르다리아 강변 유역 또한 아주 오래된 인간의 거주지였다. 그래서 이곳을 트랜스옥시아나(옥시덴탈과 오리엔탈의 경계)라 부르며 문명이 동서로 퍼져나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다만 이곳이 서쪽으로 그리스, 동쪽으로 중국에서 멀어 역사적 기록이 빈약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 당시 잘 알려져 있었고, 알렉산더에 의해 쫓기던 다리우스 3세가 최후의 망명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이곳에 박트리아 왕국을 건설해 그리스 최동단의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남겼다. 박트리아가 유라시아의 교차로 역할을 했기 때문일까? 허다한 민족들이 이곳에 거주하거나 지나갔다. 서양을 최초로 떨게 했던 스키타이족과 마사게트족 새족 월지족 등이 명멸했다. 그런데 그리스문명의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은 이들 새족과 월지족에 의해 멸망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언급된 민족 중 새(사카)는 인도북부의 석가족과의 불교적인 연관으로 인해 혹시 만들어진 역사이거나 가공의 민족으로 의심되기도 한다. 하지만 후자인 월지족은 박트리아를 통합하고 인도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쿠샨왕조의 기원으로 역사에 확실히 기록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월지족의 다섯 부족 중 하나인 귀상의 이름이 나라의 이름이 되어 쿠샨이라 했다고 전한다. 이들이 바로 헬레니즘과 불교를 결합한 간다라문명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어떻게 멀리 떨어진 월지족에 대한 정보를 이렇게 소상히 알고 있었을까? 월지족은 지금의 중국 감숙성 하서회랑지대에서 활동했던 흔치않은 인도-아리안계의 백인들이었다. 바로 중원 옆에서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까지 3백년 넘게 활동하던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대제국을 일으킨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실크로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옥을 거래한 기마민족

하서회랑 지역으로 란신철도가 지나고 있다. 그 뒤로는 치렌산맥이 병풍처럼 이어진다. 하서회랑은 하서(황하강의 서쪽), 현 간쑤성 서쪽의 1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좁은 회랑 모양을 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 점점이 오아시스 지대가 놓여있다. 황하강변의 란저우를 지나면 우웨이, 장예, 주취엔, 둔황으로 이어진다. 3천 년 전 바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이 월지인들이다. 월지인들이 언제 이곳으로 이동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월지인이 남긴 하서지역의 사정문화(沙井文化)는 북방초원문화의 특징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짐승의 모양을 칼자루에 조각하는 수법은 알타이식 청동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이 사용한 언어를 보면 보다 이들의 실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들이 쿠샨제국 시기에 사용한 언어인 토하라문을 분석해보면 인도-유럽어의 동 이란 계통의 사람들로 추정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 북방의 초원지대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의 일족이었던 이들이 어떤 시기 어떤 이유로 인해 중원에서 가까운 하서 회랑 지역으로 이주를 한 것이다. 이들을 중원 사람들이 인지한 시기는 이르면 서주에서 동주시대(기원전 800년경)이다.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교류가 시작되는데 그 중요한 물품이 옥이었다. 현 신강위구르자치구의 호탄에서 생산되는 연옥은 은나라시기부터 무척이나 귀하게 여기던 보석으로 '화씨의 벽' 역시 이곳에서 생산된 최고의 연옥으로 꼽고 있다. 바로 이 호탄의 연옥을 중원과 거래하던 이들이 하서회랑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월지인들이었다. 실크로드의 루트는 가장 원시적으로 청동기가 그리고 옥이 나중에는 비단이 주요물품으로 오갔던 길이다. 이중 두 번째 '옥의 길'을 경영했던 것이 바로 유목 기마민족이자 상인이었던 월지인들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200년경의 기록을 남긴 <사기> '흉노열전'에는 "동호가 강하고 월지가 흥했다"는 기록을 남겨 중원과 패권을 다투는 세력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이후 북방을 장악하는 흉노가 있었는데 선우(왕) 묵특이 태자시절 인질로 월지에 잡혀 있을 정도로 월지의 힘이 강했다. 하지만 묵특선우가 동호를 격파하고 월지를 쳐서 서쪽으로 몰아낸다. 이후 노상선우 때(기원전 140~135년 사이) 월지의 왕을 잡아 죽이고 그의 머리뼈로 술잔을 만드는 사건이 벌어진다. 월지인들은 흉노에게 원한을 품고 다시 더 먼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때 서쪽으로 달아난 이들을 '대월지'라 하고 감숙 지역에 남은 이들을 '소월지'라 했다. 이후 중국의 북방은 흉노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과연 둘로 분리된 월지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흉노의 압박에 견디다 못한 한무제는 대월지를 찾아 대담무쌍한 하급관리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게 된다. 


쿠샨과 대월지

중국 시안의 국립박물관에서 발견한 사천왕상이 있다. 머리는 과장되게 만들어졌지만 섬세한 근육의 표현이나 옷의 주름은 전형적인 간다라 미술의 표현 양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실크로드의 동단이라 할 수 있는 신라의 석굴암에서도 발견된다. 간다라 양식은 대월지, 더욱 정확하게는 쿠샨인들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 간쑤성 하서회랑지역에서 흉노에 의해 몰려난 대월지인들은 쿠샨과 어떤 관계인가? 대월지인들이 중국 서부와 중앙아시아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동서양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문명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먼저 말을 가축화하고 그것을 타고 전쟁을 수행했던 민족이 스키타이족이다. 광대한 유라시아초원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페르시아, 인도에서는 사카라 불렸고 중국에서는 월지로 불린 듯하다.(중국 문헌에서는 새족으로 불리기도 한다. 새족과 월지인들은 구분되어 기술되지만 풍습과 인종이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특히 월지인들은 기원전 2세기 전부터 중국의 변방에서 활동하며 기마문화와 남성의 바지문화를 전달했다. 또한 이들이 더 동쪽에 위치한 흉노와 동호에게도 기마문화를 전달한 것이 명백하다.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 사이 어느 시기부터 발흥한 흉노가 월지인들을 압박하고 그들의 본거지인 하서회랑지역에서 쫓아낸다. 그래서 한 무제는 용감한 관료인 장건과 기마에 능했던 노예 감보를 서역으로 파견해 쫓겨간 대월지인들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장건의 서역행인 것이다. 하지만 장건이 천산을 넘어 중앙아시아 대완(현 페르가나 분지)을 지나 대하(박트리아)에 도착했을 때 대월지인들은 그곳 생활에 만족하고 선대의 원한을 잊은지 오래라 동맹은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다리야 강 인근에서 강력한 5개의 흡후(봉건영주)로 나뉘어 있고 그 중 귀상흡후가 가장 강력하다는 정보를 얻어온다. 이후 대월지인들은 귀상흡후가 나머지 흡후들을 격파하고 귀상제국을 건설한다. 이것이 바로 쿠샨제국인 것이다. 이들은 간다라를 침공하고 인도북도에서 이란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면서 거대한 제국을 만든다. 이들이야말로 로마에서 시안까지 거대한 문명의 고속도로를 건설한 장본인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월지인들과 쿠샨인들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는 미스터리가 많고 그래서 수많은 이론이 존재한다. 이들이 스키타이 계통의 아리안인들이 것은 밝혀졌지만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 이들이 하서회랑의 월지인들이 전부인지? 아니면 박트리아인들과 동족인지? 어떻게 단숨에 초일류문명을 건설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끝이질 않는다. 다만 유력하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스키타이의 활동 범위가 무척 넓었다는 것과 타 문명을 흡수하는데 무척이나 빨랐다는 것, 중국이 여전히 쿠샨을 대월지라 불러도 별 저항감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대월지와 쿠샨인들의 계통적인 연속성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서회랑에서 베그람까지 6천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해 문명의 이동경로를 확장한 대월지인들, 그래서 우리가 실크로드와 노마드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들인 것이다.


월지와 신라인들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고, 특히 예맥한족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나라가 만들어지고 멸망해 갔다.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맥족이, 한반도 남부는 한족이 역사공동체의 중심이었다는데 별 이견이 없다. 하지만 청동기 이후 공동체의 일원들 중에는 매우 이질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띠는 것이 신라의 김씨 공동체이다. 신라를 명실공이 고대국가로 성장시킨 이 집단은 특유의 고분(적석목곽분)과 황금유물, 주변인들과 구별되는 생김새와 언어로 인해 수많은 미스터리를 만드는 역사의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고대사는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기 어려운 분야이다. 그래서 일정부분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상상력으로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리고 그 설의 대부분은 영영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많은 학자들이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보고 싶다는 꿈을 꾼다. 바로 2천 년 전 경주의 김씨 신라인들이 그런 꿈의 소재인 것이다. 지금까지 김씨의 독특한 문화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시작됐고 그 주인공들은 흉노 선비 스키타이 계통의 아리안족이 아닐까하는 다양한 이론이 등장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하나의 가설을 더 보탤 생각이다. 그것은 지난번까지 이야기했던 월지족의 한반도 유입설이라 해야겠다. 기련산맥 밑 현 간쑤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월지인들이 흉노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모두 이동한 것이 아니고 일부는 남아 '소월지'로 이름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영지는 곧 흉노에 편입되어 흉노의 제후인 곤야와 휴도의 지역이 된다. 그렇다면 소월지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마도 곤야와 휴도 둘 중 하나가 소월지인들의 공동체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가문이 정확하지 않고 금으로 만든 동상(불상이라는 추정도 가능)을 경배했다는 휴도왕이 소월지인 계통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는 성씨가 금이라는 점과 외모가 서구인 같았다는 점에서 그들의 민족적인 특징을 증거한다. 한무제에게 김이라는 최초의 성씨를 받은 후 김일제는 분명 시안에서 죽었다. 하지만 그의 성씨인 김은 한반도 남부에서 나타났고 한반도인들은 꾸준히 그들의 성씨가 김일제로부터 유래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 둘을 이어줄만한 역사적인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부터가 추정이다. 약 5만호 정도로 추정되는 휴도왕의 공동체는 한나라에 귀부하고 전에 살던 곳은 공지가 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들이 한무제에 의해 수행된 고조선 정벌과 한4군 설립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중원이 사용하던 정책 중 하나가 이민족 정벌에는 이민족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 근거가 지금의 평양에서 발견된 동복과 동물문양의 장신구 그리고 고졸한 적석목곽분 따위의 증거들이다. 이렇게 낙랑에 자리잡은 이들이 시간이 흘러 낙랑인화되고 고구려와의 긴장과 기타 이유로 꾸준히 신라지역으로 내려갔다. 실제 신라인들도 고래의 진한족에 고조선유민, 석씨 계통의 해양인, 중국 진나라 계통의 유민 등 새로운 땅을 찾아 바다 끝까지 온 사람들이 혼융되어 생겨난 역사공동체였던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월지인들이 정말 동쪽 한반도의 끝까지 진출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불쑥 한반도의 문화와 이질적인 초원문화가 등장하기에 수많은 상상을 한 결과물일 뿐이다. 하지만 같은 곳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멀고 먼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쿠샨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에 비해 월지인의 신라는 비현실적일까? 근대적인 국경이 만들어지기 한참전인 고대에 민족의 이동과 혼융은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 이동과 혼융이 오늘의 인류와 민족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더 자연스런 추정이다. 그래서 우리 혈관에 타고 흐르는 다양한 유전자를 획득하게 된 것이니 말이다. 나는 오늘도 꿈속에서 경주를 거니는 월지인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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