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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엽 Jul 28. 2020

죽었다 살아난 사진들

FSA 사진의 충격적인 검은 구멍

“상엽씨. FSA 펀치 사진이라고 들어봤수?” 

사실 다큐멘터리 하는 사람들에게 FSA(Farm Security Administration, 미농업안정국 이하 FSA)의 30년대 기록 사진 프로젝트는 신화와 같은 것이라 모를 리 없다.  ‘폐기된 사진의 귀환-FSA 펀치 사진전’의 전시 기획자 박상우 교수(중부대 사진과)가 지인이라 1년 전 이에 대한 언급을 들은 바 있다. 

“그래? 선택한 사진들 가장자리에 펀치를 뚫었나보지?”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했던 것은 오래전 필름을 사용하던 시절, 언론사 사진부장은 부원들이 가져 온 네거티브를 검토하고 선택한 필름 가장자리에 살짝 펀칭을 했다. 나는 그리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선택되지 못한 사진을 아예 사용할 수 없게 사진 가운데 펀칭을 해버린 것이다. 


검은 구멍들

사실 금시초문이었다. FSA를 다룬 수많은 사진사 자료를 봐왔지만 펀치를 했다는 기록도 보지 못했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기록 사진을 폐기해버린 역사가 있었나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 박교수가 기획했던 사진전은 종로구 옥인동의 위치한 갤러리 룩스에서 열렸다. 당연히 사진 기획자들 뿐 아니라 사진가들과 대중들에게도 이 사진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룩스의 1전시장은 빼곡하게 중간 사이즈의 사진들이 벽을 채우고 있다. 그 흑백 사진들은 여지없이 어딘가에 검은 구멍이 뚫려있다. 블랙홀 같이 이미지를 흡수하려는 듯, 또는 검은 태양이 뜬 아마게돈의 세계 같다. 이 사진들은 펀칭된 이유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중복되거나 기술적인 하자가 있는 사진, 수평 수직이 맞지 않은 사진, 사진가의 그림자가 나온 사진,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 등.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2전시장은 제법 큰 사이즈로 인화된 사진이 걸려있다. 여지없이 구멍이 뚫렸다. 중앙에 걸린 벤 샨이 찍은 아칸소 여인의 사진은 얼굴 절반이 뚫렸다. 오싹하다. 이 방에 걸린 사진은 너무 예술적이라는 이유로 구멍이 뚫렸다. 

우리는 이 사진들이 공황기의 미국 농촌을 기록한 것을 잘 알고 있다. 목적은 예술이 아니었다. 그런데 80년이 지나 우리 앞에 프린트로 제작되어 목격될 때 검은 구멍의 기표는 그 심연에 또 다른 기의를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무엇이 이 폐기되고 쓰레기처럼 취급했던 사진들의 진정한 가치인가? 

다시 1전시장으로 내려와 박교수와 공동으로 연구한 이영준 교수(계원대)의 글이 함께 실린 사진집 ‘다큐멘터리의 두 얼굴 : FSA 아카이브 사진’을 집어 든다. 아주 일목요연한 논문집에 가깝다. 이 전시장의 구멍 사진을 해독하는 열쇠인 것이다. 

각종 언론들이 이 사진전에 관심을 나타내고 이에 대한 기사를 프리뷰나 리뷰 형태로 내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관성에 젖은 기자들의 보도자료 짜깁기와 불충분한 전시 감상과 출판된 책에 대한 오독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80년 전 사진을 들여와서 서구 사진에 대한 편향된 취향이나 억지 담론을 유포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다. 그렇다면 두 연구자의 목소리를 들어봐야 한다. 

이들은 먼저 다큐멘터리 사진이 진실하고 사실적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혹시 그 사진들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권력에 조종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그리고 제작된 사진의 선택과 배제를 통해 “모든 사진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본의 윤리성을 전제하지만, 이 사진의 손은 원판에 구멍을 뚫을 정도로 폭력적이다. 따라서 이들은 다양한 ‘폐기된 사진 아카이브’에 대한 후속 연구를 주문하며, 침체된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연구와 사진 이론의 발전을 주문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마음속으로 지지하며, 몇 가지에 다른 시각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보자.  

사진가들은 자신이 찍은 전체 원판 사진을 보며 1차적으로 배제하는 사진들이 있다. 현격하게 기술적인 오류로 잘못 찍은 사진들이다. 초점, 흔들림, 노출 부족이나 과잉 등. 이러한 문제 있는 사진들은 과거 수동식 카메라와 필름을 사용할 경우 약 10% 정도 발생한다. 작가는 이런 사진들을 거의 아낌없이 폐기하거나 한 켠에 치워버린다. 하지만 FSA의 로이 스트라이커와 스탭들은 총 27만4000장 중에서 10만 장을 기했다. 거의 40%에 육박한다. 

흔히 ‘killed'로 파일 분류된 이 구멍 난 사진들은 로이 스트라이커가 이야기한 펀치한 이유로 드는 중복과 오류 치고 너무 많으며 원치 않았던 예술적, 민족지학적, 중복, 실수, 초현실적인 경향을 고려해도 마찬가지다. 3장 중에 1장을 폐기한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폐기된 사진의 원죄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해야 한다. 그것은 박상우-이영준 두 연구자도 지적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의도인 것이다.  

FSA가 뉴딜 정책의 산물이었음은 이미 이야기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은 부실은행의 국유화, 공공근로, 도시로 유입된 농촌 사람들의 재정착, 대규모 토목 공사 강행 등 이전의 미국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선 볼 수 없었던 급진적인 국가주도의 정책 ‘뉴딜’을 낳았다. 하지만 우리가 착각하는 것처럼 뉴딜은 공황을 이겨내지 못했다. 공황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뉴딜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덕분이었다. 하지만 루즈벨트 정부는 뉴딜의 성공을 위해 공공연한 대중 여론 환기의 필요성이 있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프로파간다(선전)가 필요했던 것이다. FSA의 사진은 특히 공황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당한 고통 받는 농민들의 이미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선택되어 정부의 입맛에 맞는 언론 기관이 무료로 배포했다. 어떤 때는 로이 스트라이크가 직접 나서서 이미지를 주문받아 자신의 사진가들에게 지시했다. 

대표적으로 도로디어 랭의 인디언 혼혈의 ‘이주민 어머니’ 사진이다. 이 사진은 당시 대표적인 사진 잡지였던 라이프에 실렸으며 이후 국가 발행의 우표에도 사용된다. 

이 같은 일련의 프로파간다 작업은 이미 그 사례가 있었다. 바로 1917년에 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연방의 알렉산더 로드첸코가 수행한 일련의 프로파간다 작업이었다. 이들(로이 스트라이커를 비롯해 FSA의 관료들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윗선)은 소비에트의 프로파간다를 연구하고 적절하게 미국에서 사용할 것을 정부에 권유했다. 다만 이 용어 ‘프로파간다’만은 루즈벨트 정부에 가해진 색깔 논쟁과 같이 정치적 부작용을 우려해 사용하지 않았다. 

농촌에서 일련의 작업을 수행하는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판단의 기준이 프로파간다였다는 증거도 있다. 소속 사진가 중 하나였던 매리언 포스트 월코트의 더스트 보울 지역 사진이 그 예이다. 대 공황기 로이 스트라이커는 월코트에게 이 지역의 ‘고난과 불모지’를 촬영할 것을 요구했다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같은 지역을 다시 찾아가서 ‘미국 땅의 가능성과 풍요로움’을 찍어 올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보울에서 옥수수 밭의 수확이 끝난 풍요로운 대지를 촬영했다. 로이 스트라이커는 독자들이 이러한 사진을 통해 조국이 파괴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라 생각했으며,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국가라는 보이지 않는 손은 ‘사진을 순수한 다큐멘터리 영역에서 순수한 프로파간다의 범주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프로파간다는 누구에게 가장 잘 통했을까? 1970년대 미국의 여론 전문가 토니 슈월츠는 “흔히 가장 정보에 취약한 사람들이라고 착각하겠지만 사실은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프로파간다에 더 잘 넘어간다”고 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죽었다 살아난 사진들

사실 이들 FSA의 사진 기록팀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순순한 기록자들이 아니었음은 프로젝트 종료(1943년) 한 해 전에 설립된 전쟁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 이하 OWI로 약칭)으로 이들의 작업이 그대로 이관됐음에서도 알 수 있다. 상당 수 FSA 작가들은 OWI를 위해 일했으며, 특히 남편이 고위직 관료였던 도로디어 랭은 OWI를 위해 서부연안에서 내륙으로 소개된 재미 일본인들의 수용소를 촬영하기도 했다. 

전쟁정보국은 미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복무한 순수한 프로파간다 조직이었다.(이 책에 기록된 것처럼 전쟁정보국은 CIA의 전신은 아니다. CIA는 전략사무국 OSS의 후신으로 47년 트루먼에 의해 창설됐다. OWI는 한 부서로 흡수된다.) 따라서 1945년 종전과 함께 해체된 OWI로 이관된 FSA 사진들 27만장도 함께 폐기처분 될 위기를 맞이한다. OWI는 증거를 남기지 않겠다고 의지를 보였지만 미 의회도서관 등의 구명으로 사진들은 살아남았고 FSA-OWI의 사진은 함께 묶여 의회도서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돌아봐야할 질문이 있다. 로이 스트라이커의 펀칭은 자체로 ‘killed’ 또는 ‘악’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로이 스트라이커는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수행했고, 소속된 사진가들 역시 이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로 고용된 아더 로드스타인은 스트라이커의 대학 제자로 업무를 충실이 이행했으며, 가장 열심히 일한 러쎌 리는 스트라이커의 업무 요구를 가장 잘 수행하며 가장 많은 사진을 남겼다. 남편이 고위 관료였던 도로디어 랭 역시 사소한 마찰은 있었지만 그녀의 작업은 OWI까지 이어졌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스트라이커로부터 거의 펀칭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정부 프로젝트에 고용되고서도 자신의 사진 철학을 굽히지 않았던 워커 에반스나 벤 샨이 사진 예술사에서는 빛을 발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진사에서 읽는 것처럼 이 FSA 사진들은 순수한 다큐멘터리 기록이나 예술적 사진집단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이 남긴 방대한 사진 아카이브 역시 재평가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념할 것이 있다. 오늘의 잣대로 당시의 행위를 평가하면 곤란하다. 즉 펀치를 했으니 스트라이커는 사진계의 ‘악마다’라거나 ‘살인자다’라고 평가하긴 곤란하다는 것이다. 

시각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에스텔 주심은 “프로파간다를 본질적인 악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속성을 잘 못 이해하는 것이다. 사회개혁이나 정치적인 변화에 몰두하는 사진가들은 자신들이 (감정적인 호소에 그치는) 전 단계 프로파간다에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정치 과정은 느리고 거대한 괴수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당시는 뉴딜을 선전하고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사진을 이용한 것뿐이며 더욱 더 강한 대중적 공명을 일으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당대의 역사는 당대의 것이다. 즉 우리 주변 누군가 신라가 통일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다’라고 푸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마도 그리해서 20세기 내내 FSA의 펀치 사진은 미국의 학자나 사진가들 사이에서 그리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다. 이 같은 행위가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행하게도 이제 어떤 정부도 역사적인 사료를 이렇게 파기하는 일은 없을 듯하지만, 대한민국 청와대는 퇴임 후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깨끗이 파기하고 나가는 것이 관례라서 재현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도 같다.      

    

펀치 된 사진은 우리 주변에도 있다

이제 사진의 선택과 배제라는 판단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개인의 선택과 배제는 사적영역으로 고스란히 둔다 해도, 공적영역에서 벌어지는 선택과 배제는 갈등을 일으킨다. 언론사에서는 사진 부장과 부원이 갈등하고, 출판사에서는 에디터와 필자가 갈등하고, 전시장에서는 큐레이터와 작가가 갈등한다. 선택은 권력의 위계로 나타나고, 배제는 상실 또는 부존재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사실 이런 제도에서 탈출할 수 없으며 ‘언어와 생각’처럼 사진은 그것 자체로 속성화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박상우 교수는 ‘밝은 방’의 작가 롤랑 바르트를 빌어 사진에는 “찍는 자, 찍히는 자, 보는 자 외에 선택하는 자”가 존재하다고 했다. 이 선택하는 자는 결국 사진의 배포권을 쥐고 있으며 사진은 배포되어 대중의 시선을 끄는 순간 ‘정체성’을 획득한다. 우리가 도로디어 랭의 수많은 사진 중에서 오직 ‘어머니’만을 떠올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선택하는 자에 대한 우리의 거부감은 저 위대한 워커 에반스의 놀라운 성취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아쉽게도 이런 일은 사진사 전반에서 극히 드문 일이다. 하지만 그는 몇 가지 의미 있는 메지시를 전달했다. 선택과 배제를 통해 구축된 제도의 틈 사이에서 과연 다큐멘터리 사진(또는 역사)은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며 진실을 전달하고 있는가를 물은 것이다. 이는 당시에도 가능한 일이었고, 물론 지금도 가능한 일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 곳곳 어딘가에 폐기되고 유폐된 사진 묶음들이 있을 것이다. 정부 기록 보관서에, 국정원에, 검찰에, 기무사에, 또또 그 많은 정보를 독점하고픈 국가 기관에 말이다. 그것들을 찾아내 공개함으로써 삭제된 역사를 복원하고 과거의 실수를 재현하지 않는 책무가 사진계에 주어졌다. 아마도 이 전시 ‘폐기된 사진의 귀환-FSA 펀치 사진전’의 두 연구자가 던진 숙제가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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