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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지 않는 말티즈 Jan 27. 2021

'잘 함'과 '완료'는 같은 뜻일 수 있다.

자수를 놓다 진지해져 버린 나

오늘은 늦잠을 잤다. 10시 반쯤 깼나..

일어나자마자 [맛있는 녀석들]을 봤다. 이 프로그램은 나한테 asmr 같은 프로그램이다. 놓쳐도 내용이 다 이해가 가고, 매번 먹는 것을 행복해하는 출연진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이상할 만큼 안정감이 느껴진다.


프로그램이 끝나갈 즈음, 사두고 제대로 시작을 못한 프랑스 자수 재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3주 전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현재에 대한 불만으로 잠 못 드는 밤에 늘 그렇듯 하늘색 그리고 살구색 수면제 두 알을 먹었다. 이 수면제를 먹으면, 갑자기 없던 식욕이 돋거나 쇼핑이 하고 싶어 진다. 최근까지도 이러한 욕구를 이기지 못해 갑자기 뭘 먹거나 인터넷 쇼핑을 하고 다음날 후회하는 날들을 반복해왔다.


다시 돌아가서 3주 전, 그러니까 이러한 나쁜 습관에서 허우적거리던 어느 날 밤에 내 눈 속 가득 알록달록한 프랑스 자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블로거의 작품이었는데, 나도 이런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미친 듯이 올라왔다. 그리고 블로거가 출판한 책과 관련된 물품을 충동구매했다. 거의 23만 원쯤 들었던 것 같다.


그때 샀던 재료들로 오늘, 첫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갑자기 생겼다. 나처럼 만성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결심 또는 욕구는 반짝하며 떨어지는 유성보다 더 찰나이기 때문에 결심이 서는 순간 재료들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한 땀 한 땀 책을 보고 수를 놓으며,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와 목이 점점 아파왔고 '이걸 왜 끝내야 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애니메이션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은근 몰입감과 추리가 필요한 애니메이션이라 그런지 어느 순간 '왜 끝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할 틈이 없어지고 '수를 예쁘게 잘 놓아야겠다.'라는 생각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5시간쯤 지났나... 내 두 손에 수가 완성되어 있었다. 알록달록한 수들을 보니 너무나 뿌듯했다. 물론, 완성도면에서 별 5개 만점에 1.5개쯤 되는 낮은 수치의 작품이었다. 자세히 보면 울퉁불퉁하고, 길이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지  못할 것 같았던 자수를 완료했다는 것에 조금 감격했다. 그리고 총 12편의 애니메이션도 모두 끝났다.


오늘 수를 끝내고 나서 들었던 내 생각들..


1. 왜?라는 질문은 나를 괴롭게 만든다.


2. 왜?라는 질문이 생기면, 생각을 돌릴 다른 즐거움을 찾자. 금전적 소비나 내 몸을 망치는 것이 아닌 것들로...


3. '힘듦'이란 개인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할 때 한계가 느껴져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우선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남들에게 말해도 공감을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힘들 때에는 의연하고 차분하게 그 일에 대해 홀로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 지 결론을 내리자. 남에게 힘들다고 말해 봤자 그것은 잠시 잠깐의 징징 거림 일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못해도 좋다. 손에서 놓지만 말자. 놓지 않으면 우선 '완료'는 하게 된다. 울퉁불퉁하지만 '완료'를 하게 되면 한계를 극복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울퉁불퉁 완료'를 자주 하다 보면 결국 '매끄러운 완료'가 되지 않을까...


'잘 함'에 집중하지 말자. 세상에 '잘 함'의 기준은 몇 개 없다. 그냥 '완료'에만 집중하자. 어쩌면 '완료'가 '잘 함'인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수 하나 완성하고 뭐 이리 진지한 생각 까지냐." 이겠지만 쓸데없는 완벽주의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된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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