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페망고 Aug 10. 2020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

인도 바라나시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흰두인들에게 죽기 전에 꼭 한 번 와보고 싶은 성지 같은 곳인 바라나시는 싸늘한 죽음의 냄새와 쓰레기 더미로 온종일 스산한 분위기였다. 특히 방음이 전혀 안 되는 호텔방에서 새벽까지 요란하게 들리던 징과 요령 소리는 나도 벌떡 일어나 몽유병 환자처럼 강가로 걸어가게 할 만큼 강한 신력이 느껴졌다. 


오늘은 여행책자에 나온 오래된 사원 엘 가 볼 예정이었다. 호텔 근처에 있는 허름한 카페에 앉아 짜이를 한잔 주문했다. 열 살 남짓 된 남자아이가 주문을 받자마자 맑은 눈을 반짝이며 마른 소똥이 타오르는 화덕에 누런 소스 팬을 올리고 우유를 한 국자 부었다. 말간 우유는 투하된 홍차 티백에서 흘러나온 진한 색과 어우러져 얇은 막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는 부뚜막 위에 놓인 돌멩이를 손에 쥐고 카다몬(인도 요리에 사용하는 향신료)을 빻아서 티에 넣었다. 내가 빤히 보고 있었음에도 여러 번 코를 후비고, 다리와 머리도 긁어가면서 아이는 정성을 다해 나를 위한 짜이를 만들었다. 


곧 씻은 지 백 만년은 더 된 듯한, 누런 때가 끼어 있는 작은 찻잔에 아이는 짜이를 따라 내게 건넸다. 나는 위생상태가 엉망인 이 짜이를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잠깐 고민을 했다. 주인과 아이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며 마셔보라고 했다. 나는 죽기야 하겠어, 하는 심정으로 한 모금 마셨다. 짜이는 제조과정과는 상관없이 달콤했고, 또 깊은 맛이 났다. 어젯밤 잠을 설쳐서인지 정신이 화-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짜이를 단숨에 들이켜고 한잔을 더 달라고 했다. 아이는 아까와 똑같은 공정으로 짜이를 만들어 내게 내밀었다. 이 맛난 짜이 덕분에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책자에 있는 지도를 보고 사원으로 향했다. 피부병에 걸린, 힘없는 개들이 줄지어 나를 따라왔다. 나는 혹시나 개들이 나를 먹잇감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 길가에 뒹구는 나무 작대기를 들고 저리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겁에 질린 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사원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자, 사원 앞의 기념품 판매점에 있는 사내가 여자는 못 들어간다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책을 펼치고 여기에 그런 말은 없다며, 쭈뼛쭈뼛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사내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투로,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사원 안에 있는 아름드리나무 위의 원숭이들이 나를 보며 낄낄거렸다. 문 앞에 서있는 나를 밀치고 인도 관광객들이 내게 야유를 퍼부으며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빼고 사원 안을 들여다보니 여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념품 가게가 줄지어 서 있는 사원을 한 바퀴 돌았다. 아쉽지만 그냥 가려고 발길을 돌렸을 때,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사원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군대를 제대하고 일 년째 세계 여행 중이라는 유대인 베니 Beni는 내 손을 살며시 놓으며, 여기는 여자 혼자 여행하기는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나는 베니와 사원 안에 있는 오래된 유물들을 감상했다. 기원전에 사용했을 듯한 물건들을 보니 마치 내가 과거로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었다. 베니와 나는 사원의 지붕으로 올라가서 바라나시를 내려다보았다. 베니와 사원을 나왔을 때, 나를 저지하던 기념품 가게의 사내가 베니에게 인도말로 뭐라고 하자 베니는 질세라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인도말로 뭐라 뭐라 따졌다. 


나는 베니에게 고맙다며 아침에 마셨던 그 카페에 가서 짜이를 한 잔 대접했다. 베니는 내일 강가(갠지스) 건너편에 가보려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이 카페에서 내일 정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베니는 나 혼자서는 둘러볼 엄두가 나지 않던 가트(화장터)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훤칠한 키에 덩치가 좋은 베니는 나보다 어렸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베니는 강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나룻배를 흥정했다. 나는 베니의 손을 잡고 작은 배에 올랐다. 노파는 대나무 장대로 강바닥을 짚고 건너편으로 서서히 나아갔다. 갠지스의 풍경을 찍는 내게 베니는 자기의 꿈이 포.토.그.라.퍼.라며 카메라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나는 베니와 여행하는 동안, 나의 인생 샷을 기대하며 베니가 하라는 대로 각양각색의 포즈를 취했다. 


우리가 강 건너에 다다랐을 때, 서서히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가트에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강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고, 또 빨래를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가 하면, 시체를 태우기 위해질 좋은 샌들우드로 재단을 쌓고 있었다. 


갠지스강. 강가. 이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 아니 흰두인에게는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만들어진 얼음처럼 차가운 갠지스 강에 몸을 씻으면 모든 죄가 말끔히 씻겨지고, 윤회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흰 천으로 둘둘 감싼 시신을 들고 사람들이 가트로 내려와 몸에 물을 뿌렸다. 유족들은 기도를 드리고, 시신을 재단처럼 쌓아 놓은 샌들 우드 위로 올렸다. 곧 불이 지펴지고 매캐한 연기와 함께 향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누구나가 맞는 죽음, 그 어디에도 영원이란 것은 없을 것이었다. 우리도 저들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갠지스처럼, 어머니의 강이 있었으면 아무리 힘든 삶이라도 버티어 살아낼 수 있지 않은 생각을 했다.


붉은 노을이 초라하고, 낮은 집 뒤로 내려앉자 다른 가트에서는 추모제를 지내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타다만 개의 시체와 사람의 시체가 섞여있는 갠지스 강 위로 촛불이 밝혀진 붉고 노란 꽃을, 그들만의 염원을 담아 띄우기 하나씩 띄우기 시작했다. 촛불은 빙글빙글 돌다가 한 곳으로 모여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촘촘히 수놓고 있었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촛불로 갠지스강이 꽃밭처럼 불타오르자 노파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갈 것을 재촉했다. 베니와 나는 나룻배를 타고 가트로 돌아와서, 강가에 커다란 배를 띄우고 올리는 제를 구경했다.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나와서 현란한 춤을 출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필름을 갈아 낀 베니는 나를 향해 계속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 강가에 띄우는  플로팅 초를 파는 여인



베니는 부다가야로 가고 나는 네팔로 떠났다. 카트만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새벽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나의 마지막 여행지인 포카라로 갔다. 


히말라야의 설산이 호수에 그대로 비치는 포카라는 아름다움과 고요 그 자체였다. 

나는 댐 사이드 근처의 “피스풀 peaceful”이란 호텔에 머물렀다. 


호텔에는 영화 촬영 팀이 머무르고 있었고, 호텔 투숙객중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나는 영화배우와 감독과 금세 친해졌다. 나는 예쁘게 생긴 여배우에게 네팔 가요를 배우고, 감독의 지시로 호텔에 머무르는 내내 영화 촬영 팀의 주방장이 해주는 특식을 먹었다. 그들은 내가 외국인, 아니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환대를 베풀었다. 


레이크 사이드까지 걸어서 산책을 다녀오니 호텔에서 일하는 아이가 누가 찾아왔었다고 했다. 이곳에서? 나를? 누가? 젊은 남자였고,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무릎을 쳤다. 베니가 포카라로 온 모양이었다. 다음날 나는 나가지 않고 호텔에서 베니를 기다렸다. 멀리서부터 내 이름을 부르며 예의 그 당당함으로 호텔에 나타난 베니는 나를 보자 깊게 포옹을 했다. 베니는 오토바이를 렌트했다며 함께 나가자고 했다. 


나와 베니는 체 게바라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히말라야에서부터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포카라 곳곳을 함께 여행했다. 베니는 틈만 나면 오토바이를 멈추고 인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내 사진을 찍었다. 진짜 포토그라퍼처럼 다리를 벌리고, 몸을 구부리고 쓰리, 투, 완, 찰칵을 쉴 새 없이 외쳤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사진을 인화하면, 꼭 보내주겠다고 베니에게 약속을 했다. 


나는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카트만두로 가야 했다. 베니는 좀 더 포카라에 머물다가 다시 인도를 거쳐 스리랑카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내가 언제쯤 이스라엘로 돌아갈 거냐고 묻자, 한 두 달 정도 더 여행을 한 후 갈 거라고 했다. 


우리는 아쉬운 이별을 했다. 나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텔아비브로 찾아가겠다고 했지만 기약 없는 일이었다. 




베니와의 추억을 품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내 인생의 걸작을 기대하며 필름 열 통을 사진관에 맡겼다.


며칠 후 사진을 찾으러 갔는데, 사진관 아저씨는 달랑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사진이 이것밖에 안 돼요?”


“절반은 흔들리고, 절반은 인물을 찍은 건지 배경을 찍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내가 쓸만한 것만 골랐어요. 도대체 누가 찍은 건지……” 


나는 깜짝 놀라서 봉투를 열고 사진을 훑어보았다. 사진관 아저씨가 ‘쓸만한 것’만 골랐다고 했지만, 베니가 찍은 사진 중에 쓸만한 것은 없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베니는 포토그라퍼가 꿈이었지, 포토그라퍼가 아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철썩 같이 그를 믿고 오만 포즈를 취한 내가 우습기까지 했다. 


베니 덕분에 나는 누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그가 ‘잘하는 것’ 일 거라고 믿지 않는다. 


                                           * 이런 종류의 사진이 대다수였다고나 할까.... 씁쓸......

작가의 이전글 그녀의 이름은, 십자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