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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초 Sep 01. 2023

120년 전통의 먹자골목에서 성게를 맛보다

4. 칭다오 식도락 여행의 끝판왕 피차이위엔(劈柴院)

인두화(낙화)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오른쪽 뺨을 감싸 어루만지자 느껴지는 포근하고 간지러운 감촉에 살며시 눈을 떴다. 옅은 신음을 내뱉으며 힘껏 기지개를 켜고 개운하게 일어나 뭉그적거리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거실 커튼을 걷었다. 내가 떠나고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없는 컴퓨터 책상 의자에 털썩 앉아 머리를 말리던 중 흘깃 본 책상 끄트머리에서 낯익은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중학교 1학년 시절 학교에서 손수 작업한 인두화였다. 반가움에 물기를 말리다 말고 "오.." 작은 탄성을 내며 자화자찬했다. 당시 여러 예시중 굳이 가장 어려운 사진을 택하여 작업했는데, 곳곳의 명암은 열네 살 치고 감각 있게 잘 넣은 것 같다. 아쉬운 점은 가장 중요한 꽃의 이름을 잊었다는 것이다. 손수 그린 꽃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일종의 수치로 다가왔다.


억지로 기억을 끄집으려다, 달궈진 인두 끝에서 은은하게 타들어가며 피어오르는 나무 향에 취해 손가락을 크게 데일 뻔했던 잔상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직접 그린 인두화(낙화)


세상은 넓고 음식은 다양하다


동쪽 지평선 위로 서서히 해가 솟아오르면서, 거대한 봉우리들이 덮어쓴 흰 모자가 등불이 켜지듯 차례차례 빛을 발하였다. 더운 날씨를 예상하고 들고 나온 부채를 연신 힘껏 부쳤다.


오늘의 목적지는 장닝로(江宁路)에 위치한 '피차이위엔(劈柴院)'이다. 1902년에 생긴 이 골목은 당시 땔감용 장작을 팔던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때문에 '땔감 정원'이라는 의미를 따서 '피차이위엔(劈柴院)' = '장작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땔감을 파는 상점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을 상대로 하던 음식점들은 영업을 지속하고 있는 매력적인 장소이다.


이곳 꼬치 거리에는 정상적인 꼬치뿐만 아니라 불가사리, 매미, 전갈, 굼벵이, 성게 등등 혐오스러운 음식을 팔기도 한다. 때문에 사 먹기보다는 구경하러 가는 관광객이 매우 많다. 과거에는 거리에 풍기는 취두부의 역한 냄새와 쓰레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래간만에 들른 피차이위엔은 놀라울 정도로 정돈이 잘되어 있고 취두부 냄새도 덜 느껴졌다.


피차이위엔 골목


혐오스러운 곤충 꼬치를 뒤로하고 돌길을 따라 걷다 비교적 만만해 보이는 성게를 마주쳤다. 성게라고 해서 우니(성게알)를 떠올리며 맛있을 것이라 착각하면 아니 된다. 이곳에서 파는 성게는 꺼림칙한 가시 안에 내장과 계란을 섞어 놓아 찜인 듯 푸딩인 듯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로 보면 더욱 적나라하다.


중국에 오래 살았다지만 혐오 음식을 먹어본 적은 친구들과의 내기에서 패배했을 때 외에는 없었다. 구경 정도로 만족하고 지나칠까 했지만, 어느 정도의 욕망을 해소하지 못하거나 호기심이 풀리지 않으면 오랜 시간 답답해하는 성격 탓에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하나 주문했다.


한 수저 떠서 맛보자 혀에서 묘한 거부감이 밀려왔다. 생전 처음 느껴지는 어이없는 맛에 입가에 헛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집념 때문에 깨끗이 먹고는 가게 사장에게 "개성이 강해서 맛 적응이 어려운 음식이네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특별한 곳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독특한 음식이니 만큼 제대로 맛보았다는 사실에 후련함을 느끼며, 이어서 골목 곳곳에 파는 음료와 다양한 꼬치를 음미하며 돌아다녔다.



여행 중 마주친 인연


꼬치 거리를 나와 피차이위엔 입구에 위치한 어느 상점에서 여러 장식품을 구경하던 중 누군가 슬금슬금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꼬치거리에서부터 우연히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마주쳐 반가움에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다가 걸었다고 한다. 해외에서 자국민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이자 행복이다. 쑥스러운 얼굴로 먼저 다가와준 마음을 감사히 여기며 무안하지 않도록 넉살 좋게 대화를 이끌었다. 좀 전에 먹은 꼬치집 성게 이야기, 피차이위엔 정문에서 겪은 일화, 여행온 계기 등 가벼운 주제로 웃고 떠들며 한층 편해진 분위기에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곧이어 입맛에 맞을만한 중국음식을 추천해 달라는 그녀에게, 보편적으로 여행 와서 먹는 음식을 배제하고 내가 좋아했던 중식 면요리와 음식, 꼬치 종류, 훠궈 먹는 방식 등 몇 가지 알려주었다. 그러자, 보답으로 여행하는 동안 날을 잡아 저녁에 맥주 한 잔 사고 싶다며 연락을 주겠다고 하는 그녀의 제안을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수락하고 나는 서둘러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피차이위엔 꼬치 골목 입구 주변 상점


"다음은 어디를 가려했더라.."

갑작스럽게 만난 새로운 인연에 당황한 나머지 다음 목적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혼잡한 교통상황과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틈사이에서 엉거주춤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맙소사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다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눈 탓에 계획이 약간 틀어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혼자 하는 여행에는 이러한 즉흥이 주는 재미도 있어야지~"라 속으로 되뇌며, 외려 한껏 업된 기분으로 뜨거운 햇볕 아래 다시 힘차게 부채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새 한 마리 없는 무정한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치 생명의 자취가 존재하지 않고 아무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 황야의 험준한 사막을 횡단하는 용감한 모험가처럼 홀로 한보씩 한줄기 길을 향해 걸음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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