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약속도 외출도 없다 보니 집 안에서 이것저것 일거리를 찾고 있다 사진첩 하나를 들쳐 보게 되었다.
지금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 만들지만 나는 사진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중에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사진 속에는 나와 어떤 남자가 스튜디오에서 조명을 받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상해 외국어 대학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있던 때에 있었던 이야기다. 벌써 15년 남짓 지난 이야기네.
그 당시 일본 항공사 지상근무를 6년 즈음했을 무렵 사업가의 꿈을 가지고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었다.
수업 중에 전 선생님(중국 담임선생님)은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유학 오기 전에 어떤 공부를 하고 있었는지 질문하였다.
대부분 자기 나라에서도 학생이었던 그들은 전공 학과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직장과 직업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 저는 한국에 있는 일본 회사에서 항공 근무했어요."
" 아.. 역시 그렇구나. 공중아가씨(空中小姐)였구나."
" 아니요, 항공아가씨(航空小姐-이 단어는 중국어에는 없다)요."
" 그래, 공중아가씨! 그래서 네가 그렇게 웃는 모습이 예쁘구나."
공중아가씨를 스튜어디스라고 하는데 그 당시는 그 뜻을 잘 모르고 항공사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을 그렇게 이야기하시나 보다 생각했었다. 전 선생님은 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본인 자랑이 시작되었다.
본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동방항공 한중노선의 비행기에서 근무하는 한국 스튜어디스의 중국어 발음 교육을 하신다 했다. 이 일을 맡고 있는 본인이 얼마나 발음이 정확하고 실력이 뛰어난 지를 설명하느라 수업시간 반이 날아갔다. 그래서 내가 그들과 같기에 너무 친근하다는 말로 마무리 지으셨다.
이 긴 말속에 분명 오류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많은 학생이 있는 수업시간에 나에 대한 이야기로 더 이상 시간이 허비되는 게 싫었다. 이 잠깐의 침묵이 얼마나 많은 일을 가져올 거라는 걸 상상도 못 한 채.
하루가 지나고 우리 반에 일본인 학생이 나에게 일어로 인사를 하기 시작하더니 이삼일이 지나니 다른 반에 일본 여학생들이 나를 슬쩍슬쩍 보러 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나를 보러 오는지도 사실 몰랐다.
하루는 한 여학생이 나에게 나의 한국생활을 물으며 필기도구를 꺼냈다.
" 너는 좋았겠다. 좋은 회사에 다녔어서. 나도 그 회사가 목표야. 근데 왜 관두고 중국어 공부해? 넌 키가 얼마니? 영어도 잘하니? 면접 때는 어떤 질문을 했어?" 등등
전 선생님은 자기 반에 한국에서 온 미소가 예쁜 스튜어디스가 있다, 본인은 그런 예쁜 한국 스튜어디스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중국어를 가르치러 가는 완벽한 발음의 선생님이다,라고 다른 반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 돌아다니셨다. 내 이야기로 시작해 본인의 자랑으로 끝나는 이 레퍼토리는 각반마다 무한 재생이 되고 있었다.
그때 이상하다고 느꼈고 바로 선생님에게 정확하게 설명했어야 했다.
하루는 망설이다가 우리 반 일본인 친구에게 상의를 했다.
" 나는 항공아가씨지 공중아가씨는 아니야."
" .......그거나 그거나.."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일본 학생들 사이에서는 나는 4개 국어를 하는 스튜어디스 언니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셔서 나에게 빨리 000호 강의실로 가 보라고 하셨다. 방송국에서 왔다고. ' 이잉? 웬 방송국?'
" 선생님, 왜요? 방송국에서 저를 왜요?"
" 너 말고도 외국 친구들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들어. 어서 가봐."
등을 떠밀었다.
찝찝한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학교 관계자로 보이는 선생님들과 머리가 반쯤 벗어지셨지만 어딘가 멋스러운 중년의 남성과 젊은 여성이 찻잔을 들고 대접을 받는 듯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 앞에는 유럽의 여학생 한 명과 일본인 남학생이 앉아 있고 나까지 세명이었다.
설명은 그러하다.
본인들은 상해 TV에서 나왔고 <상해 오락>이라는 프로그램의 제작팀이라는 소개로 시작되었다.
외국인이 나와서 게임도 하고 문제도 풀고 장기가 있으면 장기자랑도 해도 된단다.
그 일본 남학생은 TV에서 본 적이 있다며 너무 재밌어서 자주 챙겨본다고 발음이 정확치 않은 중국어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목소리에서 약간의 설레임이 느껴졌다.
듣는 순간 너무 뜬금없다 싶었다.
20살 학생이었다면 너무 재밌는 추억이 생긴다며 신나 했을 것이다.
안 하겠다고 하는 순간 그 중년의 남성은 눈이 동그래지며 나에게
"아까 전 선생님이 너를 꼭 추천한대. 한국에서 스튜어디스 했다며? 우리 프로그램에 꼭 나와주길 바래. 아직 스튜어디스였던 사람은 안 나왔었어."
또 담임이 나를 소재로 본인의 자랑을 한바탕 하셨구나.
머뭇거리는 동안 그들은 설명을 이어갔고 내 머릿속 생각끝에는
' ...그거나 그거나..'
나의 학교 생활도 조금의 변화가 있었다. 키가 조금 터 커 보이게 속굽이 있는 운동화나 구두를 신었고 화장도 아예 안 하다가 립스틱을 다시 바르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 사실처럼 되어버린 현실에 나 또한 나도 모르게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녹화날이 왔다. 대기실에는 우리 학교 일본 남학생과 여러 인종의 낯선 외국인 몇 명이 더 있었다.
제작진이 대본이라며 하나씩 나누어 줬다.
대본의 첫 대사를 보고 머리가 쭈뼛 선다.
----그거나 그거나 2로 계속----